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무역개발이사회(Trade and Development Board)에서 우리나라는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로 구성된 그룹 A에서 선진국으로 구성된 그룹 B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1964년 UNCTAD가 창설된 이래 그룹 A에서 그룹 B로 이동한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무역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삼고 있는 유엔 기구에서 무역에 의존해 온 우리나라가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하게 된 첫 사례가 됐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리적·사회경제적 기준으로 4개 그룹으로 나뉜 UNCTAD
UNCTAD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워진 브레튼우즈체제가 개도국들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탈식민주의 물결 속에서 신생국이 늘고 있던 1960년대의 시대적 환경 속에서 탄생했다. 즉 세계은행, IMF, WTO의 전신인 GATT를 주축으로 하는 기존 국제경제체제만으로는 개도국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인식하에 무역과 투자가 개도국들의 경제발전에 더욱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체계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유엔 총회가 설립한 기구다. 1950~1960년대 ‘중심-주변(center-periphery)’ 종속주의 이론으로 유명했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경제학자 라울 프레비시(Raúl Prebisch)가 초대 사무총장이었으며, 그는 UNCTAD 초창기에 기구의 사상적 기틀과 활동방향에 큰 영향을 줬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UNCTAD는 오늘날 크게 3가지 방면의 활동을 하고 있다. 첫째, 글로벌화가 개도국 및 최빈국들에 보다 포용적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각종 연구를 수행한다. 예컨대 코로나19 사태가 저소득국 또는 소규모 취약국의 경제에 미치는 비대칭적 영향에 대해 국제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개도국 부채경감 등의 정책적 방안을 제언한다.
둘째, 개도국 및 최빈국 등을 대상으로 각종 정책 자문과 기술 지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개도국들이 투자협정을 체결할 때, 투자자–국가 소송(ISDS) 남용 등 과거 투자협정상의 문제점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체결할 수 있도록 조언한다.
셋째, 무역과 경제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국가 간 협의의 장을 제공한다. 물론 모든 회원국에 법적 기속력을 지닌 규범을 만드는 WTO에서의 협상과 달리, UNCTAD에서의 협상 결과물은 대부분 법적 기속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UNCTAD에서의 국가 간 논의는 국제사회의 정치경제 담론과 여타 국제기구에서의 규범 형성 과정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다.
UNCTAD 내에서의 정부 간 협의는 개별 국가 단위보다는 국가 그룹 단위로 진행된다. 이런 점에서 개별 회원국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WTO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964년 창설 당시 UNCTAD 회원국들은 지리적 기준과 사회경제적 기준을 기반으로 4개의 그룹으로 구분됐다. 그룹 A(아시아·아프리카), 그룹 B(선진국), 그룹 C(중남미), 그룹 D(동구권)가 그것이다. 그룹 B에는 유럽과 북미 선진국뿐만 아니라 아태지역 선진국인 일본·호주·뉴질랜드도 포함됐다. 최초 그룹 명부는 1964년 12월 UNCTAD를 창설한 유엔 총회 결의 1995(XIX)의 부속서에 명시돼 있으며, 그 후로 그룹 명부는 확대와 수정을 거쳐왔다. 그룹 A·B·C·D 제도는 본래 UNCTAD 집행기구인 무역개발이사회 의석수를 배분하는 기준으로 활용됐으나, 무역개발이사회에 대한 참여 자체가 개방화된 오늘날에는 무역개발이사회 의장단(Bureau) 내 의석수 배분의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UNCTAD에는 그룹 A·B·C·D와 별개로 G77, EU, 유라시아경제공동체(EAEU), 쥬스칸스(JUSSCANNZ) 등 협상그룹이 있다. 그룹 A·B·C·D가 지리적·사회경제적 기준으로 나뉜 그룹이라면, G77 및 쥬스칸스 등 협상그룹은 주요 사안에 대한 입장 간 유사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그룹이다. 특히 G77은 1964년 제1차 UNCTAD 총회에서 77개 개도국이 결성한 UNCTAD 내 최대 협상그룹으로서 오늘날 회원국 수는 130개가 넘으나, 역사적 상징성을 감안해 G77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룹 A 및 그룹 C 국가들로 구성된 G77은 UNCTAD에서 지금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는 UNCTAD가 개도국 권익증진을 목표로 하는 기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쥬스칸스는 호주, 일본, 미국, 스위스, 캐나다, 노르웨이, 뉴질랜드, 터키 등으로 구성된 비EU 유사입장국 그룹이며, 이들은 모두 그룹 B에 속해 있다. 유라시아경제공동체 그룹은 러시아가 주도하고 있으며, 쥬스칸스 또는 EU보다는 G77에 근접한 입장을 취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쥬스칸스 가입 우선 추진하며 UNCTAD에서 입지 강화해 나가
우리나라는 UNCTAD가 창설됐을 당시 그룹 A 및 G77의 일원으로 출발했으나,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 G77에서는 탈퇴했다. 그룹 A에는 계속 남아 있긴 했으나, 극소수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그룹 A 국가가 G77 회원이라는 점 때문에 우리나라가 그룹 A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다. 다시 말해 OECD에 가입한 이후 우리나라의 UNCTAD 내 입지는 상대적으로 취약해졌으며, 이런 상황은 최근까지 이어져왔다.
2019년부터 있었던 몇 가지 계기가 우리의 UNCTAD 내 지위에 변화를 가져오는 기폭제가 됐다. 첫 번째 계기는 2019년 10월, 앞으로 WTO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한 우리 정부의 결정이다. 무역규범을 협상하는 WTO에서 개도국 특혜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은 UNCTAD에서의 우리 정체성에도 일정한 시사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G77 탈퇴, 그룹 A 잔류’라는 애매한 상황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촉발했다. 마침 4년 주기로 열리는 UNCTAD 총회가 본래 2020년 10월에 열릴 예정이었다는 사실은 우리 정체성에 대한 이런 고민의 시급성을 더해 줬다.
우리 정부는 그룹 중심으로 운영되는 UNCTAD에서 입지를 강화하는 방안으로서 유사입장국 그룹인 쥬스칸스에 가입하는 방안을 우선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그룹 A에서 그룹 B로 이동하는 것은 전체 회원국의 동의를 요하는 사안인 데 비해, 쥬스칸스에 가입하는 것은 쥬스칸스 회원국들의 동의만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절차적으로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쥬스칸스 그룹을 상대로 교섭한 결과 우리나라는 2021년 1월 말에 쥬스칸스의 정식 일원이 됐다. 호주, 일본, 미국, 스위스, 캐나다 등 쥬스칸스 회원국들은 우리나라가 동참하게 된 것을 매우 환영했다. 우리나라는 G77 탈퇴 이후 지속돼 온 정치그룹 무소속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쥬스칸스의 일원으로 2021년 10월로 연기된 UNCTAD 총회 준비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쥬스칸스 가입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절차적으로 훨씬 까다로운 그룹 B로의 진출을 추진하는 계기가 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6월 중순 G7 정상회의 참석이 상징하는 정부의 선진외교였다. 때마침 그룹 변경 문제를 정식 의제로 삼는 연례 무역개발이사회가 G7 정상회의 직후인 6월 21일부터 2주간 개최될 예정이었고, 우리 정부는 그 계기를 활용해 개도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의 지위 변경을 추진했다.
그룹 간 이동을 시도할 때, 195개 회원국 중 한 국가만이라도 이에 반대하면 이동 자체가 어려워진다. 우리나라는 그룹 B로 이동한 첫 성공사례이긴 하나, 그렇다고 그룹 B로의 이동을 시도한 첫 사례는 아니다. 과거에도 그룹 B로의 이동을 시도한 사례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라고 해서 결과가 다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던 만큼, UNCTAD 내 모든 그룹을 상대로 지지 교섭을 해야 했다.
제68차 연례 무역개발이사회 마지막 날인 7월 2일에 대한민국의 그룹 B로의 지위 변경이 가결됐다. 우리나라의 선진국 그룹 진출이 신속하게 가결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2가지라고 본다. 첫째는 우리나라의 객관적 위상이다. 대한민국은 인구 5천만 명 이상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몇 안 되는 나라로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이탈리아 등 여기에 해당하는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그룹 B에 속해 있다. 또한 우리는 IMF에 의해 ‘선진경제’로, 세계은행에 의해 ‘고소득 국가’로 분류될 뿐만 아니라,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 23위, 세계경제포럼(WEF)의 글로벌 경쟁력 13위 국가로 상당수 그룹 B 국가를 앞지른다.
UNCTAD의 「2021년 세계투자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해외직접투자 순위는 9위다. 미국 경제지 『포춘』의 세계 500대 기업에 우리나라 기업이 14개 포함돼 있는데, 우리 이상을 가진 나라는 5개밖에 없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2020년 민주주의 지수에서는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등보다 앞선 2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글로벌 과제에 대한 적극적 기여, 우리의 지위 변경에 소중한 밑거름 돼
하지만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본다. 국제사회가 함께 직면하고 있는 글로벌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지속적으로 기여해 온 것도 매우 중요한 몫을 했다. 개도국 백신지원 메커니즘인 코백스(COVAX)에 대한 기여, P4G 정상회의 개최, 해외원조 확대 등 코로나19 사태, 기후변화, 개도국 경제회복이라는 세 가지 글로벌 과제와 관련한 기여외교를 펼쳐 왔다. 우리가 세계 각지에서 오랫동안 진행해 온 다양한 개발협력사업 등도 UNCTAD 회원국들의 동의를 확보하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우리 정부가 그동안 UNCTAD 사무국에 여러 전문가를 파견하고 이들이 다양한 개도국 지원활동을 해온 것도 이런 개발협력 사례에 포함된다.
우리 국민은 피땀 흘려가며 무역과 투자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뤄왔다. 무역을 통한 개발을 주목적으로 하는 유엔 기구에서 우리나라가 선진국 그룹으로 이동한 첫 사례가 됐다는 점은 우리 국민의 노력 그리고 그 결실이 그만큼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룹 B로의 이동을 교섭하는 과정에서 한 국가의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이 남을 도와주면서 개도국 지위를 졸업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더 많은 나라가 한국의 뒤를 이어 선진국 그룹으로 진입하게 되기를 바란다.” 앞으로 더 많은 나라가 우리처럼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 UNCTAD가 지향하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