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은 2015년 12월에 개최된 제21차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모든 국가들이 자발적·강제적으로 자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기로 약속한 파리협정(Paris Agreement) 채택에 합의했다. 파리협정 이전에 국제사회의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대응을 이끌어온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 체제는 일부 선진국들만 온실가스 배출감축 의무를 지고 중국, 인도 등 실제 온실가스를 다량으로 배출하는 개발도상국들은 감축의무에서 제외됐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교토의정서 체제에서는 온실가스 감축의무가 없었지만 파리협정 체제에서는 우리 정부가 공약한 배출감축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美 탈퇴 이후 캐나다·중국과 손잡고 기후변화 대응 주도하는 EU 파리협정은 체결 당시의 예상보다 빠른 2016년 10월 발효됐는데, 이제 국제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파리협정의 세부 이행체제에 대한 합의와 온실가스 배출감축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국내 이행체제를 조속히 정비하는 것이다. EU는 파리협정 체결을 위한 국제협상을 이끌어왔으며 현재는 파리협정의 이행체제 확립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선도하는 주체로서 스스로의 역할에 강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파리협정 이행을 위한 EU의 기후외교와 이행입법 동향, 그리고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파리협정은 발효되자마자 미국의 탈퇴 발표로 큰 타격을 받았다. 2017년 6월 미국의 파리협정 탈퇴 발표 이후 한동안 일부 기후회의론자들은 ‘파리협정은 죽었다’며 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추가 이탈 가능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높아지기도 했다. 이 와중에 국제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EU는 미국의 탈퇴 결정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미국이 이탈하더라도 파리협정을 굳건히 지키고 이행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사실 EU가 국제 기후변화 대응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EU는 그동안 교토의정서 체결과 발효, 파리협정 체결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미국, 일본 등에 앞장서서 국제사회의 논의를 주도해온 경험이 있다. 현 상황에서 EU의 기후외교(Climate Diplomacy)는 미국 탈퇴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중국 등 주요 국가들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다행히 세계 최대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중국이 파리협정 이행에 전향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데, 미국의 탈퇴 발표 직후부터 EU는 중국과의 기후변화 협력 강화를 통해 파리협정을 이행해나갈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기후변화 각료회의(MoCA)다. EU가 선진국 중에서는 캐나다, 개발도상국 중에서는 중국과 손을 잡고 파리협정 이행과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을 주도해 나가려는 목적으로 창설한 이 회의는 2017년 9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첫 번째 회의를 개최한 바 있고 올해 두 번째 회의를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EU는 국제사회 기후변화 대응의 저변을 강화하고자 G20 국가들과의 전략적 기후변화 협력 강화를 위해 노력 중이다. EU는 파리협정 이행은 선진국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이 모두 참여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G7 선진국뿐만 아니라 주요 개발도상국들이 망라된 G20 국가들의 지지와 참여가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EU는 G20 국가이자 세계 12번째 온실가스 다량 배출국인 우리나라와의 기후변화 협력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EU와 같이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를 시행하고 있어 양측은 2016년부터 한·EU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협력사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EU는 정책개발, 국제협상 등 기후변화 전반에 걸쳐 우리나라와 협력관계를 강화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 40% 감축하고 저탄소 혁신기금, 에너지 현대화 기금 신설 파리협정 체결을 위해 세계 각국은 자국의 자발적인 온실가스 배출감축 계획을 공약했다. 세계 각국은 이 감축공약을 이행하고 주기적으로 상향 갱신해야 한다. EU도 마찬가지여서 파리협정 체결에 앞서 공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역내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U의 파리협정 이행입법 제·개정 작업은 상당히 빨리 진행되고 있으며 2017년 12월 말까지 이를 사실상 마무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U의 파리협정 이행정책의 기반이 되는 기후정책 목표는 크게 장기, 중기, 단기 목표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EU는 205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80% 이상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20% 감축하고 재생에너지 사용률은 20%까지 확대하며, 에너지효율성을 20% 향상한다는 목표다. 이를 더욱 강화한 것이 중기 목표인데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40% 감축, 재생에너지 27% 보급, 에너지효율성 27% 향상이 목표다. EU의 파리협정 이행전략은 위에서 제시한 2030년 정책목표와 관련돼 있다. 즉 2030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는 ①제4기(2021~2030년)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이행입법, ②수송·가정·농업 등 배출권거래제가 적용되지 않는 부문에 대한 회원국들의 강제감축, ③토지 형질 변경, 산림이용 분야(LULUCF; Land Use, Land-Use Change and Forestry)에서의 온실가스 감축조치다. 이 외에도 2021년 이후 승용차 평균 이산화탄소배출량 목표 설정, 선박운송 온실가스 보고·측정 체계 구축,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중심 국제항공운송 온실가스 감축조치 마련 등 세부 기후변화 대응정책들을 마련하고 있다. EU의 온실가스 배출감축 정책은 크게 두 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 축은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EU 전역 1만2천여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는 배출권거래제를 통한 온실가스 감축이고, 다른 한 축은 가정·수송·농업·상업 등 배출권거래제가 적용되지 않는 부문에서의 온실가스 감축이다. 2030년 온실가스 배출 40% 감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EU는 배출권거래제 분야에서는 43%를 감축하고 배출권거래제 적용을 받지 않는 분야에서는 30%를 감축할 계획이다. 배출권거래제 부문에서는 계획기간 동안 EU 전역에 통용될 배출권의 한도(cap)를 정하고 이를 매년 일정량만큼 줄여나가게 된다. EU는 제4기(2021~2030년) 배출권거래제 시행지침을 2017년 11월 확정했는데 주요 내용을 보면 EU 내 배출권 총량을 연간 2.2%씩 줄여나가며, 전체 배출권의 57%를 경매로 할당하고, 저탄소 혁신을 지원하기 위한 혁신기금(Innovation Fund)과 저소득 회원국의 에너지 현대화를 지원하기 위한 현대화 기금(Modernization Fund)을 신설할 계획이다. 한편 배출권거래제 적용을 받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는 회원국별로 온실가스 감축량을 할당하기 위한 ‘노력분담규정(Effort Sharing Regulation)’에 대해 EU 이사회와 유럽의회가 합의했다. 여기에 따르면 2017년 12월 28개 회원국의 1인당 GDP를 기준으로 해서 2005년 배출수준 대비 40% 감축부터 현행 유지까지 차등해서 감축의무를 지게 된다. 가령 룩셈부르크는 40%, 덴마크는 39%를 감축해야 하지만 불가리아는 0%, 루마니아는 2% 감축의무를 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EU는 토지·초지·목재 등의 온실가스 저장 또는 배출(LULUCF) 분야에 대한 LULUCF Regulation 제정안을 2017년 12월에 확정했다. 여기서는 회원국 내 토지이용, 벌목 등으로 발생한 온실가스 배출량이 해당 분야에서의 온실가스 저감량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no debit rule’을 확립했다.
선진국 의욕과 개발도상국 요구를 조화롭게 중재하는 역할 중요 EU의 기후정책은 전 세계 어느 지역, 어느 국가에 비해서도 탄탄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 28개 회원국들이 국제사회 대응에 단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농업·산업·에너지 정책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는 이른바 주류화(mainstreaming)가 가장 잘 진행돼 있다. 그러기에 파리협정 이행입법도 전 세계 어느 곳보다 빨리 마무리됐다. 하지만 한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현재 EU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를 대내외적인 것으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미국의 탈퇴 이후 국제사회 리더십의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하는 부분이 가장 크다. EU를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리더십을 공고히 하는 것이 중요하며 국제사회에 모범을 보이면서 선진국의 의욕과 개발도상국의 요구를 조화롭게 중재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절실하다. 한편 EU 내부적으로는 EU의 탈화석연료 정책방향에 공공연히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 저소득 동유럽 국가들을 기후변화 대응에 계속 동참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