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유로존 재정위기의 여파가 잦아들고 최근 EU경제가 견고한 회복세를 보이면서 EU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EU의 통합 강화를 위한 노력이 다시금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EU 미래백서, ‘다양한 속도의 유럽’ 제시 먼저 2017년 3월 EU 집행위는 「EU 미래에 관한 백서(White Paper on the Future of Europe)」(이하 EU 미래백서)를 발표했다. 백서의 핵심은 모든 회원국들이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구체적인 정책의 수용과 시행에는 회원국별 시차를 허용하는 ‘다양한 속도의 유럽(Multi-speed Europe)’ 방식을 제시한 데 있다. 27개 회원국이 각기 상이한 정치·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는 만큼 무리하게 공동정책을 추진하기보다 유사한 회원국들끼리 묶어 정책추진의 속도와 깊이를 적절하게 조정함으로써 실행가능성과 효율성을 제고하자는 것이다. 유럽통합에 관해 EU 미래백서가 제시하는 5가지 시나리오는 ①현 체제 유지(Carrying on), ②단일시장체제에 한정(Nothing but the Single Market), ③회원국 간 차별화(Those who want more, do more), ④효율성이 높은 분야에 집중(Doing less, more efficiency), ⑤EU의 권한 강화(Doing much more together)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 투자에 통합의 중점을 두고 유로지역 내 협력을 강화하자는 것이고, 두 번째 시나리오는 단일시장만을 통합의 영역으로 삼고 나머지 분야는 개별 회원국이 전담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통합 추진 분야 및 참가 여부 결정 등을 회원국 자율에 맡기자는 것이며, 네 번째 시나리오는 빠른 통합이 가능한 영역으로 범위를 제한하되 해당 분야의 통합은 가속화하는 방식이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EU가 지금보다 많은 분야에서 회원국과 권한을 공유하거나 독자적인 권한을 갖는 방식이다. 이러한 5가지 시나리오는 EU 통합의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함으로써 향후의 통합논의를 시작할 기반을 제공하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각 시나리오별 명확한 구분이 어렵고 아직은 각 시나리오에 수반되는 구체적인 전략이 제시되지 않아 회원국별 이해관계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한편 EU 집행위는 2019년 5월 루마니아 시비우(Sibiu)에서 EU 특별정상회의를 개최해 미래 유럽통합에 관한 첫 번째 결정(first decisions)을 내리는 것을 목표로 활발한 논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EU 미래백서에 비해 경제·재정 분야의 통합계획은 보다 구체적이다. EU 통합 강화라는 거시적 맥락과 그간 추진돼온 경제·재정 분야 정책들에 기초해 EU 집행위는 2017년 12월, 「경제통화동맹 심화를 위한 로드맵(Roadmap for deepening the Economic and Monetary Union)」과 이에 기초한 4가지 주요 추진과제를 발표했다. 로드맵은 통합 추진 분야를 금융동맹(Financial Union), 경제재정동맹(Economic and Fiscal Union), 민주적 책임성 확보 및 효과적 거버넌스(Democratic Accountability and Effective Governance)로 나누고 분야별 세부과제를 2018년 추진조치, 2019년 중반까지 추진조치, 2025년까지 추진조치 등 시기별로 나눠 제시하고 있다.
경제·재정 분야 통합 로드맵 발표…2018년 중 은행동맹 완성 먼저 2018년 중 추진할 조치를 보면, 금융동맹 분야에서 제시된 첫 번째 과제는 은행동맹(BU; Banking Union)의 완성이다. 최근의 연이은 경제위기 이후 EU 집행위는 금융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위기예방의 첩경이라고 판단하고, 지난 2012년 단일은행감독기구(SSM; Single Supervisory Mechanism), 단일은행정리기구(SRM; Single Resolution Mechanism), 단일예금보험기구(EDIS; European Deposit Insurance Scheme) 설치를 3개의 축으로 하는 은행동맹을 주창한 바 있다. 단일은행감독기구와 단일은행정리기구는 각각 2014년과 2016년에 설치·운영되고 있으며 단일예금보험기구 설치 문제는 EU 이사회와 EU 의회에서 논의 중에 있다. 단일정리기금(SRF; Single Resolution Fund)은 원활한 은행정리 지원을 위한 것으로 유로존 은행들의 기여금을 통해 2024년까지 약 550억유로 규모로 조성될 예정이다. 두 번째 과제는 EU 공동의 국채담보부증권(ESBS; European Sovereign Bond-backed Securities) 발행에 관한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국채담보부증권은 국채를 기초자산으로 상업 금융기관이 발행하는 것으로 투자위험을 역내 투자자들에게 널리 분산시켜 국경 간 투자위험 분산을 보다 용이하게 할 것이다. 경제재정동맹 분야에서는 구조개혁지원프로그램 강화 제안서 채택, 유럽구조투자기금(ESIF; European Structural and Investment Funds)의 관리·평가 및 재정통제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 채택, 2020년 이후의 다년도지출계획(MFF; Multi-annual Financial Framework)에 관한 EU 집행위 제안서 제출 등이 추진과제로 제시됐다. 이러한 과제를 통해 EU는 신상품 개발, 노동시장 개혁, 조세개혁, 국내 자본시장 발전, 기업환경 개선, 인적자본 투자 등 국내외 경기회복에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각 회원국들의 개혁조치를 집중 지원할 계획이다. 민주적 책임성 확보 및 효과적 거버넌스를 위한 과제로는 유럽통화기금(EMF; European Monetary Fund) 설치 제안서, 유럽경제·재무장관직(EMEF; European Minister of Economy and Finance) 설치 제안서 및 유로존 외부대표에 관한 제안서, 재정협약(FC; Fiscal Compact)을 EU법 내에 수용하는 내용의 제안서 등 EU 집행위에서 이전에 제출한 제안서에 관한 논의가 추진과제로 제시됐다. 2019년 중반까지 추진할 조치는 다음과 같다. 금융동맹 분야에서는 은행동맹 및 자본시장동맹(CMU; Capital Market Union) 완성을 위한 과제들이 제시됐는데, 단일예금보험기구 설치, 단일정리기금에 대한 방어벽(backstop) 운영을 위한 회원국 간 합의, 자본시장동맹 관련 잔여 입법과제 완료 등이다. 경제재정동맹 분야에서는 현 다년도지출계획(2014~2020년) 만료시한인 2020년 이후 추진할 과제인 구조개혁 지원, 비유로존 회원국의 수렴 촉진, 안정화 기능에 관한 EU 집행위 제안서 내용을 채택하는 것이 과제로 제시됐다. 민주적 책임성 확보 및 효과적 거버넌스 관련 과제로는 유럽통화기금 설치에 관한 입법안 승인, 유럽경제·재무장관직 설치에 관한 회원국 간 공감대 형성, 유로존 외부대표에 관한 입법안 및 재정협약을 EU법 내에 수용하는 것에 관한 입법안 승인이 추진과제로 제시됐다. 2019년 후반부터 2025년까지 추진할 조치를 살펴보면, 금융동맹 분야에서는 자본시장동맹 추진과제 지속 이행, EU 공동의 국채담보부증권(European Safe Asset) 발행 추진 등이 주요 과제로 제시됐으며, 경제재정동맹 분야에서는 새로운 다년도지출계획 수립완료, 안정화기능 작동완료, 안정과성장협약(SGP; Stability and Growth Pact) 규정의 단순화 등이 제시됐다. 한편 민주적 책임성 확보 및 효과적 거버넌스 분야에서는 유럽경제·재무장관직 신설과 유럽통화기금 운영, 유로존 재무부(Euro Area Treasury) 설치 등이 제시됐다. 「경제통화동맹 심화를 위한 로드맵」과 함께 발표된 4가지 주요 추진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과제는 유럽통화기금 설립이다. 유럽통화기금은 기존 유로존 구제금융기구인 유럽안정화기구(ESM; European Stability Mechanism)를 계승해 확대·강화한 것으로 질서 있는 부실은행 처리를 위한 최종대부자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며 단일정리기금 부족 시 이에 대한 공동방어벽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EU 집행위는 2019년 중반까지 EU 의회와 이사회의 설립안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신설될 유럽통화기금은 기존 유럽안정화기구와 달리 긴급상황에 대응한 보다 신속한 의사결정체계(이사진의 85% 찬성만으로 구제금융 지원결정 가능)를 수립하고 재정지원프로그램 관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장기적으로는 안정화 기능 지원을 위해 새로운 금융상품을 개발하는 역할을 할 예정이다. 총기금규모는 기존 유럽안정화기구 기금을 그대로 승계해 5천억유로이며, 구제금융에 투입된 재원은 추후 은행동맹 참가국의 은행권이 납부하도록 함으로써 재정중립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EU법체계 내에 재정협약 수용, 유럽경제·재무장관직 신설 등이 과제 두 번째 과제는 유로존 재정위기 이후 역내 재정규율 강화를 위해 25개 회원국(영국, 체코, 크로아티아 제외)이 2012년 서명한 재정협약(정식명칭은 The Treaty on Stability, Coordination and Governance)의 주요 내용을 EU법체계 내에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정해진 절차로 재정협약 제16조는 발효 후 5년이 경과한 시점(2018년 1월)에 협약의 주요 내용을 EU법 내에 수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EU 집행위는 균형재정에 관한 규정, 과도한 재정적자 시정절차 등을 주요 대상으로 예시하고 있으며, 향후 EU 이사회 지침(directive) 형태로 수용할 계획이다. 재정협약이 EU법체계 내에 수용되면 민주적 책임성과 합법성이 증진되고 법체계가 단순화되며 전반적인 EU경제 거버넌스도 개선될 전망이다. 세 번째 과제는 유로존과 EU 전체에 필수불가결한 예산 기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EU 집행위는 제안서를 통해 각 회원국 구조개혁 지원을 위한 개혁실행 수단 및 기술 지원, 비유로존 회원국의 유로존 가입 지원, 유럽안정화기구·유럽통화기금을 통한 재정방어벽 제공, 대규모의 비대칭적 경제충격 발생 시 안정화 기능 등을 필수불가결한 예산 기능으로 예시하고 있으며, 최종안은 올해 5월 제출될 2020년 이후 다년도지출계획에 관한 제안서에 포함될 예정이다. 이 외에도 기술지원활동 관련 예산을 2020년까지 기존 계획의 2배인 총 3억유로(2018~2020년)로 증액해 각 회원국의 구조개혁지원프로그램 지원을 강화하고, 유럽구조투자기금 관리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EU-회원국 간에 합의한 개혁조치의 성과에 따라 지원규모를 차등화하는 방안의 도입을 추진할 예정이다. 마지막 과제는 유럽경제·재무장관직 신설이다. EU 집행위 부위원장과 유로그룹 의장직을 겸하는 자리로 EU 집행위는 해당 직위가 신설되면 경제와 재정에 관한 책임성과 전문성이 결합돼 역내 경제정책 결정의 일관성과 효과성, 투명성이 제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제안서에 예시된 유럽경제·재무장관의 주요 역할은 EU 기관과 회원국, 일반대중 사이의 주재자(key interlocutor)로서 EU 전체의 이해를 제고하고, 국제무대에서 EU를 대표하며 역내에서 추진되는 경제·재정정책들을 조정해 일관성과 효과성을 높이는 것이다. 또한 각 회원국 추진 개혁조치들을 조정·지원하고 재정정책의 목표를 설정하며, EU 차원의 정책우선순위에 예산이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도록 조정하는 것도 주요 역할이다. 위와 같이 EU 통합 강화를 위한 밑그림은 제시됐지만 향후 논의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통합 강화의 당위성에 대부분의 회원국이 공감하더라도 로드맵에 제시된 세부 추진과제들에 관해 회원국 간 입장차이가 상당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초 목표한 통합 수준에 못 미치거나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통합이 진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로존의 세 번째 경제대국인 이탈리아에서 최근 치러진 총선에서 EU 통합에 반대하는 극우·포퓰리즘 정당들이 약진한 점, 진행 중인 브렉시트 협상도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EU 회원국 전반에 걸쳐 경제회복세가 견고하고 단일통화에 대한 EU 시민들의 지지율이 64%로 사상 최고에 이른 지금이 EU 통합 강화의 적기(“Wind is back in Europe’s sails”)라 할 수 있으며 프랑스와 함께 EU 통합을 이끌어야 할 독일에서 메르켈 총리가 4연임에 성공한 것도 긍정적 요인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개방과 협력의 정신을 기초로 끈질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온 것이 유럽통합의 역사라고 본다면 속도가 문제일 뿐 유럽통합은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