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innovation)과 접근성(access)은 의약품의 역할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두 축이다. 지카, 에볼라나 메르스 등 새로운 바이러스와 질병이 계속 발견되고 있고, 의약품의 발전과 함께 질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도 이에 적응해 의약품을 무력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의약품의 지속적인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의약품이 질병퇴치라는 본연의 목적대로 쓰일 수 있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UN 사무총장 고위급 패널이 지난 9월 발간한 「보건의료기술에 대한 혁신과 접근성을 제고하기(Promoting Innovation And Access To Health Technologies)」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의약품 개발과 이익의 공공화를 통해 혁신을 촉진하고 접근성을 제고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약품은 질병의 진단, 치료 또는 예방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없다면 오늘날 많은 수의 인류는 여전히 감염병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목숨을 잃어야 했을 것이다. 혁신(innovation)과 접근성(access)은 의약품의 역할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두 축이다. 지카, 에볼라나 메르스 등 새로운 바이러스와 질병이 계속 발견되고 있고, 의약품의 발전과 함께 질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도 이에 적응해 의약품을 무력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의약품의 지속적인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의약품이 질병퇴치라는 본연의 목적대로 쓰일 수 있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긴급상황 시 복제약 생산 가능한 강제실시권, 실제에선 발휘되기 어려워
의약품의 이 두 축이 도전받고 있다. 항생제에 대한 세균의 내성은 증가하고 있으나 새로운 항생제 개발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반면 높은 약가 등으로 인해 아직도 상당수의 인류가 의약품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에볼라 환자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했으나 그간 진단이나 예방, 치료 관련 의약품 발전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최근 1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서아프리카 에볼라 대응과정상 문제의 하나로 지적됐다. 아울러 의약품 특허권(patent)이라는 지적재산권 보호가 제약회사의 독점권을 보호해 지나치게 높은 약가로 귀결되고 있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최근 이 논의에 불을 붙인 보고서가 발간됐다. UN 사무총장 고위급 패널(UN Secretary-General’s High-Level Panel on Access to Medicines)이 지난해 9월 발간한 「보건의료기술에 대한 혁신과 접근성을 제고하기(Promoting Innovation And Access To Health Technologies)」라는 제목의 보고서다. 미국·EU·일본 등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고, 브라질·인도·중국 등은 이를 제약 선진국의 독점권을 완화하는 기회로 활용하려고 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의약품 접근성 제고를 위한 지적재산권 활용 문제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들은 1995년에 발효된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TRIPS)이라는 국제협정을 준수해야 하는데, 이 협정에 의해 의료기술에는 통상 20년간의 특허권 보호기간이 주어진다. 다만 이러한 특허권 보호가 감염병 대응 등 공중보건 대응을 어렵게 할 경우 강제실시권(compulsory licensing) 등을 통해 특허권을 무력화시킬 권한을 회원국들에 부여하고 있다. TRIPS 유연성(flexibilities) 규정을 통해 긴급상황 등의 경우 특허권자의 동의 없이 회원국 정부가 복제약을 생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는 이러한 강제실시권이 실제에서 발휘되기 어려우며, TRIPS 외에 양자 간 또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추가 특허보호 규정이 도입되고 있어 동 조항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06년과 2007년 태국 정부가 강제실시권을 발동해 에이즈 치료 복제약(generic)을 인도 등으로부터 수입하려고 했을 때 특허권을 보유한 제약회사는 신약 수출을 거부하는 등 반발했고, 미국 무역대표부가 태국을 우선감시국 명단에 포함시킨 것을 대표 사례로 거론하고 있다. 아울러 시험자료의 배타적 보호기간 인정, 강제실시권 제한, 병행수입 제한 등 TRIPS 유연성 규정의 효력을 제한하는 이른바 TRIPS-plus 규정이 개별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도입되고 있다.
고위급 패널은 TRIPS를 대체할 새로운 국제협정을 제시하기 위한 합의에는 실패했지만, 현행 TRIPS 규정만이라도 제대로 이행된다면 의약품 접근권 제고에 충분한 효과가 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권고했다. ▲회원국들은 강제실시권 발동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법령(legislation)을 만들고 시행해야 한다. ▲WTO 회원국들은 강제실시권 아래 생산되는 의약품의 신속하고 간편한 수출을 가능하게 하도록 제6항 결정(the paragraph 6 decision)을 개정하고 필요하면 TRIPS 협정도 개정해야 한다. 제6항 결정이란 의약품 생산능력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이 강제실시권을 발동한 경우 일정한 조건 아래 자국에서 생산이 어려운 의약품을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할 수 있도록 예외를 허용한 조항을 말한다. ▲각국 정부와 민간 기업들은 WTO 회원국들이 TRIPS 유연성 조항을 활용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며, 그런 사례는 WTO 무역정책검토(Trade Policy Review) 과정에서 검토되고 필요하면 분쟁(dispute)으로 제기돼야 한다. ▲TRIPS 조항보다 강화된 내용으로 양자 또는 지역 무역협정을 체결하려는 경우 그러한 조항이 공중보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평가가 우선 이뤄져야 한다.
의약품 개발 부담의 사회적 공유로 ‘접근성’ 제고 가능
항생제 내성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나, 지난 40여년 동안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운(novel class) 항생제는 하나에 불과한 실정이다. 새로운 항생제 개발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나, 개발된 항생제의 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사가 처방하는 경우에만 한정하는 등 제한적으로 사용돼야 하기 때문에 이윤을 내는 상품으로서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뎅기열 등 저소득 국가에 발병이 집중된 열대소외질환(NTDs; Neglected Tropical Diseases)이 전 세계 질병부담의 12%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나, 2000년부터 2011년 사이에 개발된 치료약의 4%만이 이들 질환에 관한 것이었다. 수익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민간 제약업체들로서는 저소득 국가들의 빈약한 구매력 등 시장성을 감안해 관련 투자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보고서는 제안하고 있는데 그 중심 개념은 연구개발 비용과 최종 생산품 가격과의 단절(delinkage)이다. 제약회사가 전적으로 져야 했던 의약품 개발의 부담을 사회적으로 공유함으로써 개발을 촉진하고 약가도 부담 가능한 수준으로 통제하고 접근성도 제고하자는 것이다. 연구개발 보조금(grants) 지원, 개발 시 일정 분량의 의약품 구매를 미리 약속하는 사전시장공약(advance market commitments), 공개 공동연구(open collaborative research) 등과 같이 개발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방안들에 따라 그간 여러 선언과 구상이 발표되고 재정 지원도 어느 정도 이뤄졌다. 2012년 열대소외질환에 대한 런던선언 후 빌게이츠재단과 자선단체 웰컴트러스트는 2014년 6억6천만달러의 연구개발자금을 지원했다. 2016년 1월 제약업계는 항생제 내성 대응 선언을 통해 항생제 개발 연구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을 실현할 핵심수단인 재정조달은 진전이 많지 않은 편이다. 특히 보고서는 제약업계나 빌게이츠재단과 같은 비영리재단의 투자만으로는 부족하며,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해결은 어렵다고 보고 있다. WHO에서 실효성 있는 연구개발을 위해 최소한 향후 5년간 매년 1억달러의 재정이 필요하다는 추계를 내놓았으니 민간 부문만으로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의약품 혁신 제고를 위해 다음과 같은 권고안을 제시했다. ▲각국 정부는 다른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보건의료기술 연구개발 재원조달을 위해 거래세(transaction taxes)나 다른 혁신적 재정메커니즘 모델을 검토하고 시행해야 한다. ▲UN 사무총장은 보건의료기술에 관한 조정, 재원조달 그리고 개발에 관한 글로벌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연구개발 비용과 최종 제품 가격을 단절시키는 내용을 담은 구속력 있는 연구개발협약(R&D Convention)을 포함해야 한다.
의약품 접근성 보장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개도국에 국한되지 않아
전통적인 의약품 개발은 제약업계가 투자하고 시장에 판매해 투자비용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번 보고서가 제시하는 방안은 의약품 개발과 이익의 공공화를 통해 혁신을 촉진하고 접근성을 제고하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고 볼 수 있다. 공적인 연구개발 지원의 확대는 논란이 적지만, 민간 기업이 기존에 개발한 의약품의 특허권을 제한하고자 하는 주장은 대규모 제약업체가 있는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의약품 접근성 보장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개발도상국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만성 C형 간염 치료에 획기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소포스부비어(sofosbuvir)의 경우 한 번 치료에 4만8천유로에서 9만6천유로가 든다. 네덜란드 정부는 최근 자국의 C형 간염 환자가 2만명인데, 환자들의 이러한 고가 의약품 이용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원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의약품 개발의 목적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높은 약가로 인해 필요한 의약품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다만 개발 비용의 공적인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특허권의 지나친 제한은 제약업체의 투자 의욕을 저하해 필요한 의약품이 개발되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으므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제약업계도 연구개발보다 특허권 보호에 더 많은 비용을 쓰고 있다는 지적도 있음을 감안해 약가 책정의 투명화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특허권 보호로 인한 문제 외에 의약품 공급망 개선, 의약품에 대한 건강보험 등 공적 지원 확대 등 의약품 접근성을 제약하는 다른 요인들에 대한 개선책도 같이 검토하고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