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제네바에서 WTO 회원국들이 내년 6월 카자흐스탄 누르술탄에서 개최될 제12차 WTO 각료회의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는 목표 아래 논의를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 수산보조금과 전자상거래 및 서비스 국내규제다. 이 외에 회원국들이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또 하나의 분야가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investment facilitation for development)다. 다만 투자원활화는 그 논의의 시작이 수산보조금과 전자상거래 및 서비스 국내규제 협상에 비해 늦었고, 일부 주요 회원국들이 논의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내년 각료회의에서 이들과 같은 수준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배경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 논의의 배경과 동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투자원활화협정은 기존 우리 정부가 체결해온 투자보장협정(IPPAs; Investment Promotion and Protection Agreements) 또는 양자간투자협정(BIT; Bilateral Investment Treaty)과는 목적과 내용에서 큰 차이가 있다. 투자보장협정은 유치국의 국내법에 따라 허용된 투자에 대한 사후적 보호만을 보장하는 반면, 양자간투자협정은 이에 더해 통상 투자자유화, 설립 전 투자에 대한 보호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서 한일투자협정, FTA 내의 투자챕터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투자자유화 포함 여부이며, 포괄해 ‘투자협정’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투자원활화협정은 투자자유화와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ISDS; Investor State Dispute Settlement)는 물론이거니와 투자 자산의 보호조차도 제공하지 않으며, 투자유치국의 법률을 개정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외국인투자 설립 절차의 투명성과 효율성 등을 제고해 외국인투자 환경, 특히 투자설립과 관련된 환경을 개선하는 조항들을 주로 포함하고 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의 조사에 따르면 2010년 이후 투자원활화를 포함한 ‘신세대’ 투자협정이 체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듯 기존의 투자협정과는 협정의 적용 대상과 범위 및 규범의 강제성의 정도가 크게 다른 투자원활화협정이 현재 WTO에서 논의되고 있는 데는 1995년 WTO가 출범한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국제다자무역협상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04년 DDA 협상 의제서 투자 제외…2013년 논의 필요성 다시 제기
국제투자규범은 WTO 출범 후 처음으로 개최된 1996년 싱가포르 각료회의에서 신규규범 의제(싱가포르 이슈: 투자, 경쟁정책, 무역원활화, 정부조달투명성) 중 하나로 논의가 시작돼 2001년 시작된 제9차 다자무역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 Doha Development Agenda, New Round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으나 개도국의 이해를 반영해 ‘개발’이 포함된 Doha Development Agenda로 명칭 변경) 협상 의제에 포함돼 논의가 지속됐다. 그러나 싱가포르 이슈가 2003년 9월 멕시코 칸쿤에서 개최된 제5차 WTO 각료회의 결렬의 직접적인 이유로 대두됨에 따라, 2004년 8월 개최된 WTO 일반이사회는 싱가포르 이슈 중 무역원활화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DDA 협상 의제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개도국들은 투자에 대해서는 특히 시장개방(투자자유화)과 ISDS를 우려하는 입장이었다. 개도국들이 추가적인 시장개방을 우려하고 개발 의제를 최우선 순위에 둔 DDA에서 국제적인 투자규범을 도입한다는 일부 선진국들의 협상 목표에 대해서는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에서도 다자간투자협정(MAI; Multilateral Agreement on Investment) 협상(1995~1998년)이 실패한 것을 감안하면 ‘과도하게 야심찬’ 것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투자 이슈에 대한 일체의 논의가 중단됐던 WTO에서 ‘투자와 관련된 이슈’에 대한 논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기 시작된 것은 2013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제9차 각료회의에서 무역원활화협정 협상이 타결된 후였다. DDA 협상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돼 협상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회원국들은 DDA 협상 의제가 아닌 분야 중에서 회원국 간 합의가 가능한 새로운 통상 이슈들을 모색하게 됐고, DDA 협상의 유일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무역원활화협정과 유사한 국제투자 분야에서의 원활화협정이 이러한 이슈 중 하나로 제시됐다. 개도국들의 지속 가능한 개발과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외국인투자의 안정적인 유입이 필요하므로 투자환경의 투명성과 효율성 제고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협정을 WTO에서 논의하되 싱가포르 이슈 논의 당시 개도국들이 특히 우려했던 시장개방, ISDS, 투자보호를 제외하자는 아이디어가 2015년 ‘E15 Initiative’라는 국제회의에서 처음으로 논의됐다.
2017년 제11차 각료회의에서 70개국이 각료공동선언 채택…2018년부터 각료선언 참여 동일입장 국가들 논의 시작
이후 UNCTAD와 OECD 등의 국제기구에서 투자원활화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고, 정부 간 회의에서도 의제로 채택돼 2016년 중국 항저우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투자원활화와 관련된 ‘국제투자정책수립 지도원칙’을 승인했다. 항저우 G20 정상회의에서 투자원활화 이슈가 논의 주제로 채택된 데서 보듯이 WTO에서의 투자원활화 논의에 큰 관심을 보인 국가 중 하나가 중국이었다. 중국은 항저우 G20 정상회의 후 투자원활화 논의를 WTO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외국인투자환경의 투명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그다지 선진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중국이 이 논의에 앞장선 데 대해서는 자국에도 부담이 없고 회원국 간 합의가 용이한 ‘소프트’ 이슈에 대한 논의 주도를 통해 다자통상체제 강화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2017년 투자원활화에 관심을 가진 WTO 회원국들은 5~11월간 지속된 비공식대화와 MIKTA(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 5개 중견국으로 구성된 지역 간 협의체) 워크숍, 투자원활화 프렌즈그룹(FIFD; Friends of Investment Facilitation for Development) 워크숍 등을 통해 WTO 투자원활화에 포함될 수 있는 내용들에 대해 논의하는 한편, 투자원활화 논의 필요성에 대한 회원국들의 공감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FIFD는 이러한 논의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국가들의 모임으로 2017년 2월 중국, 파키스탄,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브라질, 홍콩, 콜롬비아 7개국으로 시작해 현재는 17개국이 참여하고 있다(우리나라는 2017년 6월부터 참여). 개도국 위주로 구성된 이 그룹 외에 EU, 호주, 캐나다, 일본, 러시아 등도 초기부터 논의에 적극 참여했다.
FIFD 국가들은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제11차 각료회의에서 투자원활화의 구조적 논의(structured discussion)를 위한 각료결정 채택을 추진했으나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쿠바, 볼리비아, 에콰도르, 우간다, 베네수엘라 등이 투자 논의에 대한 협상권한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함에 따라 채택에 실패했고, 70개국(EU 28개국 포함)이 각료공동선언을 채택했다. 각료공동선언은 투자원활화의 다자적 프레임워크(multilateral framework)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구조적 논의를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은 또한 일부 회원국들의 투자 이슈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시장접근, 투자보호, ISDS는 다루지 않는다고 명시해 싱가포르 이슈에 포함됐던 투자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각료선언에 참여했던 동일입장 국가들(like-minded countries)은 2018년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구조적 논의의 코디네이터[coordi-nator, WTO 정식 논의가 아님에 따라 의장(chair)으로 칭하지 않음]가 제시한 로드맵과 2017년 말 브라질이 제안한 비공식 협정문안 등을 기초로 2018년 논의 계획을 세웠으며 투자 조치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 증진, 행정절차·요건 신속화 및 간소화, 국제협력 강화, 개도국과 최빈개도국의 국제투자흐름 참여확대 원활화 등을 주제로 6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에서 참여국들은 투자원활화 요소들과 관련한 국내법령 및 정책과 해당 요소들이 포함된 자국의 FTA 국제협정 조문들을 소개했다. 2019년 상반기에는 이러한 요소들의 국내법령 및 국제협정 예시들을 제시하는 회의가 5차례에 걸쳐 개최됐으며, 하반기에 실질적인 조문별 문안 논의에 들어가기로 참여국 간에 합의됐다. 우리 정부도 이러한 논의 과정에 적극 참여해 우리의 원스톱 외국인투자지원 체제인 ‘Invest Korea’와 외국인투자 옴부즈만 제도 등을 소개하고, 관련 국내법령과 FTA 조항을 예시로 제시했다.
미국, 인도 등 주요국 반대 여전…내년 12차 각료회의에서 정식 논의 승인 예단 어려워
지난 2017년 열린 제11차 각료회의에서 협상 개시를 위한 각료결정문 채택에 실패한 투자원활화 논의가 현재 WTO에서 갖는 공식적인 법적 지위는 일부 참여국 간의 ‘공동 이니셔티브(joint initiative)’다. 9개월을 앞둔 차기 각료회의에서 투자원활화가 WTO 정식 논의로 승인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현재 시점에서 예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현재도 미국이나 인도와 같은 주요 국가들이 여전히 투자원활화 논의를 지지하지 않고 있고, 논의에 참여하는 국가들도 크게 늘지 않았다는 점은 제12차 각료회의에서의 긍정적인 결과를 전망하기 어렵게 만든다.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여전히 협상권한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투자원활화 논의에 반대하고 있으며, 미국은 시장개방과 투자보호 및 ISDS가 제외된 투자 논의는 의미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현재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개도국들과 최빈개도국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 논의임에도 역량구축과 기술지원 등 특별한 개발 혜택이 없다는 점을 그 이유로 꼽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투자원활화의 다자적 프레임워크에 대한 논의와 병행해 이들 국가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아웃리치(outreach)’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결국 투자원활화가 차기 각료회의에서 전체 각료 간 합의라는 형태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개도국들을 포함한 더 많은 회원국들이 논의에 참여해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논의의 진전을 이뤄내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의를 주도하는 국가들이 논의에 반대하는 주요 국가들을 설득한다는 전제 조건이 충족돼야만 한다. 이에 더해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신고립주의를 표방하면서 다자통상체제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미국이 각료회의에서의 합의 도출을 위해 얼마나 적극적인 협상의지를 보이는지 또한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끝으로 투자원활화에 대한 WTO에서의 다자적 논의 합의가 어려운 경우 정부조달협정과 같이 복수국간협정(plurilateral agreement)으로 하는 방안도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으나, WTO 설립을 위한 마라케시협정 10조 9항은 복수국간협정의 추가도 총회에서의 만장일치로 결정된다고 명시하고 있어 이 또한 논의 참여국들만의 합의로 결정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