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1억8,713만유로(약 1조7,072억원). 2000년 이후 국내 기업들이 EU 경쟁법(카르텔)을 위반해 EU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로부터 부과받은 벌금 총액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12월 새로운 5년의 임기를 시작했다. 기존 경쟁 분야 집행위원인 덴마크 출신의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Margrethe Vestager) 위원이 연임하게 됨에 따라 역대 최장수 경쟁 분야 위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27명의 집행위원 중 수석부집행위원장(총 3명)에 임명돼 그 지위가 격상됐고, 미션레터상 첫 번째 임무로 전 산업에서의 경쟁법 위반행위 적발과 신속한 사건처리가 강조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5년간 경쟁법 집행이 상당히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글에서는 경쟁법 분야별로 최근의 법집행 동향, 사건처리 절차, 방어권 확보방안 등 국내 기업이 숙지해야 할 점들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EU에 수출·투자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쟁법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EU는 경쟁법을 EU 단일시장을 유지·확대할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법 집행 수준이 다른 국가에 비해 매우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EU 경쟁법은 EU 경쟁총국(Directorate-General for Competition) 외에 개별 회원국 경쟁당국도 집행권한을 보유하고 있어 그 감시망이 매우 촘촘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사전에 조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카르텔은 경쟁법 집행의 최우선 순위, 위반 시 벌금 외에 손해배상도 부담
첫째, 카르텔은 경쟁기업들 간에 가격인상 등 거래조건에 대해 합의하는 행위로서 시장경제의 암으로 묘사될 정도로 EU 경쟁총국이 경쟁법 집행의 최우선 순위로 삼고 있는 분야다. 카르텔 기업에 부과된 벌금 규모를 5년 단위로 살펴보면 2005년 이후 대폭 증가했으며 2015~2019년의 경우 82억유로를 상회하고 있다(〈그림〉 참조).
EU는 효과적인 카르텔 적발과 사건처리를 위해 리니언시(leniency) 제도와 합의(settlement)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리니언시는 카르텔 기업이 증거자료를 EU 경쟁총국에 제출하고 조사에 협조할 경우 그 순서에 따라 벌금을 감경 또는 감면하는 제도다(1순위는 벌금이 100% 감면되며, 2순위는 30~50%, 3순위는 20~30%, 이하 순위는 최대 20%까지 벌금이 감경된다). 합의는 카르텔 기업이 EU 경쟁총국의 조사자료를 확인하고 경쟁법 위반을 인정할 경우 벌금을 10% 감경하고 신속히 사건을 처리하는 제도다.
또한 EU는 카르텔을 억지하기 위해 피해자가 카르텔 기업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용이하게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2014년에 제도 개선안을 발표했고 회원국들은 2018년까지 이 내용을 자국 법률에 반영 완료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피해자는 카르텔 기업이나 경쟁당국 등이 가지고 있는 증거자료를 획득하기 위해 법원에 자료제출명령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손해배상 소송의 소멸시효 기간은 5년 이상이며 각국 경쟁당국이 카르텔 조사를 하는 기간에는 시효가 정지된다. 손해배상 책임은 원칙적으로 카르텔 기업들이 연대책임을 지게 된다. 따라서 카르텔 적발 시 기업은 경쟁당국의 벌금 외에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기업과 거래조건에 관한 협의 자체를 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카르텔에 가담한 경우에는 벌금 감경·감면 제도를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기업결합에 엄격한 심사 잣대 적용
둘째, EU 내 일정 매출액 요건을 충족하는 기업결합은 EU 경쟁총국에 신고 의무가 있으며 심사기간에는 기업결합의 이행이 금지(standstill obligation)된다. 기업결합 심사는 1, 2단계로 나뉘는데 1단계 심사(최대 35일) 결과 경쟁제한성이 우려되는 경우에 2단계 심사(최대 125일)가 진행된다. 한 예로 국내 조선사인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간의 기업결합이 현재 2단계 심사 중에 있다. 2015~2019년 신고된 총 1,875건의 기업결합 중 160건(8.5%)에서 경쟁제한성을 이유로 조건부 허용 또는 금지 결정이 내려지거나 기업 스스로 기업결합을 철회했다. 같은 기간 중 2단계 심사가 개시된 사건만을 살펴보면 총 46건 중 약 87%인 40건에서 조건부허용, 금지 결정이 내려지거나 기업 스스로 철회할 정도로 시정조치 비율이 매우 높다. 특히 2019년 한 해에만 EU 회원국 고속철도 회사인 지멘스(독일)와 알스톰(프랑스) 간 기업결합을 포함해 3건의 기업결합이 전면 금지되는 등 매우 엄격한 심사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 위 고속철도 사건의 경우 일부 회원국들은 유럽 챔피언기업 탄생을 위해 기업결합 승인을 주장했으나, EU 경쟁총국은 가격인상 등 경쟁제한 폐해가 우려되고 기업이 제안한 시정조치안으로는 그러한 우려를 해소할 수 없다고 하면서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쟁제한성이 있는 사건의 경우 대부분 조건부 허용(commitments; 해당 기업이 EU 경쟁총국에 시정조치안을 제시하고 이해관계자 등의 의견수렴을 거쳐 최종적으로 구속력 있는 조치 부과) 방식이 활용되고 있으므로 필요시 이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가 요구될 수 있다.
셋째, 독점력 남용은 최근 EU가 글로벌 테크기업에 대해 가장 활발히 경쟁법을 집행하고 있는 분야다. EU는 2017~2019년 중 3차례에 걸쳐 구글에 무려 총 82억5천만유로의 벌금을 부과했다. 지난해 10월에는 TV 셋톱박스와 모뎀에 들어가는 칩셋을 제조하는 미국업체인 브로드컴(Broadcom)이 구매업체들과 체결한 (준)독점공급계약의 일부 조항을 무효화하는 임시중지명령(interim measure)을 부과했는데, 이 조치는 EU가 약 20년 만에 꺼내든 것이다. 또한 베스타게르 집행위원은 최근 디지털 플랫폼 기업의 자기편익 행위(self-preferencing; 타사의 중개 상품·서비스보다 자사의 상품·서비스를 검색상단에 노출하는 등 혜택을 부여하는 행위)에 대해 철저히 감시하겠다고 수차례 천명했다. 기술 변화 속도가 매우 빠른 디지털기술 관련 시장의 경우, 수년간의 조사 후에 독점력 남용 기업에 벌금을 부과하더라도 해당 시장을 경쟁법 위반 이전의 경쟁상황으로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외견상 경쟁법 위반이 명백한 경우 조사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더라도 당해 행위를 즉시 중지시키는 등 선제적·적극적인 개입조치를 취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EU 내 투자 준비 기업, 보조금 심사 절차·기준 정확히 숙지를
넷째, EU 회원국이 투자유치 등을 위해 특정 기업에 보조금(state aid)을 지급하려는 경우 EU 경쟁총국은 사전에 회원국으로부터 신고를 받아 보조금이 경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심사를 진행한다. 실제로 삼성SDI의 전기자동차 배터리공장 증설투자에 대한 헝가리의 보조금 지급계획이 현재 EU 경쟁총국의 심사를 받고 있다. 경쟁총국은 특정 기업이 보조금으로 인해 비용절감 등 과도한 혜택을 부여받아 경쟁이 왜곡된다고 판단할 경우 보조금을 일부 또는 전액 삭감할 수 있다. 따라서 EU 내 투자를 준비하고 있는 국내 기업의 경우 보조금 심사 절차·기준을 정확히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투자유치 관련 보조금에 대해 합법 결정(positive decision)을 받기 위해서는 ①회원국의 보조금이 없었으면 기업의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 ②보조금 규모가 투자유치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일 것, ③보조금으로 인해 투자지역이 EU 내 다른 회원국으로 변경되지 않을 것 등의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업의 방어권 보장과 영업비밀 보호를 위해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EU 경쟁법 위반혐의로 심사보고서(statement of objections)를 받는 경우 피조사 기업은 방어권 행사를 위해 경쟁총국이 보유한 증거자료에 대해 자료접근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업자의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경쟁총국이 자료접근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청문관(hearing officer)에게 그 자료의 공개를 요청할 수 있다. 청문관이 해당 자료가 피조사 기업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데이터룸(data room) 제도 등을 통해 피조사 기업이 고용한 외부변호사로 하여금 자료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편 EU 경쟁총국에 참고인 자격으로 자료를 제출하는 경우에는 비밀정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삭제한 공개버전(non-confidential version)과 비밀정보로 생각하는 이유를 적시해서 함께 제출해야만 피조사 기업에 비밀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