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WTO 출범 25주년이다. 평등한 주권국가들로 이뤄진 국제사회에서 ‘규범의 형성’뿐 아니라 ‘규범의 이행’을 감독하는 일은 쉽지 않음에도 WTO가 그동안 첨예한 경제적 이익과 연관된 규범을 다뤄왔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비록 최근 상소기구 위기 등으로 WTO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할 수 있으나, 164개 회원국과 가입희망국을 포함해 전 세계 대다수 국가가 WTO 규범을 글로벌 무역체제의 하나의 중심축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WTO 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실질적 기여를 하고 있는 ‘무역정책검토(TPR; Trade Policy Review)’ 메커니즘의 유용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회원국 무역비중 고려해 TPR 주기 정해져…한국은 5년마다 검토대상
WTO 분쟁해결절차를 개시하지 않는 한 개별 회원국으로 하여금 WTO 규범의 이행을 유도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회원국들은 동료검토(peer review)라는 방식을 도입했다. GATT 체제 당시 당사국들은 개별 회원국의 무역환경 및 그와 관련된 회원국의 조치와 정책 등을 검토하는 TPR 메커니즘을 우루과이라운드의 조기 성과물로 WTO 출범 전인 1988년 도입했다. 다시 말해 개별 회원국의 무역정책을 전체회의에서 검토함으로써 투명성을 제고하고 종국적으로는 국제무역의 확대에 기여하는 것이 TPR의 주된 목적이다. WTO 설립협정 부속서 3은 TPR 메커니즘의 목적을 다자무역협정하에서 규범을 충실히 지키도록 하고 개별 회원국의 무역정책 및 관행에 대한 이해 및 투명성을 제고하며 다자무역체제의 기능을 원활히 하는 데 있다고 규정한다.
TPR 메커니즘은 크게 검토대상국 및 사무국이 각각 작성한 보고서, 서면 질의답변 절차, 무역정책검토기구(TPRB; Trade Policy Review Body) 전체회의, 결과보고서 발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사무국 보고서는 검토대상국 보고서와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작성됨에 따라 보다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서면 절차의 경우 검토대상국은 제기된 질의에 대한 답변을 정해진 시한 내 해야 한다. TPR 메커니즘의 가장 핵심 과정인 TPRB 전체회의는 이틀간 개최되며, 검토대상국의 고위급 대표단이 참석해 자국의 무역정책을 설명하고 이어 회원국을 대표한 토론자가 검토대상국의 정책에 대한 평가를 발표한다. 이후 발언을 희망하는 개별 회원국들에 7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전체회의 이후 보고서 등 전체 검토내용을 반영한 공식 결과보고서를 최종 발간하게 된다. 이러한 TPR은 회원국의 무역비중을 고려해 정해진 주기(3년, 5년, 7년)에 따라 실시된다. 2019년부터 무역 규모가 가장 큰 4개국(미국, EU, 일본, 중국)은 3년마다, 이후 규모 순으로 한국, 캐나다를 포함한 16개 회원국은 5년마다, 나머지 국가들은 7년마다 검토대상이 된다.
TPR의 대표적 효능은 투명성 제고에 있다. 일반적으로 WTO 체제에서는 ‘통보(notification)’가 가장 많이 알려진 투명성 제고 수단이다. 그러나 통보가 개별 활동으로 특정 분야에 한정되는 것과 달리, TPR은 회원국의 정책 전반에 대해 다수가 참여하는 공동 활동이라는 점에서 상이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통보가 한정된 분야(수입제한 조치, 보조금 내역 등)에 대해 해당 회원국이 단독으로 이행하는 객관적 사실을 제공하는 활동이라면, TPR은 회원국 경제·통상 정책의 전반 분야에 대해 사무국(독자 보고서 작성)과 여타 회원국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활동으로 사실을 넘어서 정책에 대한 평가가 포함돼 있다.
일각에서는 TPR이 회원국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종합적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통보보다 유용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더욱이 통보 이행 여부는 전적으로 회원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반면, TPR은 회원국 정책을 주기적으로 검토한다는 점에서 투명성 제고를 위한 최후의 보루 성격을 띤다.
강대국에도 국제규범에 근거해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TPR은 기본적으로 동료검토 방식으로 진행된다. 동료검토는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국제사회에서 유엔 등 다른 국제기구에서도 회원국의 이행을 확보하기 위해 주로 활용되는 방식이다. 동료검토에 참여하는 회원국은 검토대상국의 정책이 국제규범에 맞지 않을 경우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검토대상국이 강대국이라 양자적으로 제기하기 부담스러운 사안이라도 다자 차원에서는 국제규범에 근거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이 TPR 메커니즘의 큰 장점이다. 검토대상국은 동료검토 절차를 통해 다수의 회원국이 동일한 지적을 해올 경우 이에 대한 압박을 받게 돼 장기적으로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동료검토 과정의 부수적 효과로 참여국은 WTO 규범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게 된다. 검토대상국의 정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검토대상국 정책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WTO 규범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이는 TPR 참여가 WTO 규범에 대한 자기학습이자, 규범에 대한 회원국 전체의 이해를 높여가는 과정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결국 이 절차에 참여하는 회원국들은 검토대상국의 경제정책뿐 아니라 WTO 규범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 종국적으로 WTO 체제의 원활한 운영에 기여하게 된다.
TPR 과정은 검토대상국에도 유용하다. 검토대상국은 이 과정을 통해 자국 경제정책을 평가하게 되고, 준비 과정에서 국내 관계기관과의 협력채널을 구축하게 된다. TPR 절차는 자료수집 개시부터 최종보고서 발간까지 약 1년의 시간이 소요되며, 이 기간 동안 국내 기관들은 국제규범에 대한 학습뿐 아니라 상호 긴밀한 협조를 통해 역량을 강화하게 된다. 실제로 장기간 준비를 통해 세관, 검역, 수출입 정책, 기술표준 등 여러 기능을 담당하는 국내 기관들과의 채널이 구축돼 향후에도 통합적인 업무 수행이 용이해진다.
특히 개도국 및 최빈개도국의 경우는 무역을 비롯한 전반적인 경제 분야 역량을 강화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선진국과 달리 개도국 및 최빈개도국에 TPR은 역량 부족으로 인해 큰 도전과제로 여겨지며, 이러한 절차를 완료하는 것 자체가 역량 강화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WTO 사무국과 함께 관련 절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최빈개도국 담당자는 국제사회의 수준 높은 행정역량과 무역규범을 접하게 되고, 이를 직접 효과적으로 습득하게 된다. 실제로도 최빈개도국은 TPRB 전체회의에서 사무국의 지원에 대해 사의를 표하고 있으며, 이러한 검토 절차를 통해 자국의 역량이 강화된 사실을 언급하기도 한다.
WTO 체제 운영과 회원국 역량 강화에 기여
이처럼 TPR은 다양한 측면에서 WTO 체제 운영과 회원국들의 역량 강화에 기여해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개선할 부분도 많다. 2019년에는 TPR 메커니즘 도입 30주년을 기념하는 콘퍼런스가 개최됐다. 백지아 주제네바대표부 대사는 콘퍼런스에 패널로 참석해 TPR 메커니즘의 개선을 위해 후속조치 강화, 검토보고서상 새로운 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 IT 기술을 활용한 서면답변 시스템 도입을 검토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현행 메커니즘에서는 결과보고서 발간 이후 후속조치가 없어 TPR이 일회성 행사라는 지적이 있음을 감안, TPRB 정례회의에서 후속조치를 보고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현행 보고서의 기본 틀인 전통적인 상품 분야를 넘어 지식재산권, 여성, 무역 등 다양한 분야를 보다 체계적으로 다룰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현재 사무국을 통해 취합되는 서면 질의답변 절차와 관련해 최신 IT 기술을 활용해 보다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2020년 전후로 예정돼 있는 제7차 TPR 평가 과정에서 우리 측 제안이 보다 구체화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