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1일 오전 5시 31분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트위터에 올린 한 단어, “Deal!” EU 27개국 정상이 벨기에 브뤼셀에 모여 90시간 이상 마라톤 협상을 진행한 결과 7,500억유로 규모의 EU 경제회복기금(Recovery Fund)이 극적으로 타결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U는 지난 4월 23일 EU 정상회의에서 경제회복기금을 설치하는 큰 방향에 합의했고, 5월 27일 후속조치로 EU 집행위원회가 경제회복기금 설치 계획을 발표했으며, 이후 기금의 적정 규모와 지원방식 등 주요 사항에 대해 회원국 간 논의가 진행돼왔다.
EU 경제회복기금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제·사회적 피해를 입은 회원국의 지속 가능한 경제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EU 차원에서 조성하는 기금이다. 기금이 어떻게 설계되느냐에 따라 회원국별 수혜 및 부담 규모가 달라지고, 모든 회원국의 비준이 필요한 사안이라 자국 정치상황도 고려해야 하는 등 정치·경제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이 기금은 올해 EU경제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8.3%로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7월 EU 집행위 발표)되는 등 대공황 이후 가장 큰 경기침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코로나19의 경제 파급효과 최소화와 신속한 경제회복을 위해서는 개별 회원국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EU 차원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도입이 추진됐다. 또한 회원국별 코로나19 피해 정도와 재정여력에 따른 대응수준이 상이해 역내 불균형 심화 및 공정경쟁 훼손 등의 문제가 야기될 수 있으므로 EU 차원에서 균형 잡힌 지원을 통해 EU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코로나19 피해가 큰 남유럽 국가 중심으로 강하게 제기됐다. 아울러 EU 차원에서 운용 중인 예산 규모가 EU 전체 GDP의 약 1% 수준(약 1,700억유로)에 불과해 코로나19에 따른 심각한 경기침체에 대응하고 회원국의 경제회복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별도 기금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이 글에서는 EU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경제회복기금의 주요 내용과 논의 동향 그리고 시사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7,500억유로 기금 조성해 경제회복, 미래 위기 대비 지원
EU 집행위는 채권 발행을 통해 금융시장에서 7,500억유로(약 1천조원)를 저리로 차입해 기금을 조성하고, 3년간(2021~2023년) EU 예산 프로그램을 통해 코로나19 피해가 큰 회원국들을 지원할 계획이다. 7,500억유로 중 3,900억유로는 보조금으로, 3,600억유로는 대출 형태로 지원될 것이며, EU 경제회복, 그린·디지털 경제로의 전환, 공정하고 복원력이 강한 사회 건설 등에 투자될 예정이다. 구체적인 지원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회원국의 경제회복을 지원한다. 이를 위해 6,725억유로 규모(보조금 3,125억유로, 대출 3,600억유로)의 경제회복 및 복원력 강화 프로그램(Recovery and Resilience Facility)을 신설해 회원국의 경제·사회 복원력 제고와 그린·디지털 전환 등과 관련된 투자를 지원한다. 그리고 기존 EU 통합정책을 강화하는 ‘ReactEU’ 이니셔티브를 통해 475억유로를 증액 지원하고, 코로나19 피해 지역의 기후중립 전환에 따른 사회·경제적 영향 완화를 위해 조성되는 공정전환기금(Just Transition Fund)에 100억유로를 추가 지원한다. 또한 유럽농업농촌개발기금(EAFRD)을 75억유로 증액해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 생물 다양성, ‘팜 투 포크 전략(Farm to Fork; EU의 식품체계를 공정하고 건강하며 환경 친화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종합계획으로 지속 가능한 생산과 공급, 기후변화 대응 및 생물다양성 보전 등을 골자로 함)’ 등과 연계한 투자를 지원한다.
둘째, 민간투자 촉진을 통해 경제활력 제고를 지원한다. 이를 위해 EU 투자 프로그램인 ‘InvestEU’에 56억유로를 증액 지원해 지속 가능 인프라, 연구·혁신(R&I) 및 디지털, 중소기업, 사회적 투자 및 기술 등 관련 역내 프로젝트에 민간투자를 유인한다. 또한 전략적 투자 프로그램(Strategic Investment Facility)을 신설해 예산 지원을 바탕으로 민간투자를 창출함으로써 핵심 인프라, 그린·디지털 기술, 보건의료 등 분야의 EU 역내 공급망을 강화하고 EU 단일시장의 전략적 자율성을 제고한다.
셋째, 코로나19 사태의 교훈을 바탕으로 미래 유럽위기 대비를 지원한다. 이를 위해 EU 시민보호 프로그램인 ‘RescEU’에 19억유로를 추가 지원해 코로나19와 같은 대규모 비상사태에 대한 대비를 강화한다. 또한 보건 및 기후 관련 연구와 혁신을 위해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프로그램에 50억유로를 확대 지원한다.
기금 차입금은 회원국의 상환 부담을 분산하기 위해 2058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상환될 계획이며, 상환 재원은 회원국의 EU 예산 분담금 증액과 EU 세입 확충을 통해 마련될 예정이다. EU는 재활용 불가 플라스틱 폐기물 분담금(1kg당 0.8유로), 탄소국경세(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디지털세(digital levy), 항공 및 해양 부문으로 배출권거래제(ETS) 적용범위 확대, 금융거래세(financial transaction mechanism) 등을 통해 세입을 확충할 계획이다.
현재 EU의 엄중한 경제상황, 코로나19에 따른 회원국 간 불균형 심화, 회원국의 코로나19 대응 프로그램 종료 시 초래될 재정절벽, 역내 코로나19 재확산 우려 등이 EU 정상 간 합의 달성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당초 기금 규모, 보조금·대출 비중, 기금 지원방식 등 기금의 주요 사안에 대한 회원국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해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기금의 주요 수혜국인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은 EU 집행위의 7,500억유로(보조금 5천억유로, 대출 2,500억유로) 경제회복기금 구상에 찬성하면서 조속한 합의를 촉구했었다. 그러나 EU 예산 순기여국인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등 4개국(Frugal four)은 자국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기금 규모를 축소하고 보조금 대신 대출 지원(loans for loans)을 주장했으며, 기금 지원의 효율성 제고 및 수혜국의 도덕적 해이 방지 등을 위해 경제 구조개혁, 법치 존중 등과 연계해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EU 집행위가 제시한 기금 배분기준(2015~2019년 실업률, 1인당 GDP, 인구 규모)과 관련해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EU 집행위 배분기준을 적용할 경우 동유럽 국가들보다 부유하나 실업률은 더 높은 남유럽 국가들에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간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고, 많은 회원국은 2015~2019년 실업률과 같은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데이터가 아닌 코로나19의 실제 피해를 잘 반영하는 명확한 배분기준 설정을 요구했다.
회원국의 경제 구조개혁, 법치 존중 등을 전제로 지원
이에 따라 7월 정상회의에서는 당초 EU 집행위가 제시한 기금 규모는 유지(7,500억유로)했으나, 보조금은 축소(5천억유로 → 3,900억유로)하고 EU 예산 분담액 조정 메커니즘인 리베이트(rebates)를 확대해 관련 회원국의 예산 부담을 완화했을 뿐 아니라 기금 지원과 연계된 각 회원국의 경제 구조개혁 약속 위반 시 기금 지원을 중단할 수 있는 보완책을 마련함으로써 네덜란드 등 이견이 있는 회원국의 입장을 상당부분 반영했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한 회원국의 GDP 하락 수준을 기금 배분기준에 반영하는 등 기금이 실제 피해가 발생한 지역에 투입될 수 있도록 했으며, 회원국의 법치에 흠결이 발생한 경우 EU 집행위가 EU 이사회의 가중 다수결(qualified majority vote) 승인을 전제로 기금 지원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EU의 핵심 가치가 준수되는 곳에 시민의 소중한 세금이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EU가 추진하고 있는 세입 확충 방안 중 탄소국경세, 디지털세, 배출권거래제 확대 등은 한국을 비롯한 제3국 기업에도 적용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관련 논의와 법률 제·개정 등 진행상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사전에 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EU 집행위는 올해 3분기에 이해관계자 의견수렴을 거쳐 2021년 상반기에 선별된 분야에 탄소국경세 도입 법률안을 제안할 계획이다. 디지털세는 글로벌 도입을 위해 OECD 차원에서 2020년 말까지 국제적 합의를 추진 중에 있으며, EU는 연말까지 OECD 차원의 합의가 도출되지 않을 경우 2021년 상반기에 독자적으로 디지털세 도입을 추진할 예정이다. EU 집행위는 2018년 3월 디지털서비스 매출액에 3% 세율로 과세하는 디지털서비스세(Digital Services Tax) 법안을 제출한 바 있으나, 자국 내 다국적 IT기업 철수에 따른 세수 감소 등을 우려하는 아일랜드 등 일부 회원국의 반대로 2019년 3월 도입이 최종 무산됐으며, OECD 차원의 디지털세 글로벌 도입 논의에 적극 참여키로 했다. 또한 배출권거래제가 항공 및 해양 부문으로 확대될 경우 EU에 기항하는 국내 항공사와 선사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편 EU 경제회복기금은 유럽경제를 지속 가능한 성장 경로로 회복시키기 위해 그린·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에 중점 투자한다. 이에 따라 기후변화 대응에 기금의 30% 이상을 투입키로 했으며, 클린 기술(신재생에너지, 클린수소 등), 지속 가능 수송(전기차 충전소, 청정차량으로 전환 등), 건설·주택 리노베이션 등 유럽 그린딜에 대한 투자를 강화해 기후중립경제로의 이행과 함께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회복을 뒷받침할 것이다. 또한 5G 통신망 등 통신 인프라와 인공지능(AI), 사이버보안, 슈퍼컴퓨팅, 클라우드 등 전략적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정부와 민간이 보유한 데이터의 공유·활용을 촉진할 공동 데이터 공간(common data space) 구축 등 데이터경제 구현을 위한 지원을 강화할 것이다. 한국도 포스트 코로나 선도형 경제기반 구축을 위해 올해 3차 추경 예산에 디지털뉴딜과 그린뉴딜 사업을 3조8천억원 반영하는 등 한국판 뉴딜을 본격 추진하고 있는바, EU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EU의 그린·디지털 전환 정책을 활용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회 동의와 회원국 비준 절차 남아 있어···효율적 집행과 중장기 재정건전성 확보 노력도 병행돼야
EU 경제회복기금은 재정이 취약한 회원국(남유럽 중심)을 지원함으로써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개별 회원국의 확장 재정정책을 EU 차원에서 보완할 뿐만 아니라 유럽중앙은행(ECB)의 완화적 통화정책과 결합해 경제정책 효과를 제고하는 역할로서의 의미가 있으며, EU가 채권 발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을 회원국에 보조금으로 지원하는 최초 사례로서 회원국별 재정정책 체제에서 EU 공동 재정정책으로의 진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EU 경제통합의 마지막 단계인 재정동맹(Fiscal Union)을 위해서는 EU 기능조약 개정, 유로본드 발행, EU 중앙집권적인 거버넌스 권능 부여, 회원국 간 이해관계 조정 등 여러 선결과제가 해소돼야 할 것이다.
EU 정상 간 합의라는 큰 산은 넘었으나, 내년부터 EU 경제회복기금이 차질 없이 운용되기 위해서는 연내 유럽의회 동의가 필요하다. 또한 기금 차입금 상환을 목적으로 하는 회원국의 EU 예산 분담금 증액과 EU 세입 확충을 위해서는 EU 자체 재원 한도를 상향조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모든 회원국의 자국 헌법에 따른 비준을 통해 ‘EU 자체 재원에 관한 결정(Own Resources Decision)’이 개정돼야 한다. 즉 EU가 재정 주권을 보유한 개별 회원국으로부터 기정(旣定) 이상의 예산 또는 세입을 이전받기 위해서는 모든 회원국의 비준을 받아야 하며, 이 과정에서 회원국별 기금의 유·불리 판단이나 회원국의 정치 지형 등에 따라 비준이 지연되거나 진통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등 EU의 결속과 연대가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한편 EU는 코로나19 대응과정에서 재정준칙(재정적자 GDP 대비 3%, 국가채무 GDP 대비 60% 초과 금지) 적용을 유보하고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재정건전성이 코로나19 이전보다 크게 악화될 것으로 전망(GDP 대비 국가채무 2019년 79.4% → 2020년 95.1%)되고 있으며, 경제회복기금도 결국 장래에 상환해야 하는 부채다. 따라서 효율적인 기금 투자를 통해 지속 가능한 경제회복을 도모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장기 재정건전성 확보 노력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