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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미국의 리더십 사라진 WTO 다자협상
박정욱 주제네바대표부 공사참사관 2018년 02월호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 제11차 각료회의(MC11; 11th Ministerial Conference)가 지난 12월 10일에서 13일까지 4일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됐다. WTO 각료회의는 1995년 WTO 설립협정에 따라 2년마다 개최되며, 그간 진행된 협상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계획을 마련하는 최고위급 회의다. 향후 세계통상질서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각료회의는 GATT 출범 70주년을 맞는 해에 주요 케언즈 그룹(Cairns Group; 농산물 수출국 중 수출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 나라들의 모임) 국가들이 소재한 남미에서 개최돼 나름 시간적·공간적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개막식에는 사상 최초로 주최국인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비롯해 4개국 정상이 참석해 남미 10개국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상선언문’을 발표하고 다자주의 유지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다자협상에서 ‘방관자’ 입장 보인 미국
러나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미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과 보호무역주의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각료회의가 준비됐고, 그러한 분위기는 준비과정과 최종 결과에도 반영됐다. 각료선언문 도출에 실패해 의장발표문으로 대체됐고, 각료결정 내용 역시 원론적인 수준의 수산보조금 협상 작업계획과 매 각료회의 시 해왔던 전자상거래, 지식재산권 협정 및 소규모 경제에 대한 일반적 결정 등 최소한에 그쳤다.

MC11의 준비과정에서 우선 주목할 부분은 절차적인 측면인데 이는 2015년 MC10과 관련이 있다. MC10은 소위 ‘나이로비 패키지’로 불리는 성과물을 도출하면서 나름 성공적인 회의로 평가됐다. 그러나 과정 측면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제네바에서 충분한 실무적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이슈에 대해 각료회의 현장에서 일부 주요국 중심의 비공개 논의를 통해 합의가 모색돼 많은 국가들로부터 투명성 문제가 제기됐던 것이다. 이에 MC11부터는 제네바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친 이슈만을 각료회의에 상정하고 투명성을 보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나타났다. 2016년 말 미국 대선결과 미국 우선주의와 양자주의 통상정책을 표방하는 공화당의 트럼프가 승리했다. 이후 미국은 다자체제인 WTO 내 논의에 유보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이슈 논의에서 미국은 입장표명 대신 방관자적 자세를 보였으며, 더 나아가 MC11에서 협상을 통한 어떠한 결과 도출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따라서 협상 맨데이트(mandate)가 있지만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대립구조를 보인 농업 국내보조 및 식량안보 목적의 공공비축(PSH; Public Stock Holding for food security purposes), 서비스 국내규제, 전자상거래, 개발 이슈뿐만 아니라 협상 맨데이트가 없다고 일부 개도국이 논의 자체를 강력히 반대한 투자원활화, MSMEs(Micro, Small and Medium Enterprises·소상공인 및 중소기업)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은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며 개도국 입장에 가까운 것으로 비쳐 합의모색 가능성은 찾기 어려운 양상이 됐다.

이러한 상황은 MC11 각료선언 문안협의를 하면서 정점에 이르게 된다. 각료선언은 지난 2년간 WTO 협상 및 글로벌 통상환경에 대한 회원국 전체의 합의된 인식을 담는 가장 핵심적인 결과물 중의 하나다. 2017년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협의는 불과 2주 만에 미국의 협의불가 선언으로 중단됐다. 미국이 WTO체제를 다자통상체제(multilateral trading system)로 표현하는 데 반대했고, DDA(Doha Development Agenda·도하개발어젠다) 관련 이슈를 계속 다루고자 하는 개도국과의 입장대립 때문이었다. 후자는 미국의 기존 입장으로 여타 선진국들과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WTO 체제의 근간이 되는 사항으로 그간 모든 국가가 인정했던 것이었으나, 이제 와서 다자체제를 주도했던 미국이 반대하는 심각한 상황이 됐던 것이다.


기존 입장대립만 확인, 각료선언과 실질적 합의에 실패
어려운 상황임에도 주최국 아르헨티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투명성을 확보하면서도 각료회의 성과도출을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에서, 실제 DDA 협상이 이뤄질 때와 같이 주요 이슈별로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를 지정하고 모든 회원국 각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을 제공했다. 동시에 각료선언도 재차 추진했다. 각료선언은 최대한 단순하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구로 형식적인 수준에서라도 합의하려고 했으나 결국 기존의 입장대립만 확인하고 실패했다. 그리고 미국이 밝힌 바와 같이 어떠한 이슈에 대한 논의에서도 실질적인 합의를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합의한 각료결정 내용은, 1998년 이래로 매 각료회의에서 해왔던 전자상거래에 대한 무관세 조치 2년 연장과 이에 대한 개도국들의 반대를 반영하기 위해 항상 패키지로 이뤄져왔던 지식재산권 협정 비위반 제소 유예연장이다. 그리고 소규모 경제에 대한 일상적인 결정이다.

한 가지 새롭다면 수산보조금 협상에 관한 것인데, 지금까지 해왔던 협상을 차기 각료회의를 시한으로 계속한다는 원론적인 작업계획이다. IUU(Illegal, Unreported and Unregulated·불법, 비보고및 비규제) 어업, 과잉어획 금지 등 협상 범위와 수준에 관한 실질적인 내용은 전혀 담지 못했다. MC9와 MC10에서도 크지는 않지만 나름의 새로운 결정들이 이뤄졌으나, 이번에는 그나마도 없는 것이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 MC11까지로 명확한 시한이 설정돼 있었던 PSH에 관한 영구적 해법에 대해서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인도는 시종일관 PSH에 대한 성과 없이는 다른 어떠한 합의도 없다고 주장했고, 이를 빌미로 미국은 사실상 협상 전체를 방관하며 리더십을 보이지 않은 측면도 있어, 서로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변명의 구실을 주고받은 것이다.


WTO 본래 역할의 약화 불가피…향후 복수국 간, 양자적 접근 강화될 전망
이번 각료회의에서 나타난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는 미국의 입장과 역할의 변화다. 1947년 GATT와 1995년 WTO 출범은 사실상 모두 미국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다. WTO 다자협상은 모든 회원국들이 만족할 수는 없지만 수용 가능한 합의점을 찾는 과정이다. 이때 미국은 늘 가장 중요하고 실질적인 역할을 해왔다. 공식 및 비공식 협의를 통해 다양한 주장과 이견에 대해 직간접적인 설득과 조정(때로는 협박)으로 만장일치의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다자협상체제 내에서의 미국의 리더십이다. 미국이 지닌 현실적인 정치·경제·외교·안보적 영향력을 토대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MC11에서 보여준 미국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미국은 협상에 참여하는 것을 사실상 거부하며 오히려 논의의 진전에 제동을 거는 역할만 했다. 그리고 현 분쟁해결 절차, 통보의무, 개도국 우대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WTO 자체의 개편 필요성을 주장했다.

둘째는 DDA의 운명이다. 지난 MC10 각료선언에서는 DDA의 지속 여부에 합의하지 못하고, 반대하는 선진국과 지지하는 개도국의 서로 다른 입장을 명기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번 MC11에서는 DDA와 관련한 어떠한 언급도 합의문서에 없다. 각료선언문 합의실패가 이를 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DDA 협상이 2008년 사실상 타결에 실패했지만 2013년 MC9와 2015년 MC10에서는 DDA 이슈의 일부 수확이 이뤄져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방식의 협상과 논의가 계속될 수 있다는 여지가 있었다. 이제는 그러한 접근방법도 중단되고 사실상 완전한 종결에 더 가까워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만 DDA의 중단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DDA 지지국가들은 지금과 같은 논의를 계속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상황이 더욱 나빠진 것임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셋째, 다자협상에 대한 회원국 입장이다. 그간의 다자협상이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대립구조였다면 이번 각료회의를 통해 확인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우선 다자협상 자체에 부정적인 미국과 이를 지지하는 나머지 국가들로 구분된다. 그리고 다자협상을 지지하는 국가들 중 선진국은 DDA가 사실상 종료돼 새로운 이슈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협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개도국 중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과 같이 DDA 논의가 완료되지 않아 협상 맨데이트가 없는 새 이슈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국가들과 중국, 브라질 등 DDA 이슈와 함께 새 이슈에 대해서도 논의가 가능하다는 국가들로 나뉘게 됐다. 미국의 리더십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러한 복잡한 이해관계를 감안하면 향후 다자협상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각료회의 기간 중 전자상거래, 투자원활화, MSMEs 등 여러 이슈에서 일부 관심국들 간 공동성명서가 발표됐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MC11의 성공을 축하하며 유사입장국 간 분야별 접근과 철강과잉공급에 대해 EU, 일본과 공동대응 입장을 밝혔다. 인도는 2, 3월 중 농업이슈를 논의할 소규모 비공식 장관회의 계획을 흘리고 있다. 만장일치 원칙의 현 WTO 체제하에서 당장 일부 국가의 의견을 반영한 WTO 개편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자협상 및 분쟁해결이라는 WTO 본래 역할의 약화는 불가피하게 됐고, 대신 복수국 간 또는 양자적 접근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서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종합적 통상전략 수립이 절실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변화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이면서도, 투자원활화 이슈 등을 주도하며 개도국 대표로서 다자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리도 챙기고 있는 중국의 동향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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