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WTO 상소기구 기능 정지 이후 상소기구 신규 위원 선임은 여전히 답보 상태다. 모두의 눈은 정권이 바뀐 워싱턴을 향해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상소기구 개혁 이슈는 지난 16년간 다수 행정부에서 지속 제기돼 온 사안임을 강조하면서 상소기구 복원 이전에 분쟁해결기구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는 사이 지난 1년 반 동안 상소기구가 멈춰온 시간만큼 미해결 상태로 남은 개별 분쟁은 쌓여만 가고 있다(2021년 6월 기준 19건). WTO 분쟁해결기구의 ‘2심’을 담당하는 상소기구는 기능이 정지돼 있지만, ‘1심’인 패널 절차는 여전히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소기구 정상화를 위한 시도와 함께 ‘임시대안’을 통해 상소기구 공백기를 버텨나가고자 하는 회원국들의 노력도 병행되고 있다.
상소기구 임시대안으로 MPIA 마련···기능, 심리범위 등에서 기존 상소기구와 유사
이와 같은 노력의 연장선에서 마련된 제도가 ‘복수국 간 상소중재 임시약정(MPIA; Multi–party Interim Appeal Arbitration Arrangement)’이다. 이는 WTO 분쟁해결제도의 근간이 되는 ‘2심제의 틀’을 ‘현행 WTO 규범’하에서 고안한 방식이다. 즉 기능이 정지된 상소기구에 ‘상소’를 하는 대신 WTO 분쟁해결양해(DSU; Dispute Settlement Understanding) 제25조에 따른 ‘중재’를 활용해 ‘상소의 기능을 하는 중재(이하 상소중재)’를 하자는 대안이다. 2020년 1월 EU 주도로 논의가 본격화된 이후 2020년 4월 공식 출범하게 됐으며 EU, 중국, 호주, 캐나다 등을 포함해 현재까지 총 24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MPIA상 상소중재 절차는 상소기구를 임시로 대체하는 제도인 만큼 기존 상소기구 운영방식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먼저 MPIA는 상소기구처럼 상설화된 중재인단(pool of standing appeal arbitrators)을 운영한다. 총 10인의 중재인단은 각 참여국의 추천과 사전 선정위원회(WTO 사무총장, 일반이사회·분쟁해결기구 등 주요 의장 참여)의 선정 절차를 통해 지난 2020년 8월 구성됐다. 대체로 과거 WTO 상소기구 위원 후보, WTO 분쟁패널 경력자, WTO 근무 경력자(전 사무차장, 법률국장) 등으로 구성됐다. 이를 바탕으로 매 분쟁이 개시되면 중재인단에서 3명이 임의(random) 및 교대(rotation) 원칙에 따라 배정된다. 즉 기존 상소기구 위원 배정방식과 같다.
또한 MPIA상 상소중재는 기능 및 심리범위, 최종심으로서의 구속력 등에서도 기존 상소심과 유사하며, WTO DSU 제25조에 따라 판정 준수를 도모하기 위한 이행 및 보복 규정도 준용된다. 다만 MPIA는 상소중재 시 분쟁해결에 필수적이면서 당사국이 제기한 이슈만을 다룰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 심리 기한 준수를 위해 중재인에게 구두 심리 횟수 및 서면 길이 제한 등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그간 상소기구 개혁 논의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해 왔던 상소기구의 문제점인 심리 기한 미준수, 분쟁해결에 불필요한 부수적 의견 제시 등을 고려한 개선책으로 관측된다.
2020년 4월 MPIA가 공식 출범한 이후 향후 이 절차를 적용하기로 합의한 분쟁은 모두 4건으로, 브라질–캐나다 간 상용항공기 분쟁(DS522), 호주–캐나다 간 와인 판매 분쟁(DS537), 멕시코–코스타리카 간 신선아보카도 수입 분쟁(DS524), EU–콜롬비아 간 냉동 감자튀김 분쟁(DS591)이다. 다만 아직까지 실제로 상소중재 절차가 개시된 분쟁은 없으며, 현재 분쟁 진행 현황을 감안하면 멕시코–코스타리카 간 신선아보카도 수입 분쟁이 MPIA가 최초로 적용되는 사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MPIA상 상소중재 절차의 최초 적용을 앞두고 추가 고려돼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전담 사무국 설치다. 그간 7명의 상소위원으로 구성된 상소기구는 전담 사무국을 통해 분쟁 심리에 필요한 행정적·법률적 지원을 받아왔다. MPIA도 사실상 상소기구와 같은 상설화된 10명의 중재인단을 운영하게 되므로 원활한 역할 수행을 위해서는 전담 사무국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MPIA 참여국들은 이를 염두에 두고 WTO 사무총장에게 관련된 지원을 요청해 왔으며, 상소중재 절차의 최초 적용이 가시화될 경우 이에 맞춰 관련 절차에 대한 논의도 보다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MPIA에 대해 명시적 반대의사 보낸 미국···상소기구의 주요 문제 고착화 지적
그렇다면 그간 상소기구의 근본적 개혁을 강조해 왔던 미국은 상소기구 공백기의 임시대안인 MPIA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미국이 2020년 6월 WTO 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서한을 통해 WTO 회원국이 DSU 제25조에 따른 중재를 활용하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지지하나, MPIA[미국은 이를 ‘EU–중국 약정(EU–China Arrangement)’으로 표현했다]는 이를 넘어 상소기구의 잘못된 관행을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명시적인 반대의사를 전달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미국은 MPIA가 상소기구의 주요 문제를 고착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MPIA는 DSU 제25조상 중재 절차를 사실상 기존 상소기구와 유사하게 운영하도록 규정돼 있어 그간 제기된 상소기구의 문제를 답습하게 한다는 것이다. 가령 판정의 일관성(consistency)을 강조하면서 선례 구속(use of precedent)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바, 이는 MPIA의 중재인단이 분쟁해결 ‘조력자’로서의 기능을 넘어 사실상 ‘법정(court)’의 역할을 하도록 독려해 기존 상소기구의 문제를 또 다시 반복하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MPIA 참여국들이 개선책을 통해 미국 측의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했음에도 미국은 여전히 MPIA에 대해 기존 상소기구와 같은 우려를 갖고 있으며, 특히 ‘상소 절차를 담당하는 기구’의 역할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EU 등과 인식을 달리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은 MPIA 참여국들이 WTO 전체 차원의 자원을 사용할 근거가 없다고 강조한다. DSU 제25조는 중재 기능을 벗어난 ‘중재인단 마련 및 운영’에 대한 WTO 차원의 지원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은 MPIA 중재인단 선정도 MPIA 참여국들에 의해서만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MPIA는 그 참여국들만을 위한 제도로서, 참여국들이 WTO 의장단으로 하여금 중재인단 선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요구할 권한은 없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MPIA의 궁극적 목적은 상소기구 공백기에 분쟁해결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미래 상소기구의 모델을 선점하고자 함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MPIA가 적용될 것으로 예상되는 분쟁은 2~3개로 소수에 불과함에도 종합적인 틀을 구축한 데에는 중국, EU 등 여타 국가의 다른 의도, 즉 향후 분쟁해결기구 개혁 논의를 주도하겠다는 목적이 내포돼 있다는 것이다.
11월 예정된 WTO 제12차 각료회의에서 분쟁해결기구 개혁의 실마리 도출 기대
결국 미국은 MPIA가 WTO 전체 회원국의 총의를 반영한 제도가 아닌 일부 회원국의 입장에 국한된 제도이며 따라서 이는 향후 근본적 개혁 방향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시화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칫 EU, 중국 등 특정 국가 주도의 임시대안이 다수 국가의 지지를 얻어 영구적인 차선책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할 때, MPIA의 최초 적용이 현실화될 경우 여러 제반 행정 지원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MPIA 참여국 간 대립이 본격적으로 대두될 가능성도 상존한다.
우리나라는 그간 상소기구 개혁뿐만 아니라 임시대안 마련에도 기여해 왔다. 특히 2020년 1월 MPIA 논의 개시 및 이후 문안 마련 과정에 적극 참여해 상소기구 공백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려는 회원국들의 노력에 중지를 보태기도 했다. 비록 우리 당사자 분쟁 진행 상황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불참을 결정했지만, 여전히 전체 진행 동향을 적극 관찰하며 우리 국익을 극대화하고 전체 논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오는 11월 말에는 WTO 제12차 각료회의가 예정돼 있다. 이를 기회로 모든 회원국의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WTO 상소기구 공백기를 영구히 해결할 수 있는 WTO 분쟁해결기구 개혁의 실마리가 도출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