사회적 신뢰는 한 나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보통 경제적으로 부유해질수록 사회의 신뢰도가 높아진다고 하지만, 2015년 ‘살기좋은 나라 순위' 2위를 기록한 스위스는 오히려 가난으로부터 신뢰가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스위스는 용병으로 먹고 사는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보다 현실적으로는 ‘일벌백계’의 제도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약속을 어기는 것을 수지맞지 않는 장사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부럽기만 한 스위스의 신뢰는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쌓여온 것일까?
스위스에 와서 처음 기차를 탔을 때, 표 검사를 어디서 하나 한참 두리번거렸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냥 타면 된단다. 버스도 마찬가지. 대신 검표원이 무작위로 표 검사를 하는데, 제네바 시내에서는 대여섯 번 버스나 기차를 타면 한 번 정도 만나게 되는 것 같고, 시외에서는 거의 만난 적이 없다. 이런 식의 소소한, 그러나 남들이 나를 무조건 믿어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일단 놀라게 되는 ‘신뢰’의 징표는 생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한 스위스 대형서점 회원카드 혜택 중에 영화할인이 있다. 인터넷 영화 예매를 하면서 ‘할인카드가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에 ‘예’를 누르고 번호를 입력하려 회원카드를 꺼내는데 그냥 결재 화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현장에서라도 카드 확인을 하겠지’ 생각했는데 예약증을 보여주니 아무 말 없이 표로 바꿔준다. 지역스포츠센터에서 지역주민 할인가에 접수를 할 때도, 동사무소에서 지역주민 할인 기차표를 살 때도, ‘지역주민이세요?’라는 질문에 ‘네’하면 그만이다.
살기좋은 나라 순위 2015년 스위스 2위, 한국 28위
학교에서도 교사에 대한 신뢰는 기본이다. 스위스 공교육에서는 중학교에서부터 인문계와 실업계로 나눠지는데, 진로는 연합고사나 수능시험 같은 한 번에 순위가 나오는 시험이 아니라, 주로 내신 평가로 결정된다. 내신은 우리로 치면 수행평가에 해당하는 과제물이나 쪽지시험을 수시로 평가하고 거기에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합산하는 방식으로 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가 거의 절대적인 평가 권한을 갖는다. 가끔씩 교사가 산정하는 내신 평가와 진로 지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부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 제도가 큰 문제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교사의 결정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신뢰는 한 나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레가툼(Legatum) 연구소의 ‘살기좋은 나라 순위(Prosperity Index)'에 의하면 2015년 스위스는 2위, 한국은 28위를 기록했다. 경제, 교육, 보건 등 평가항목 중 ‘사회적 자본’ 항목에서 스위스가 9위를 한데 비해 한국은 85위를 기록했다. 주로 설문조사로 평가하는 ‘사회적 자본’의 세부 항목 중 ‘친구와 가족이 당신을 어려울 때 도와줄 것이라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스위스 국민의 96%가 ‘예’라고 대답한데 비해 한국 국민은 73.5%만이 ‘그렇다’고 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항목에 ‘그렇다’고 답변한 비율도 스위스는 45.3%였지만 한국은 25.8%에 그쳐 부끄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스위스 사회의 신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보통 경제적으로 부유해질수록 사회의 신뢰도가 높아진다고 하지만, 스위스의 신뢰는 오히려 스위스의 가난으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불과 150년 전만 해도 스위스는 용병으로 먹고 사는 가난한 나라였다. 용맹과 충성만이 재산이었으니 신뢰할 수 있는 용병이야말로 상품가치가 높은 용병이었던 셈이다. 지금까지 교황청 경비를 스위스 근위대가 담당하는 것도 1527년 신성 로마제국과의 충돌 때 스위스 용병만이 끝까지 남아 교황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구가 800만명 밖에 안 되는 소국, 그나마도 산악 지대가 많아 대도시가 발달하지 못하고 소규모 도시나 코뮨(우리나라 읍면동 단위) 위주로 생활권이 형성된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신뢰’에 기반을 둔 교육 실시
보다 현실적으로는 ‘일벌백계’의 제도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약속을 어기는 것을 수지맞지 않는 장사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제네바 시내의 버스 2시간권 요금은 3프랑(3,600원)인데, 무임승차가 처음 적발되면 100프랑(12만원), 두 번째 적발되면 140프랑(17만원), 세 번째 적발되면 170프랑(2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별 생각 없이 과속하다 100만원, 200만원의 벌금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어려서부터 ‘신뢰’에 기반을 둔 교육을 받으며 커간다는 것도 신뢰사회의 중요한 배경일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만 4세부터 의무교육인 여기 학제로는 3학년)인 아들은 매일 연락장에 그날 태도를 초록(양호), 노랑(주의), 빨강(불량)으로 표시하는데, 이 표시는 선생님이 해주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이 칠판에 노랑칸, 빨강칸에 이름을 적으면 이름이 적힌 아이들은 자기 알림장에 직접 색깔로 표시를 한다. 학생이 자기한테 유리하게 바꿔 적지 않으리라는 선생님의 작은 신뢰가 나에게는 신선하다. 또 아이들은 1학년부터 번갈아가면서 달력 뜯기, 칠판에 그날 과제 적기, 줄반장, 교실에서 키우는 햄스터 먹이주기 등 모두가 작은 임무를 하나씩 부여받고 어려서부터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에 대한 훈련을 받게 된다.
한 사회의 신뢰는 그 자체로서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 사회의 경제를 부드럽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는 데에서 경제적으로도 큰 역할을 한다. 물론 스위스의 신뢰가 항상 긍정적으로만 활용된 것은 아니다. 은행과 고객 간 굳은 신뢰가 스위스 비밀은행을 탄생시켜 전 세계의 검은 돈을 빨아들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스위스 정부는 2018년부터 비밀계좌 제도를 폐지하고 다른 나라 당국과 계좌정보를 교환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업에 대한 신뢰가 굳건할 때 거래가 원활해진다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UBS, 네슬레와 같은 스위스의 대표적 기업들도 모두 소비자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기업들이다. 또한 요새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보편적 복지, 선별적 복지의 논쟁에서도 ‘신뢰’가 기반이 된다면 더욱 발전된 논의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스위스 초등학교는 원칙적으로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등교하는데,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는 점심에 돌봄교실과 급식을 신청할 수 있다. 급식비용은 소득에 따라 차등 부담하는데, 이 제도의 근간은 국민 모두가 자기 소득을 투명하게 신고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회적 신뢰가 없는 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봉급생활자들은 자신들의 유리지갑 소득은 고소득 자영업자에 비해 과다하게 잡혀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차상위 계층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신고 소득을 더 낮춰 가장 낮은 급식비용을 내려고 하지는 않을까?
우리로서는 사회적, 역사적, 경제적 맥락이 있기에 스위스의 사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부럽기만 한 스위스의 신뢰는 확실히 스위스의 큰 자산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수준인 우리의 사회적 신뢰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쌓아 나가야 하는 것일까? 서로 다른 우리도 언젠가 보지 않고도 서로를 믿을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