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신임 EU집행위가 출범한 이후 EU를 둘러싼 통상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신임 집행위는 그린딜과 디지털화라는 두 가지 상위 정책목표를 제시했고, 전대미문의 코로나19 확산 사태와 미국 대선, 중국의 부상 등은 EU 통상정책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요구하게 됐다. 이에 EU집행위는 수개월간의 통상정책 검토를 거쳐 지난 2월 18일 ‘An Open, Sustainable and Assertive Trade Policy’라는 제목의 EU 신통상정책을 발표했다. 전임 EU집행위는 지난 2015년 효과성(effectiveness), 투명성(transparency), 가치(values) 등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Trade for All’이라는 제목의 통상정책을 채택한 바 있다.
핵심 부품소재에 대한 대외의존도 낮추고
역내 생산 강화하는 산업정책 추진
EU 신통상정책의 첫 번째 키워드는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open strategic autonomy)’이다. 특히 ‘전략적 자율성’은 최근 EU가 발표하는 문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다.
지난해 초 코로나19가 유럽에서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EU는 마스크, 진단키트 등 의료용품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중국으로부터의 자동차 부품 공급이 중단되면서 자동차 공장의 조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에 EU 내부에서는 핵심산업 분야에서 해외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 위기에 대한 대처능력이 떨어지고 공급사슬이 붕괴될 위험이 크다는 반성이 있었으며, 역내 생산 확대와 공급선 다변화 등을 통해 공급사슬의 회복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형성했다. 이에 따라 최근 EU는 배터리, 반도체, 수소, 희소금속 등 핵심 부품소재에 대한 대외의존도를 낮추고 역내 생산을 확대하는 방향의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도 EU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방향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결국 전략적 자율성은 위기 상황에서도 EU가 타국에 의지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 일례로 지난해 말 EU는 중국과 포괄적 투자협정(Comprehensive Agreement on Investment) 타결을 앞둔 시점에서 미국 바이든 당선인 측으로부터 중국 견제를 위해 협상 타결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전략적 자율성 확보 차원에서 중국과 협상을 타결했다.
다만 전략적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자연스레 보호무역적인 조치들이 시행될 가능성이 큰 만큼, EU는 ‘전략적 자율성’ 앞에 ‘개방형’이라는 단어를 추가해 EU가 기본적으로 다자체제 중심의 개방적인 통상정책을 추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EU는 신통상정책을 발표하면서 상소기구 개혁방안을 포함한 WTO 개혁 제안서를 함께 발표했다. 이에 향후 미국 신정부 및 유사 입장 국가들과 협력해 다자체제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키워드는 ‘지속 가능성’이다. EU는 전통적으로 통상정책에 서도 환경·노동·인권·소비자보호 등의 가치를 중요한 요소로 고려해 왔다. 2011년 발효된 한·EU FTA를 시작으로 EU가 체결한 모든 FTA에는 환경, 노동 등을 규율하는 ‘무역과 지속 가능 발전(Trad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챕터가 포함돼 있으며, 신임 EU집행위에서도 2050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그린딜 정책에 드라이브를 거는 등 ‘지속 가능성’을 모든 정책의 핵심요소로 설정하고 있다.
EU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향후 모든 무역협정에 파리협정 준수 의무를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할 예정이며, 특정 산업의 탄소누출(carbon leakage; 기업들이 탄소배출 규제를 회피할 목적으로 배출 규제가 엄격한 국가에서 느슨한 국가로 생산기지를 이전해 결과적으로 한 국가에서 관련 규제를 도입하더라도 지구 전체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감소하지 않는 현상을 의미) 위험 방지를 위해 수입품에 대해 EU 역내 기업이 부담하는 수준과 동일한 부담금을 부과하는 방향의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도입을 위한 입법안을 올해 6월에 발표할 계획이다.
또한 기업들이 공급망 전 과정에서 인권, 환경 등을 침해하는 활동이 있는지 사전에 조사하도록 하고, 관련 사고 발생 시 책임을 묻는 내용의 공급망 실사의무(due diligence) 제도 도입도 준비하고 있다. EU는 2020년 7월 통상총국(Directorate-General for Trade) 내에 수석 통상감찰관(Chief Trade Enforcement Officer) 직위를 신설하고 관련 조직을 확대하는 등 향후 FTA 지속 가능 발전 챕터의 이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는 EU와 지속 가능 발전 챕터 이행과 관련한 분쟁을 겪기도 했지만 최근 2050 탄소중립 선언, 3개 ILO 핵심협약 비준, WTO 내 무역과 환경 논의 강화를 위한 제안서 제출 등 지속 가능성 확대를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향후 이 분야에서 지향점이 유사한 EU와의 협력 강화가 기대된다.
EU 역내 기업 보호 위한 적극적 대응조치 마련
세 번째 키워드는 ‘적극적 통상정책(assertiveness)’이다. 지난 4년간 EU는 통상 분야에서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 극심한 갈등을 경험했다. 미국과 EU는 에어버스-보잉 보조금 분쟁과 관련해 상호 간 보복관세를 부과했으며, 철강·자동차·디지털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무역분쟁을 지속했다. 또한 EU 역내 기업들은 중국 등 제3국 기업들이 국가보조금을 통해 비용 측면에서 불공정 경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EU가 역내 기업을 위해 공정경쟁 환경을 조성하고 제3국의 일방적인 조치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정책적 도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게 됐다.
EU는 역내 핵심 인프라, 기업, 기술 등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투자 심사제도(FDI screening)’를 도입했으며, 외국 보조금 수혜기업의 EU 시장 내 경쟁왜곡(가격, 기업인수, 공공조달 등)을 차단하기 위한 ‘역외 보조금 규제’를 올해 상반기 중에 발표할 계획이다.
또한 최근 무역 대응조치를 규율하는 시행규칙(enforcement regulation)을 개정해 WTO 상소기구 기능정지로 인해 최종판결이 나지 않은 분쟁 건에 대해서도 보복조치를 시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으며, 미국의 「무역법」 301조, 「무역확장법」 232조 등 상대국의 무역 관련 조치에 WTO 판결 없이도 곧바로 대응조치를 시행할 수 있는 내용의 통상위협 대응조치(anti-coercion measure)도 올해 안에 마련할 계획이다.
미국과의 무역분쟁, 코로나19 사태, 브렉시트 등을 겪으며, EU 내에서는 역내 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에 세이프가드, 반덤핑, 상계관세 등 무역구제 조치가 증가하고 있고, 역외 기업에 대한 보조금 심사도 엄격해지고 있다. EU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도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EU는 미국과의 통상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상황이다. 지난 3월 5일, 양측은 에어버스-보잉 보조금 분쟁과 관련한 양측의 보복관세 조치를 4개월간 유예하기로 하는 등 협상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또한 EU는 미국 측에 고위급 ‘통상기술협의회(Trade and Technology Council)’ 신설을 제안해 AI, 반도체, 데이터 등 핵심기술을 매개로 미국과 함께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다만 EU의 ‘전략적 자율성’과 미국의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모두 자국 산업 중심의 통상정책 기조인 만큼 양측의 협력이 어느 정도 진전될지는 향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한편 EU는 중국을 ‘경제적 경쟁자(economic competitor)’이자 ‘체제적 라이벌(systemic rival)’로 규정하며 중국의 급부상을 경계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난해 중국과의 교역 규모가 최초로 미국을 넘어서 1위 교역상대국이 되는 등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EU는 산업보조금, 강제 기술이전, 국영기업 문제 등에 있어서는 미국, 일본 등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한편, 중국에 진출한 EU 기업들의 이익 보호를 위해 EU·중국 포괄적 투자협정을 타결시키는 등 앞으로도 사안에 따라 견제와 협력을 병행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에의 과도한 의존성을 완화하기 위해 아프리카, 인도, 호주 등으로 FTA 네트워크를 지속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EU 통상정책 중 우리와 이해 일치하는 방향으로 협력 강화 필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EU는 앞으로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 지속 가능성, 적극성 등 3대 정책방향에 따라 통상정책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사안별로 EU의 통상정책이 구체화될 예정인데 우리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내용을 면밀히 파악해 대응해 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EU는 5억 명의 단일시장을 기반으로 개인정보보호규정(GDPR), 디지털세, 탄소국경조정제도와 같은 역내 규범을 글로벌 규범으로 확산시키려는 ‘룰세터(rule setter)’의 역할을 강화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EU의 통상정책 방향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EU는 우리나라의 3대 교역대상국이자 제1의 투자파트너이며, 한·EU FTA를 기반으로 경제협력을 심화시키고 있는 전략적 협력파트너다. WTO에서는 WTO 개혁을 선도하는 오타와 그룹(Ottawa Group)의 일원으로서 다자무대에서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올해는 한·EU FTA 발효 10주년을 맞는 의미 있는 해다. EU의 통상정책 방향 중 우리와 이해가 일치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양측 간 통상협력 관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