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탄탈룸, 텅스텐, 금 등의 분쟁광물은 채굴 과정에서의 노동착취와 학대, 채굴 수입이 아프리카 무장단체들의 자금으로 유입돼 벌어지는 분쟁 악화 등으로 문제가 돼왔다. 이에 지난 1월 24일 유럽의회 국제통상위원회는 EU 차원의 통일된 분쟁광물 수입규제시스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채택해 분쟁광물에 얽힌 폭력과 인권유린의 사슬을 끊으려는 노력에 나섰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세계적인 영화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출연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의 다이아몬드 채굴·유통과정의 민낯을 드러낸 이 영화를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과 인권유린의 참상 위에서 얻어진 피 묻은 다이아몬드만큼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어려있는 것이 또 있다. 소위 분쟁광물(conflict minerals) 또는 3T&G라고도 불리는 4대 광물, 즉 주석(Tin), 탄탈룸(Tantalum), 텅스텐(Tungsten), 금(Gold)이다. 이들은 자동차, 휴대전화, 컴퓨터, 항공우주, 반도체 등 IT·첨단산업부터 조명, 포장재, 의료기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핵심 원료로 사용되고 있는데, 분쟁지역 또는 고위험지역에서 주로 조달되고 있어 ‘분쟁광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분쟁광물은 특히 아프리카 지역 무장단체들의 자금으로 유입돼 분쟁을 악화시키고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악순환으로 인해 문제가 돼왔다.
지난 1월 24일 유럽의회 국제통상위원회는 유럽연합(EU) 차원의 통일된 분쟁광물 수입규제시스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법안(regulation)을 재적 41명 중 찬성 39명, 기권 2명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채택했다. 분쟁광물에 얽힌 폭력과 인권유린의 사슬을 끊으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EU도 적극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안은 EU를 대표하는 3개의 기관인 EU 집행위원회(이하 집행위), 이사회, 유럽의회가 수년에 걸친 치열한 논의 끝에 합의한 결과물로서 이제 유럽의회 전체회의에서의 표결을 기다리고 있다.
풍부한 천연자원, 축복 아니라 재앙…아프리카 분쟁의 약 30% 차지 분쟁광물의 역사는 199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시에라리온, 앙골라 등지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가 팔려나가면서 반군들의 자금으로 유입되고 무력분쟁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던 때로, 다이아몬드에 이어 열대목재, 광물 등 희귀 원자재의 유통과정으로 국제사회의 관심이 확산됐고 분쟁지역 무장단체들의 돈줄로 악용되고 있는 4개의 분쟁광물도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아프리카는 전 세계 광물자원 매장량의 30%를 보유하고 있고, GDP의 24%를 광물채굴에서 얻고 있다. 특히 분쟁광물 이슈의 주요 배경지인 콩고민주공화국(이하 DR콩고)을 살펴보면 탄탈룸을 얻을 수 있는 콜탄(Coltan,Columbite-tantalite)의 경우 전 세계 매장량의 80%, 코발트(Cobalt) 49%, 다이아몬드 30%, 금 25% 등 무려 24조달러어치의 광물이 매장돼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풍부한 천연자원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이 됐다고 해야 할까? 독일 하이델베르크국제분쟁연구소(HIIK)가 2017년 2월 발표한 보고서(Conflict Barometer 2016)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분쟁 94건 중 약 30%에 달하는 27건이 자원 관련 분쟁이다. 특히 분쟁광물은 DR콩고 동부지역의 불안정을 지속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1998년 8월부터 2007년 4월까지 10년간 540만명 이상이 무력분쟁으로 죽어나갈 때 바로 분쟁광물이 무장단체들의 돈줄 역할을 한 것이다. 무장단체들이 벌어들이는 총수입의 4분의 3이 광물채굴에서 나온 것으로, 국가 전체 광물채굴 수입의 35%가 무장단체들의 손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한다. 채굴 과정에서의 노동착취와 학대, 교역으로 얻은 자금을 바탕으로 내전 지속, 내전 중 벌어지는 성폭력, 고문, 소년병 징집 등에 이르기까지 폭력과 인권유린이 반복되고 있다.
OECD·UN·美, 자원과 무력분쟁 간 악순환 끊기 위한 노력 전개
채굴된 광물의 무역이 지역개발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무력분쟁을 악화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을 국제사회가 인식하면서 광물 무역과 무력분쟁 간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2010년 OECD가 채택한 ‘책임 있는 광물 공급망 실사 지침(Due Diligence Guidance for Responsible Supply Chains of Minerals)’은 분쟁광물을 공급·사용하는 기업이 인권을 존중하고, 분쟁 및 고위험 지역이 원산지인 광물의 추출부터 시작하는 공급망의 실제 환경을 확인하고 잠재적 위험을 관리할 수 있게 함으로써 광물조달 과정에서 분쟁이나 인권유린에 연루되지 않도록 돕고 있다. 또한 UN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 1952호(2010년)를 통해 회원국들이 DR콩고에서 분쟁광물을 수입하는 업자들에 대해 공급망 관리 실사를 수행토록 촉구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미국은 2010년 도드 프랭크(Dodd-Frank) 재정개혁법 및 2012년 증권거래위원회(SEC) 시행령을 통해 미국 기업들이 DR콩고 및 인근 국가에서 생산된 광물이 분쟁과 무관(conflict-free)하다는 점을 공시하도록 의무화했다. DR콩고와 르완다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도 자체적인 개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노력 덕분에 의미 있는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도드 프랭크 재정개혁법을 도입해 분쟁광물을 규제한 이후 분쟁과 무관함이 증명되지 않은 광물들의 거래가격이 낮아지면서 무장단체들의 수입이 65% 감소됐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한 2010년만 해도 DR콩고 동부지역의 광산 대부분이 무장단체 손아귀에 있었으나 2016년에는 주석, 탄탈룸, 텅스텐 광산의 79%가 무장단체와 무관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EU의 규제법안이 시행된다면 국제사회의 분쟁광물 규제는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2014년 3월 EU 집행위가 규제법안 초안과 규제종합계획(Joint Communication)을 처음 발표한 이후 EU 기관 간 합의된 규제법안이 유럽의회 1차 관문을 통과하기까지 근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미국의 분쟁광물규제법이 2010년 도입됐음을 감안하면 EU의 대응은 다소 느리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EU 내에서는 집행위와 유럽의회가 팽팽히 맞서면서 분쟁광물 규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이뤄져왔다.
당초 2014년 EU 집행위 초안은 분쟁광물 수입규제와 관련해 자발성과 인센티브를 특징으로 한 자기인증제(EU System of Self-certification) 도입을 골자로 했다. 말하자면 제련업체(smelters)와 정제업체(refiners) 등 수입업체는 원할 경우 2010년 OECD 지침에 따라 원료 공급망을 모니터링해 분쟁과 무관하다는 점을 공시할 수 있다. 집행위는 이러한 자기인증업체에 대해 공동조달 등에서 인센티브를 부여하고자 했다. 집행위는 공급망 관리가 의무성을 띠면 위험 기피 성향의 기업들의 경우 아예 분쟁지역 및 고위험 국가와의 광물교역을 중단하는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봤다. 전 세계 탄탈룸의 80%가 DR콩고에 매장돼있는데, 만약 광물교역이 중단돼버리면 DR콩고와 세계경제 양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도 내세웠다. 또한 의무화하면 중소기업들에 과도한 행정적·금전적 부담을 안겨줄 수 있다는 우려도 표명했다.
이는 의무인증제 도입을 주장하는 유럽의회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특히 유럽의회 내 사회민주당(S&D), 녹색당(Greens) 등 진보세력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제품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폭력과 인권유린을 조장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의무인증제로 규제해야 하며, 채굴·제련·정제과정에 해당하는 업체(upstream)뿐만 아니라 분쟁광물을 구매·가공·사용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업체(downstream)에 대해서도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5년 5월 유럽의회는 이러한 목소리를 일부 반영해 채굴·제련·정제업체 대상 의무인증제를 도입하는 내용을 담은 강화된 내용의 수정안을 채택했다.
3년간의 논쟁 끝에 EU도 규제법안 마련, 2021년 1월 발효 집행위와 유럽의회는 각자의 규제법안을 가지고 1년 반 이상 줄다리기를 이어오던 와중에 2016년 2월 집행위, 이사회, 유럽의회 3개 기관이 참여하는 3자 대화 개시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3자 대화는 4개월여의 논의 끝에 2016년 6월 핵심요소에 대한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고 11월 최종 규제법안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뒀다. 최종 규제법안이 올해 1월 유럽의회 국제통상위원회를 통과한 바로 그 법안이다. 집행위와 유럽의회가 장기간 대치를 끝내고 합의를 이룬 배경에는 집행위, 회원국, 관련 업계 등을 대상으로 한 유럽의회 의원들의 전방위 설득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 최종 규제법안의 세부규정이 대외에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EU 측 발표와 언론에 따르면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분쟁지역 및 고위험 국가를 원산지로 하는 주석, 텅스텐, 탄탈룸, 금 등 4대 분쟁광물이 대상(부속서 형식으로 목록 제시 예정)
· 제련·정제업체를 비롯한 주요 수입업체(upstream importers)에 대해 공급원 실사 의무(supply chain due diligence obligations)를 부과하고, 수입업체들은 OECD 지침에 따라 의무를 이행
· 분쟁광물을 구매·가공·사용해 판매하는 업체(downstream)는 인증 의무는 없으나, 자발적 인증을 장려
· 개인 치과나 귀금속판매점 같은 극소량 수입업체는 의무 면제
· 재활용 금속이나 수입업체가 보유 중인 재고, 부산물에 대해서도 의무 면제
· 500명 이상 직원을 고용하는 수입업체에 대해 원료조달 관행을 보고할 것을 장려
· 집행위는 업계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비구속적 성격의 안내책자(non-binding handbook), 분쟁지역 및 고위험지역 목록(indicative and non-exhaustive list) 등을 제공하며, 회원국들의 이행 지원을 위한 보고도구 및 기준을 개발
· 이 법안은 2021년 1월 1일부터 발효되며, 발효 이전 과도기 동안 회원국 유관기관, 이해관계자 등은 의무 이행을 위한 조치를 준비해야 함.
국제사회는 향후 EU의 분쟁광물 규제법안 도입을 통해 미국 도드 프랭크 재정개혁법 등 기존 규정이 담지 못한 영역까지 포괄함으로써 무력분쟁과 인권유린의 악순환을 점차 끊고 분쟁광물의 합법적인 교역을 장려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분쟁광물이 워낙 다양한 산업에서 사용되고 있어 유럽 현지에 진출했거나 유럽에 상품을 수출하고 있는 우리 업체들로서는 새로운 규제법안의 도입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분쟁광물을 규제하려는 국제사회의 추세에 발맞춰 기업들도 유럽 진출전략 및 기업의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대응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우리 정부는 규제정보 및 컨설팅서비스 제공, 업계간담회 등을 통해 지원하고 있으며, 향후 이를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인권을 비롯한 기본적인 가치를 수호하고 책임감 있는 교역체제를 만들어가려는 EU와 국제사회의 노력이 지속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