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신기후체제 이행 원년을 앞두고 지난해 말 WTO 체제에 작지만 중요한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무역과 환경 지속 가능성 협의체(TESSD; Trade and Environmental Sustainability Structured Discussions)’의 발족이 그것이다. TESSD는 WTO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과제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캐나다, EU, 스위스, 호주, 코스타리카 등 50개국이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해 지난해 11월 개시한 복수국 간 협의체다. 2016년 환경상품협정(EGA; Environmental Goods Agreement) 협상이 좌초된 이후 WTO 무역과 환경 위원회(CTE; Committee on Trade and Environment) 논의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지던 상황에서, 협의체의 발족은 그야말로 신선한 변화와 혁신의 바람이었다.
TESSD는 기후변화협약(UNFCCC; UN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과 같은 다자환경협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무역과 환경이 상호 호혜적 관계임에 주목하며, 무역정책을 통해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기여하겠다는 공동의 인식하에 결성됐다. 이러한 점에서만 보면 이 협의체가 기존 CTE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분별하기 쉽지 않다. 1995년 설치된 CTE 자체가 ‘다자 무역 체제’와 ‘환경 보호 및 지속 가능한 개발’ 사이의 조화를 모색하는 논의 채널이기 때문이다.
CTE의 기본 의제 틀은 정해져 있으며, 이 틀 안에서 회원국 간 정보를 교환하는 차원의 논의가 이뤄진다. 환경 조치가 시장접근에 미치는 영향, 지식재산권 협정과 환경, 다자무역체제와 환경부과금·세금 간 관계 또는 기술 규정·표준, 환경 마크 등과의 관계, 지속 가능한 개발 목적 달성을 위한 논의 등이 CTE 기본 의제 예시다.
시의성, 개방성, 전문성 등 지향하며
기존 무역·환경 논의서 한걸음 나아가
이처럼 무역과 환경의 연계라는 측면에서 대동소이해 보이지만, TESSD가 이전보다 한걸음 나아간 점은 시의성과 개방성, 전문성, 선진국과 개도국 간 균형 잡힌 정책을 지향한다는 데 있다. 먼저, 이 협의체는 신기후체제 도래에 발맞추고 제12차 각료회의(MC-12)를 대비한다는 점에서 시의성을 보여준다. 순환경제, 자연재해, 기후변화, 화석연료 보조금 개혁, 플라스틱 오염, 환경상품 및 환경서비스 무역 등 최근 WTO 회원국들 간 관심 의제로 논의되는 내용을 WTO 규범 틀 안에서 검토하겠다는 점이 바로 이를 방증한다. 이를 통해 차기 각료회의에서 무역과 환경 논의 진전을 적극 희망하는 국가들 간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내용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형식 측면에서도 변화를 모색한다. TESSD는 회원국들만의 정보 교환의 장이었던 기존 회의 형식에서 벗어나, 외부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독려하며 개방성을 지향한다. 업계, 학계, 시민사회단체 등 외부 이해관계자와의 체계화된 논의(structured discussion)를 통해 환경이라는 주제 특유의 과학과 사실에 기반한 전문성을 담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간 균형 잡힌 정책을 위한 노력을 배가하겠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1995년 CTE 설치 이후, 그간 논의는 개도국과 선진국 간 이견 대립으로 얼룩져 있었다. 대부분의 개도국은 선진국의 높은 환경 기준 및 일방적인 환경 규제가 개도국의 수출시장 접근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하면서, WTO가 다자간환경협정(MEAs; Multilateral Environmental Agreements)상 무역조치를 충분한 검토 없이 수용할 경우 또 다른 보호무역 조치로 남용될 우려가 있다는 견해를 주장해 왔다. 이에 반해 선진국들은 개도국들이 환경적 관점보다 무역편향적인 관점에 치우쳐 환경 목적에 기여하는 무역정책을 펼치는 데 소극적이라는 입장을 개진해 왔다. 이러한 측면을 감안해 공동 제안국들은 TESSD 발족을 위한 공동성명에서, 여타 국제기구들과 협력해 최빈개도국을 포함한 WTO 회원국들의 지속 가능성 목표 달성에 필요한 기술 및 능력배양을 지원하고자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발족한 TESSD의 첫 회의가 지난 3월 5일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출범 이후 협의체 참가국은 현재 53개국으로 확대됐는데, WTO 164개 회원국 중 약 3분의 1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출발부터가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평가된다. 참여국 구성을 보면 EU, 캐나다, 호주, 스위스 등 선진국뿐 아니라 코스타리카, 피지, 감비아, 콜롬비아, 칠레, 차드 등 개도국 및 최빈국도 망라하고 있어 균형 잡힌 논의가 기대된다. 실제로 협의체를 이끄는 공동조정국은 캐나다와 코스타리카로, 양국은 회의를 공동 주재하며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 조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여국 구성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메이저 플레이어들이 아직은 옵저버(observer) 지위로만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첫 회의에서 옵저버 국가들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의견을 개진한바, 향후 이들의 참여 가능성이 주목되는 상황이다.
그간 CTE 논의가 정체돼 있던 점을 생각하면 3월에 열린 TESSD
1차 회의는 제자리걸음만 하던 WTO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의미 있는 토론의 장이었다. 참여국들은 환경상품과 환경서비스 무역 자유화를 우선과제로 언급하며 이 분야 논의 진전을 도모하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외에도 탄소국경조정제도(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플라스틱 오염 방지 및 지속 가능한 플라스틱 경제, 화석연료 보조금 개혁 등 신기후체제 탄소중립 시대의 주요 테마들을 심도 깊게 논의했다.
1차 회의에서 우리나라는 호주, 싱가포르와 함께 환경상품 무역 자유화, 환경서비스 무역 자유화, 탄소국경조정제도 등 환경 관련 조치에 대한 WTO 차원의 검토와 협의 강화를 골자로 하는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이로써 향후 우리 관심 분야를 중심으로 논의를 주도할 기반을 마련했다. 우리가 선제적으로 협의체 논의를 주도한 것은, 지난해 탄소중립 선언을 계기로 WTO를 중심으로 하는 다자무역체제가 기후변화와 환경 논의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모두발언에서 환경 목표 달성을 위한 무역의 역할에 대해 주문하면서, 특히 기후변화 대응에 주목해야 하고 재생에너지와 같은 분야에서의 일자리 창출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사무총장의 발언은 신기후체제 시대에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인 WTO가 그 흐름에서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또한 사무총장은 협의체에서 환경상품 및 환경서비스 무역 자유화, 탄소제로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무역, 순환경제 활성화, 환경적으로 유해한 보조금 문제 해결 방안 등을 검토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와 같은 녹색경제로의 이행은 반드시 정당하고 공정(just and fair)해야 하며, 개도국 및 최빈국의 수출에 차별적으로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점 역시 강조함으로써 무역과 환경의 조화로운 지향점을 제시했다.
제1차 공식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TESSD는 올 연말 열릴 제12차 WTO 각료회의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 향후 3~5차례의 회의를 추가로 개최할 계획이다. 그간 WTO 논의에 미온적이었던 미국이 파리협정으로의 복귀 이후 TESSD 참여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 추가적인 회원국 확대와 함께 주요국들의 참여가 뒷받침될 경우 TESSD는 향후 무역과 환경 분야의 핵심 협의체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신기후체제 도래하며 WTO에서 TESSD의 역할 부각돼
지난해 WTO에 이와 같은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2021년 신기후체제의 도래와 무관하지 않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국제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극대화되면서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고, 110개국이 탄소중립을 선언하는 등 각국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그에 대한 대응이 가속화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그린시장의 선점 경쟁이 빨라지고,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파리협정 복귀로 신기후체제가 본격 가동되는 등 신기후체제는 바야흐로 ‘모두의 어젠다’가 됐다. 이러한 현실에서 WTO가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한 대응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적실성을 의심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WTO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구원투수로 등판해 올 3월부터 임기를 시작한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신임 사무총장이 TESSD의 의의를 특별히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친환경·저탄소 경제 시대, TESSD가 정체돼 있던 WTO에 앞으로 얼마나 큰 변화와 혁신을 가져올 수 있을지 향방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