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해결체제는 WTO의 전신이었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불완전한 분쟁해결체제를 보완함으로써 보다 정교하고 진화한 구조로 설계됐다. 우선, 보고서 채택과 관련해 부정적 총의(negative consensus)의 의사결정 구조를 도입함으로써 패소국이 일방적으로 채택을 저지할 수 없게 했으며, 상소기구를 둬 패널단계 법률분석에서의 오류를 재검토할 수 있는 재심단계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WTO에서는 과거보다 효과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게 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협정의 충실한 이행 및 준수를 유도할 수 있게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WTO 관계자들이 WTO 분쟁해결체제를 WTO 체제 내 ‘왕관의 보석(crown jewel)’에 비유하기도 한다.
상소기구의 위기…위원 7명 중 4명만 남아, 후임자 선발절차 개시도 못해
상소기구는 WTO 협정의 분쟁해결절차에 관한 양해(Understanding on Rules and Procedures Governing the Settlement of Disputes, 이하 DSU)에 따라 국제통상법 전반에 대한 권위적인 전문성을 갖춘 7명의 위원(임기 4년, 재임명 1회 가능)으로 구성되도록 하고 있다. 최근 4월 9일 상소절차에 회부된 한·일 수산물 분쟁을 포함해 지난 20여년간 약 145개의 분쟁이 상소에 회부됐다. 상소위원은 순환 원칙에 따라 3인이 1개 분과를 이뤄 교대로 상소분쟁을 담당하게 된다.
상소기구에서 결원이 발생할 경우 DSU 17.2조에 따라 WTO 회원국들은 후임자를 선발해 상소기구를 충원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중간에 종종 우여곡절이 발생하기는 했으나, 그간 상소기구는 7명의 위원들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정상적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위기는 2017년 초부터 시작됐다. 2017년 6월 라미레스(Ricardo Ramirez) 전 상소기구 위원의 8년 임기가 끝나 결원이 발생했는데 후임자를 선출하는 절차를 개시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는 유럽연합(EU) 측이 2017년 12월에 임기가 끝나는 반 덴 보시(Peter Van den Bossche) 전 위원의 후임자 선발절차를 라미레스 전 위원의 후임자 선발절차와 연계해 동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은 라미레스 전 위원의 후임자 선발절차 개시에만 동의할 수 있다고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17년 상반기에 상소기구 선발절차가 개시조차 못하고 있던 사이 라미레스 전 위원의 임기가 종료됐다. 이어 김현종 전 위원이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임명되면서 2017년 8월 1일부로 상소기구 위원직에서 사임하게 됐다. 이로써 2017년 8월, WTO 상소기구에는 2개의 공석이 생겼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선발절차 개시 지연이 선발절차의 동시 진행 문제에 대한 미국-EU 간 입장 대립에 의한 것으로 인식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견해차만 해소되면 선발절차가 개시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미국이 상소기구 위원 선발절차 개시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강화함으로써 오히려 교착상태가 더욱 굳어졌다. 2017년 8월 31일 WTO 분쟁해결기구(DSB; Dispute Settlement Body) 정례회의에서 미국은 라미레스 전 위원이 임기가 종료됐음에도 기존에 수임했던 담당 분쟁에 계속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문제(소위 Rule 15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논의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 선발절차 개시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고, 아직까지도 그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결국 2017년 12월에는 반 덴 보시 전 위원의 임기가 종료됐고, 아직까지도 상소기구 위원 선발절차는 개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상소기구는 7명 정원에 4명의 위원만이 현직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WTO 회원국들 간에는 선발절차를 조속히 개시해야 한다는 점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선발절차 개시에 관한 제안서에도 2018년 4월 현재 64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Rule 15 문제란?
· 상소기구 작업절차 15항(Rule 15)에 따르면, 상소기구 위원의 임기가 담당 분쟁의 심리보다 먼저 끝나는 경우, 담당 분쟁의 심리를 마무리하기 위해 상소기구가 스스로 회원국의 승인 없이 해당 위원의 연장근무를 승인할 수 있음.
· 미국은 상소기구 위원을 임명하는 권한을 DSB가 가지고 있다는 이유(즉 회원국 동의 필요)로 연장근무도 DSB 승인사항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음.
美, 표면적으론 ‘Rule 15’ 제기…WTO 상소기구 판정에 누적돼온 불만이 근본 이유
그렇다면 상소기구에 결원이 지속되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우선, 1명의 상소기구 위원이 부담하는 업무량이 증가하고, 그 결과 상소심리의 처리 속도가 줄어들어 지연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상소기구 공석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더 근본적인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즉 선발절차 개시가 계속 지연되는 가운데 남은 위원들의 임기가 종료돼 상소기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임기종료를 앞두고 있는 서반싱(Shree Servansing) 위원이 오는 9월까지 재임명되지 못한다면 당장 상소기구는 단 3명의 위원만 남게 된다. 2019년 12월까지도 선발절차를 개시하지 못하면 상소기구에는 1명의 위원만이 남게 돼 사실상 상소기구는 작동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론적으로 협정상 상소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하게 되기 때문에, 패널판정 결과에 불복하는 회원국이 단순히 상소 통보만 하면 상소기구 활동 재개까지 판정의 이행을 무기한 미룰 수 있게 된다. 결국 상소기구의 공석이 심각하게 악화되면 WTO 분쟁해결절차가 전체적으로 마비되는 상황에도 이를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이 표면적으로는 Rule 15 문제를 이유로 선발절차 개시에 반대하고 있지만, Rule 15 문제가 진정한 이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우선, Rule 15 문제의 개정 논의와 상소기구 위원 선발절차를 동시 진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소기구 공석 장기화가 WTO 체제 차원에서 가져올 리스크를 감안하면, 최소한 Rule 15 문제해결 이후의 계획(즉 선발절차 개시에 동의)에 대한 입장도 밝혀야 하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없었다. 즉 반대 이유가 다른 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WTO 분쟁해결체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2018년 2월 28일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서 작성돼 미국 상원에 보고된 「트럼프 행정부 연례 무역 정책보고서(2018 Trade Policy Agenda and 2017 Annual Report)」다. 이 보고서는 “WTO 분쟁해결체제에 의해 WTO 협정이 사실상 수정됨(rewritten)으로써 불공정 무역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는 “WTO가 규범 중심의 체제로 계속 남도록 하는 가운데 WTO 분쟁이 애당초 미국이 합의했던 규칙에 따라 다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이 보고서는 WTO 분쟁해결체제에 관해 미국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것이 패널이나 상소기구가 WTO 협정에 따른 회원국의 의무와 권리를 변경하는 것이라고 명시한다. 특히 이 보고서는 상소기구가 WTO 회원국이 합의한 규정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상소기구는 i) 상소심리의 90일 시한을 지키지 못하고 있고, ii) 임기가 종료된 상소위원의 연장근무를 허용하고 있고, iii) 분쟁해결에 불필요한 권고적 의견을 보고서에 포함시키고 있고, iv) 사실관계 분석이 허용되지 않음에도 회원국의 국내법을 새롭게(de novo) 심사하고 있고, v) WTO 체제에서 선례구속이 인정되지 않음에도 과거 상소기구 보고서를 선례로 인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이 WTO 상소기구 충원을 가로막는 것은 단순히 Rule 15라는 표면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상소기구와 관련해 보다 근본적 문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트럼프 행정부에 들어서 새롭게 천명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앞서 설명한 무역 정책보고서에서도 이러한 미국의 입장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오랫동안 유지돼온 입장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제네바의 일부 법률전문가들은 미국의 제로잉(zeroing) 계산법과 반덤핑 협정상의 해석규칙(17.6조) 등 무역구제 관련 사항에 대한 그간의 상소기구 판정에 미국 무역대표부와 상무부(USDOC)를 중심으로 불만이 누적돼왔음을 지적한다.
9월 서반싱 위원 재임명 문제가 향후 중요 가늠자 될 것
이러한 상소기구 공석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이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이 상소기구 위원의 임기 중첩 발생 가능성과 연장근무 승인권에 대한 법리적 모호성을 이유로 상소기구 위원 선발절차의 개시를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미국의 불만이 오래전부터 지속돼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시일 내에 미국이 입장을 바꿀 가능성이 크지 않으며, 따라서 상소기구에서 결원 상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학계에서는 WTO 상소기구 결원 장기화에 대비해 여러 가지 대안을 제안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례로 퀴페(Pieter Jan Kuijper) 암스테르담대 교수는 상소기구 위원 임명을 컨센서스에서 벗어나 투표제로 정할 것을 제안한다. 반대하는 국가는 1개국뿐이므로 새로운 위원을 임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차노비츠(Steve Charnovitz)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현원이 4명 이하가 되는 경우 상소를 기각한다고 상소기구 작업절차를 수정함으로써 결원 상황에서는 패널보고서가 최종보고서가 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다른 한편 앤더슨(Scott Anderson et al.)은 CTEI 보고서(CTEI-2017-17)를 통해 DSU 25조상의 중재절차를 활용해 중재인이 상소기구의 역할을 대행하는 간이 상소절차를 도입함으로써 결원상황을 대체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이 WTO 회원국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상소기구 문제에 대한 상황 전개를 예측하는 데 서반싱 위원의 재임명 문제(2018년 9월)가 중요한 가늠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재임명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불분명한 상황이지만, 지금까지 2번의 상소기구 위원 재임명 반대(힐먼 전 위원 및 장승화 전 위원)가 모두 미국에 의해 이뤄졌음을 감안하면 이번에도 반대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미국에 상소기구 약화 의도가 있다면, 재임명에 반대한 후 후임 선발절차도 차단함으로써 상소기구 결원 상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결국 대안 마련에 대한 논의도 미국의 의도가 보다 분명해져야 구체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WTO 체제를 만들고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 미국의 공헌과 역할을 생각하면, 미국을 배제한 다자통상체제를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WTO 분쟁해결체제의 재조정 문제를 두고 미국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WTO 차원에서 불가피한 숙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