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제12차 각료회의(12th Ministerial Conference)는 사실 언제, 어디서 열릴지 아직 미지수다. WTO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각료회의는 1995년 WTO 설립협정에 의거해 2017년 12월 열린 제11차 각료회의까지 2년마다 개최돼왔다. 이후 제12차 각료회의는 카자흐스탄 누르술탄의 혹한을 피하기 위해 2020년 6월로 계획됐다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연기된 바 있다. 일정과 장소는 여전히 WTO 회원국 사이에서 논의 중이며, 이르면 3월 초 개최되는 WTO 일반이사회(General Council)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현재로서는 올 연말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하는 방안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이처럼 개최 시기가 불투명한 상황임에도 WTO 회원국들의 관심은 온통 제12차 각료회의에 집중돼 있다. 학창시절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와야 눈에 불을 켜며 공부하듯이, 각료회의를 앞두고 현재 WTO 내에서 진행 중인 협상 및 각종 시급한 어젠다 등이 탄력을 받고 정치적으로 타협을 이뤄낼 가능성이 커지는 데다 지난 각료회의 이후 다소 시간이 경과해 미뤄놓은 과제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 제12차 각료회의는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수산보조금 협상 타결에 박차…전자상거래, 투자원활화 등의 논의도 진전
그간 WTO가 시장개방 및 새로운 통상규범 도입 등 다자간 무역협상 기능을 기대만큼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회원국들은 WTO의 적실성 회복이 중요하다는 인식하에 결과물 도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WTO 내 협상은 크게 전 회원국이 참여하는 수산보조금, 농업 등의 협상과 유사 입장을 가진 일부 회원국이 참여하는 전자상거래, 투자원활화, 서비스 국내규제, 중소·중견기업(MSMEs; Micro, Small and Medium–sized Enterprises) 등 공동성명 이니셔티브(Joint Statement Initiative)로 나눌 수 있다.
전 회원국이 참여하는 협상 중에서는 수산보조금 협상의 타결 여부가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 과잉 어획을 야기하는 수산보조금을 규율해 고갈 위기에 있는 수산자원을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을 달성하자는 목적을 가진 수산보조금 협상은 당초 타결 시한인 2020년 말을 넘긴 상황이다. 하지만 협상 의장이 2020년 12월 제2차 통합협정문 수정본을 제시하고 올해 들어 빡빡한 협상 일정과 함께 고위급(대사급) 협상도 병행하는 등 조속한 타결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공동성명 이니셔티브 또한 성과 도출이 기대된다. 첫째, 전자상거래 협상은 전자상거래를 통한 신규 무역규범을 제정하는 것으로, 지난해 말 통합협정문을 작성하고 2월 초 일부 분야의 협상을 완료하는 등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둘째, 투자원활화 협상은 각국의 투자 관련 조치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행정절차를 간소화·가속화하는 것을 목표로 지난해 9월부터 7차례의 협상을 통해 통합문서에 대한 1차적 논의를 마쳤다. 올해도 7월까지 10여 차례의 협상을 계획하고 있는 등 협상에 모멘텀이 붙은 상황이다. 셋째, 중소·중견기업 협상은 국제무역 활동 참여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중소·중견기업의 진출을 활성화하는 취지이며, 지난해 말 무역원활화·금융접근 등 7개 어젠다를 제시한 후 이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넷째, 서비스 국내규제 협상은 서비스 관련 국내규제를 명확히 기재해 교역장벽을 해소하고 투명성을 증진시키자는 의도이며, 기술적인 협상은 대부분 완료된 상황이다. 다만 이 협상에 반대하고 있거나 관망 중인 국가를 끌어들이고 현재 기술적으로 합의된 사항을 반영하는 등의 정치적 합의가 요구되고 있다.
다자간 협상과 관련해 새로운 분야의 협상 출범 여부도 관심의 대상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해 필수 의료용품 등의 자유로운 교역 및 인력이동을 다루는 ‘무역과 보건(trade and health)’, 기후변화·순환경제 등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는 ‘무역과 환경(trade and environment)’, 무역에서 여성의 경제적 역량을 강화하자는 ‘무역과 여성(trade and women)’ 등 새로운 분야의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다. 이 이슈들은 특히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분야로 알려져 있어 미국 통상정책의 세부 내용에 따라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의 새로운 통상정책에 따라 WTO 개혁 방향 구체화
협상 이외의 분야에서 단연코 관심이 집중되는 분야는 WTO 개혁 방향이다. 2018년 이후 WTO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된 가운데 현재 WTO 상소기구는 위원들의 임기 만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반대로 후임이 선출되지 못해 2019년 12월 이래 기능이 정지된 상황이다. 미국·일본·EU는 회원국들의 WTO 협정상 의무와 책임 이행을 촉구하며 투명성, 개도국 특혜, 산업보조금 등의 이슈를 제기한 바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의 의중이 중요해 미국의 새로운 통상정책 방향에 따라 개혁 방향이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국이 다자주의 체제 내에서 동맹·우방국과 공조할 계획임을 천명함에 따라 미국의 입장 변화에 대한 기대가 큰 상황이다. 다만 상소기구의 경우 미국 내에서 초당적으로 불만을 제기한 사항으로, 현재의 기능 정지 상황을 레버리지로 당분간 유지하면서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주도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조촐하게 기념하고 넘어가서 대부분의 사람은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WTO는 25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사람으로 치면 25세는 한창 신체가 왕성하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패기로 가득할 나이다. 그런데 WTO는 벌써 노쇠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러한 세간의 평가를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바로 제12차 각료회의다.
WTO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킬 신임 WTO 사무총장(나이지리아 출신 응고지 오콘조–이웰라)의 선출 및 미국의 다자무역체제 복귀 등 흥행의 요소는 모두 갖춰졌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제12차 각료회의에서 모두가 기대하는 대로 풍성한 성과 잔치가 펼쳐질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현실이 될지 지켜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