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4일 호베르토 아제베도(Roberto Azevedo) WTO 사무총장은 두 번째 임기 종료를 정확히 1년 앞둔 2020년 9월 1일부로 사무총장직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했다. 갑작스런 발표였지만 WTO 사무총장이 WTO 내 논의나 협상을 진전시킬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은 데다 WTO 개혁 등 주요 사안을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WTO는 사무총장이 아닌 회원국들이 주도하는 기구(member–driven organization)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WTO 회원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주요 언론은 WTO 사무총장의 조기 사임 결정을 비중 있게 다뤘다. 그리고 리더십 공백 방지를 위해 차기 사무총장을 조속히 선출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무역체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는 데 사무총장이 지닌 상징적인 영향력이 상당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필자 또한 WTO가 25년 동안 크고 작은 성과들을 도출하는 데 있어 사무총장들이 수행했던 역할은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WTO 사무총장은 대내적으로는 진실된 조정자(honest broker)로, 대외적으로는 다자무역체제의 굳건한 지지자로 활동한다. WTO 내 각종 이사회·위원회 의장도 있으나 대개 지역 그룹별로 순환하며 1년마다 교체되기에 의장이 WTO 작업의 모멘텀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반면 사무총장은 다년간 WTO 내 모든 논의와 협상을 지켜보고, 회원국들과 교류하며 소통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회원국들 앞에서 무형의 리더십을 보인다. 즉 수많은 회의 의사록과 결정문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제도적 기억(institutional memory)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사무총장의 역할은 WTO 설립 초기부터 도하라운드(DDA; Doha Development Agenda) 본격협상기를 거친 지금까지를 되짚어봐도 잘 알 수 있다.
자유무역 확대 노력 전개한 루지에로···라미는 최빈개도국의 무역참여·성장 기반 마련
먼저 WTO 설립 당시 GATT 사무총장이었던 피터 서덜랜드(Peter Sutherland, 아일랜드, 1995년)와 그 뒤를 이은 레나토 루지에로(Renato Ruggiero, 이탈리아, 1995~1999년) 사무총장은 WTO의 제도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향후 WTO의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뒀다. ‘세계화의 아버지’라고도 불린 서덜랜드 사무총장은 주요 회원국의 정상급 인사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체결을 이끌었고 이를 통해 WTO 탄생의 모멘텀을 마련했다.
루지에로 사무총장은 정보기술협정(ITA) 체결(1996년 12월), 기본통신서비스 시장접근 확대 협상 완료(1997년 2월) 등 자유무역 확대를 위한 노력을 전개했다. 특히 루지에로 사무총장은 WTO 사무국 설치에 필요한 요건 중 하나였던 연금계획 등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며 1999년 WTO 사무국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사무총장직을 이어받은 마이크 무어(Mike Moore, 뉴질랜드, 1999~2002년), 수파차이 파니치팍디(Supachai Panitchpakdi, 태국, 2002~2005년), 파스칼 라미(Pascal Lamy, 프랑스, 2005~2013년) 사무총장은 세계화와 반세계화라는 거대담론이 진행되는 가운데 WTO 외연 확대를 추진하는 한편, 다자무역협상 진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어 사무총장의 임기 중인 2001년에는 DDA가 출범했다. 그는 개도국들의 DDA 참여를 제고하기 위해 DDA 신탁기금(DDA Global Trust Fund)을 발족하고, 제네바 주간(Geneva Week)을 통해 비상주 WTO 회원국 및 옵저버(observer) 국가 관료들을 제네바로 초청했다. 이는 다시 WTO의 포용성과 투명성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짧은 임기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WTO 가입(2001년)을 포함한 회원국 확대 노력을 전개했으며 WTO 내 개발 이슈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환기했다.
파니치팍디 사무총장은 WTO 주요 회원국인 미국과 EU 사이의 갈등이라는 불리한 여건에서 DDA의 진전에 초점을 두고 사무총장직을 수행했다. 비록 2003년 칸쿤 각료회의는 투자, 경쟁정책, 무역원활화, 정부조달 투명성 관련 세부원칙(소위 ‘싱가포르 이슈’)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현격한 입장 차로 컨센서스를 도출하지 못하고 끝났지만, 이듬해 WTO 일반이사회에서 싱가포르 이슈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기본골격(framework) 합의(소위 ‘7월 패키지’)를 통해 협상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었다. 이 외에도 표준·무역개발기구(STDF; Standards and Trade Development Facility) 설립(2002년 9월), 최빈개도국의 WTO 가입절차 간소화에 대한 합의(2002년 12월), 사무총장 선출 절차 확립(2003년 1월) 등과 같은 제도적 성과도 거뒀다.
라미 사무총장은 8년의 최장 임기(4년 임기 이후 1차례 연임)를 수행한 첫 사무총장이다. 그의 임기 동안 지역무역협정 투명성 메커니즘 수립(2006년 12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무역정책 모니터링 조치 개선,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 타결(2011년 12월) 등이 이뤄졌으며, 무역을 위한 원조 이니셔티브(2005년 12월)와 기존 최빈개도국 지원을 위한 통합체계(Integrated Framework)의 업그레이드(Enhanced Integrated Framework)를 통한 최빈개도국의 무역참여와 성장 기반이 마련됐다.
아제베도, WTO 협상 진전시키는 ‘실무형’ 사무총장으로 평가
마지막으로 현임 호베르토 아제베도 사무총장은 브라질 WTO 대사(2008~2013년)로 쌓아온 WTO에 대한 높은 이해도로 주목받았다. 따라서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는 ‘실무형’ 사무총장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발리(2013년) 및 나이로비(2015년) 각료회의를 통해 오랫동안 정체된 WTO 협상이 일부 성과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특히 2013년의 무역원활화협정 체결은 WTO 설립 이후 최초의 다자협상 성과물로, 회원국 간 실질적인 교역 증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비록 2017년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제11차 각료회의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나 전자상거래, 서비스 국내규제 등 현시대가 요구하는 분야에서 관심국 간 논의의 기반을 마련했기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물론 이러한 성과가 역대 WTO 사무총장의 역할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WTO 내 성과물은 WTO 안팎에서의 회원국들 간 이해관계, 시대적 환경 등 다양한 요소가 혼합된 것으로 해석돼야 한다. 하지만 필자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각 사무총장의 정치적 중량감, WTO 협상에 대한 경험과 지식, 다자무역체제와 WTO의 역할에 대한 굳건한 신념 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기 사무총장 역시 리더십과 목표 의식을 갖고 사무총장직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현재 WTO는 다방면에서 다층적인 위기에 빠져 있다. 협상 정체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며, WTO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분쟁해결체제는 상소기구 마비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로 인해 국가 간 상품·서비스 무역량은 곤두박질쳤으며, 정치적 의지를 결집하는 주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제12차 각료회의는 내년으로 연기됐다. 이 밖에도 미·중 간 지정학적 갈등은 다자주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 모든 걸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을 가진 인물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WTO의 작업과 목표에 대한 확고한 신념, 검증된 리더십과 관리 능력, 뛰어난 소통 능력”이라는 최소한의 자격요건을 검증하기 위해 모든 회원국이 더욱더 고심해야 한다.
6월 8일 후보자 등록절차 개시 후 6월 15일 기준으로 벌써 3명의 후보[멕시코의 헤수스 세아데 쿠리(Jesus Seade Kuri),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Ngozi Okonjo–Iweala), 이집트의 압델–하미드 맘두(Abdel–Hamid Mamdouh)]가 WTO 사무총장직에 출사표를 던졌다. 회원국들은 7월 8일까지 각국이 보유한 최선의 후보를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 가운데 최고의 후보를 조속히 선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나라 또한 규범에 기반한 다자무역체제의 강력한 지지국으로서 이 절차에 건설적으로 참여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