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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보호무역주의 강화되는 EU
이정은 주벨기에·유럽연합대사관 2등서기관 2017년 02월호



지금 EU에서는 1995년 이후 약 20년 만에 본격적인 무역구제제도 개편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EU의 무역구제제도는 1995년 WTO 체제의 출범과 함께 전면 개정된 이후 교역환경 변화에 따른 개정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개편안에 대한 합의가 쉽게 이뤄지지 못해 큰 변화 없이 지금까지 운영돼 왔다.


EU 집행위원회는 2006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무역구제제도의 전면 개정을 추진했다. 최초 개편 시도가 실패한 이후 EU 집행위원회는 생산자, 수입자, 수출자, EU 회원국 정부 등 가능한 모든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해 균형 잡힌 개편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결과물인 2013년 개편안 역시 EU 회원국 정부 간 합의 도출에 실패해 무역구제제도 개편 작업은 답보 상태에 머무르게 됐다.


제자리걸음만 거듭하던 개편 논의는 2016년 11월, EU 집행위원회가 덤핑 및 보조금 마진 산정 관련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진전을 보이게 됐다. 그간 EU는 중국을 비시장경제국가로 지정하고 높은 수준의 반덤핑·상계관세 조치를 부과해 국내 업계를 보호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11일 중국의 WTO 가입의정서상 비시장경제지위 관련 조항이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EU는 반덤핑·상계관세 제도 개편을 통해 중국에 대한 시장경제지위 부여 논란을 우회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무역구제제도 강화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해 오던 영국이 브렉시트 투표 이후 EU 내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되면서 영국·스웨덴·네덜란드·핀란드·덴마크 등 자유무역 지지그룹의 결집력도 약해졌다. 결국 2016년 12월 11일로 예정된 중국 비시장경제지위 조항 만료에 따른 제도 개편의 현실적인 시급성과 역내 업계의 무역구제제도 강화에 대한 오랜 요구, 과거에 비해 한층 강화된 보호무역주의 기조 등이 동력이 돼 지난해 12월 13일, EU 회원국들은 무역구제제도 개편 합의안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


‘최소부과원칙 적용 기준’ 및 ‘덤핑마진 계산방식 변경’이 골자
이번에 EU 회원국들이 합의한 무역구제제도 개편안은 아직 그 구체적 내용이 외부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합의안의 큰 틀은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개편안과 유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정 대상은 EU의 무역구제제도 중 「반덤핑기본법」 및 「상계관세법」이다. EU는 세이프가드조치를 거의 활용하고 있지 않아 이는 개정 대상에서 제외됐다. 개편안의 주요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투명성과 예측성 강화 차원에서 반덤핑 및 상계관세 잠정 조치 부과·미부과 2주 전 이해관계자에 사전 통보
· 제소를 고려하고 있는 EU 업계에 대한 수출자 정부의 보복 위협이 있는 경우 EU 집행위원회 직권 조사 개시 보장
· 무역구제조치의 효과 및 집행력 제고를 위해 우회 덤핑, 구조적 원자재 시장 왜곡, 정부의 보조금 지급 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될 경우 최소부과원칙(Lesser Duty Rule) 적용 제한
· 조사에 대한 중소기업들의 부담을 감안해 질의서 간소화, 답변 시한 연장, 관세 환급 절차 간소화
· 종료재심 결과 조치가 종료되는 경우 종료재심 기간 동안 납부된 관세 환급
· WTO 회원국에 대해서는 비시장경제국가 리스트에서 삭제하는 대신 조사대상국에 심각한 시장 왜곡이 존재하는 경우 덤핑마진 계산 시 국내 시장가격 대신 제3국 시장가격 적용


이번 회원국들의 합의에서 주목할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최소부과원칙’ 적용 기준이고, 두 번째는 ‘덤핑마진 계산방식 변경’이다. 이 두 가지 쟁점에 대한 EU 회원국의 합의 결과는 최근 EU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경향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번 개편안이 갖는 무역구제제도 강화라는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소부과원칙은 EU 반덤핑·상계관세 규정만의 독특한 조항으로, 실제 반덤핑·보조금 마진보다 낮은 수준의 조치로도 역내 산업 피해를 제거하기 적절한 경우 실제 마진보다 낮은 수준으로 반덤핑·상계관세 조치를 부과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WTO보다 더욱 진전된 자유무역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소위 ‘WTO 플러스 규정’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EU의 교역대상국 중 국내 생산자 보호를 위해 원자재 교역에 개입하는 경우(수출세 부과, 이중가격체제 운영 등으로 국내 시장가격 왜곡)가 늘어나면서 역내 생산자 보호를 위해 일정 기준하에 최소부과원칙 적용을 제한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기준에 대한 회원국 간 입장 차가 컸다. 영국 등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회원국들은 왜곡된 원자재가격이 조사대상 품목의 전체 생산비용 중 40% 이상인 경우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타 회원국들은 더 높은 수준의 역내 산업 보호를 위해 20~25%를 주장했다. 이에 더해 일부 회원국은 에너지가격 왜곡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해 입장은 계속 평행선을 달렸다.
이번에 도출된 합의안은 원자재가격 왜곡뿐만 아니라 에너지가격 왜곡까지 고려한다는 점과 최소부과원칙 제한 기준을 27%로 잡았다는 점에서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보다 강화됐다고 할 수 있다. 회원국들은 왜곡된 에너지가격과 원자재가격을 합해 전체 생산비용의 27%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 또는 에너지가격과 원자재가격이 각각 전체 생산비용의 7%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에 최소부과원칙 적용을 제한하는 데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최소부과원칙 제한 시 입증 책임을 EU 집행위원회 조사 당국에 부과, EU 집행위원회 직권 조사 개시 등 EU의 무역구제제도 강화를 위한 여타 개정 제안 사항들에 대해서도 회원국 간 합의가 이뤄졌다.


中 시장경제지위 부여 문제, 비시장경제국가 목록은 삭제하고 예외조항 마련으로 해결
편 덤핑마진 계산방식 개정 제안의 배경은 중국에 대한 시장경제지위 부여 문제다. EU는 그간 「반덤핑기본법」에 중국을 포함한 비시장경제국가를 명시하고, 비시장경제국에 대해서는 덤핑마진 산정 시 국내 가격 대신 제3국 유사시장 가격을 대체 적용해 높은 수준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해 왔다. 그러나 중국을 비시장경제로 간주할 수 있도록 허용한 중국 WTO 가입의정서 관련 조항이 중국의 WTO 가입 15년 후, 즉 2016년 12월 11일 만료하게 돼 있었기 때문에 향후 중국에 대한 반덤핑·보조금 조사 시 종전과 같은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지 여부가 논란이 됐다.


중국이 EU에 시장경제지위 부여를 지속 요청하는 가운데, EU 회원국 간에는 영국·네덜란드·스웨덴 등 중국에 대한 시장경제지위 부여에 찬성하는 쪽과 독일·프랑스 등 국내 일자리 및 유럽 철강산업 보호를 위해 반대하는 쪽의 입장이 대립했다. 또한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시장경제지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EU 내 업계의 요구도 매우 거셌다.


이러한 상황에서 EU 집행위원회가 선택한 방안은 EU 「반덤핑기본법」을 개정해 중국을 포함한 WTO 회원국에 대해 비시장경제국가 목록을 삭제하고 모든 WTO 회원국들에 대해서는 동일한 반덤핑 조사방식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다만 ‘경제 분야에 대한 정부의 개입으로 인해 시장에 중대한 왜곡이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 별도의 덤핑마진 산정 방식을 적용한다’는 조항을 추가 도입해 일정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 중국 등 비시장경제국가에 대해 종전과 같이 고율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뒀다.


이러한 시도는 중국에 대한 시장경제지위 부여를 반대하는 EU 내 강경여론, WTO 회원국으로서의 규범 준수, 중국과의 통상마찰에 대한 우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안은 중국의 즉각적인 반발을 사기는 했지만 난관이 예상됐던 회원국 간 합의 도출에는 성공했다.


앞으로 최종 법안 채택을 위해 EU 집행위원회, 이사회, 유럽 의회가 참여하는 삼각협의(trilogue) 및 협의안에 대한 투표 등의 절차가 남아 있다. 그 과정에서 세부 기술적인 내용이 다소 수정은 될 수 있겠으나 개편의 가장 큰 고비가 회원국 간 합의였던 만큼 합의안의 핵심 내용은 대체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EU 집행위원회 통상총국은 이번 개편안 합의에 대해 “EU의 무역구제제도를 오늘날 경제 현실에 적합하도록 조정하기 위한 커다란 진전”이라고 표현하면서 개편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EU는 개편 작업을 최대한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2016년 12월 11일 가입의정서상 비시장경제조항 종료 직후 EU의 반덤핑 및 상계관세 규정에 대해 WTO에 제소했고, 이에 대해 EU 집행위원회는 실제 패널 설치 전까지 무역구제제도 개정작업이 완료될 것이므로 문제없다고 언급했다. 역내 산업 보호를 외치는 EU 업계의 요구도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EU의 무역구제제도 개편이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논의하기는 아직 이르다. EU의 무역구제조치 강화를 시장 왜곡과 불법적인 보조금 지급 등 공정 교역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로서는 EU 시장 내 공정경쟁 회복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사실 2003년 이후 우리나라 제품에 대한 반덤핑 조사는 총 10건, 상계관세 조사는 1999년 이후 2건으로 우리는 EU 무역구제조치의 주요 대상국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무역구제제도 개편의 이면에 국내 산업 보호를 외치는 EU 역내 업계와 회원국의 목소리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EU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는 특정 국가를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한·EU FTA 발효 이후 최초로 2015년 한국산 제품(방향성 전기강판)에 대해 반덤핑 조사가 개시된 데 이어 2016년에도 2건(감열지, 테레프탈산)의 신규 반덤핑 조사가 개시됐다. 지난 10년간의 한국산 제품에 대한 전체 조사 개시 건수와 비교해 볼 때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우리가 EU의 무역구제제도 강화 동향과 그 영향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EU와의 교역은 한·EU FTA 발효 이후 크게 늘었고, EU는 2015년 기준 우리의 제3위 교역 대상국으로 대EU 교역환경 변화에 대한 지속적 모니터링은 중요하다. 주벨기에·유럽연합대사관은 앞으로도 우리의 대EU 교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EU의 무역구제제도 개편 동향을 주시하면서 적시에 국내 업계를 포함한 관계자들에게 필요 정보를 전달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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