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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EU의 디지털 유로화 도입 논의
안성근 주벨기에·유럽연합대사관 금융관 2021년 08월호


최근 현금 이용이 감소하면서 다수 선진국에서는 지급결제 시스템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현금의 백업 기능 약화가 우려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디지털상품 증가, 온라인거래 급증 등 경제의 디지털화가 진전되면서 지급결제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유로지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유로지역의 현금 이용률은 2016년 79%에서 2019년에는 73%로 하락했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이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중앙은행(ECB)이 2020년 7월 유로지역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0% 이상이 팬데믹 이후 현금 사용이 줄었다고 답했으며, 그중 90%는 팬데믹이 종료된 후에도 이러한 결제행태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아울러 비트코인 등 민간 암호화폐의 부상은 지급결제 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정화폐 체계에 도전하고 있어 각국이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특히 2019년 6월 페이스북의 리브라(Libra) 발행 계획 발표 이후 프랑스, 독일 등 EU 회원국들은 민간 디지털화폐의 부작용을 우려하며 대응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2019년 11월 EU이사회 의장국인 핀란드는 EU 의회에 ECB가 공공 디지털화폐(public digital currency) 발행 필요성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디지털 유로화가 갖출 요건으로 지급결제 시 효율성, 현금 대용성 등 제시
이러한 요청에 부응해 ECB는 2020년 1월 유로지역 회원국 중앙은행들과 함께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연구를 진행했고, 2020년 10월 디지털 유로화의 발행 필요성, 설계요건 및 원칙, 운영구조 등을 담은 포괄적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ECB는 이 보고서에서 중앙은행의 핵심 기능 및 EU의 정책 목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7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디지털 유로화의 필요조건을 도출했다. 시나리오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유럽 시민들에게 디지털 형태의 중앙은행 화폐를 공급함으로써 경제의 디지털화와 유럽경제의 자주성(autonomy)을 강화할 수 있을 경우, 현금의 지급결제 수단으로서의 역할이 심각하게 약화될 경우, 여타국의 중앙은행 화폐나 상업은행 예금 또는 전자화폐가 유로지역 내에서 교환의 매개가 되고 잠재적으로는 가치저장의 수단으로 활용될 경우, 유로화의 국제적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경우 등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통해 ECB는 디지털 유로화가 갖춰야 할 핵심 원칙으로 ①디지털 유로화는 전자적 형태의 유로화이므로 현행 유로화와 일대일로 교환돼야 하고, ②ECB와 유로지역 19개국 중앙은행으로 구성된 유로시스템(Eurosystem)의 부채이기 때문에 유로시스템이 발행하고 지급을 보장할 것이며, ③유로지역 전역에서 동등한 조건으로 이용 가능해야 하고, ④민간의 지급수단(solution)을 구축(crowd out)하지 않도록 시장 중립적으로 운용하는 한편, ⑤디지털 유로화 지급수단은 출범 초기뿐만 아니라 이후 전 기간에 걸쳐 사용자들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한다는 등 5가지를 도출했다. 아울러 디지털 유로화가 갖춰야 할 14개의 필요조건으로 지급결제 시 효율성, 현금 대용성, 여타 지급수단 대비 경쟁력 확보, 디지털 유로화에 대한 이자 지급 가능, 필요시 비유로지역 거주자들에 대한 디지털 유로화 사용 허용, 발행량 통제 가능, 보편적 접근성, 사이버 복원력 등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ECB는 법적인 이슈로 유로화를 디지털 형태로 발행 가능한지 여부를 검토했는데, EU 기능조약과 유로시스템 정관이 유로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EU 기능조약은 디지털 유로화의 법정화폐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으므로 지급결제 시 수취자들은 디지털 유로화 사용을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했다. 한편 디지털 유로화 시스템의 운영과 관련해서는 설계 및 발행과 관련한 핵심적인 부분(이자 지급, 익명성 보장, 인프라스트럭쳐, 발행모델 등)은 외부에 맡길 수 없으나, 유통 및 접근과 관련해 일부 실무적인 부분(화폐단위의 저장, 지급결제의 처리 등)은 유로시스템의 엄격한 감독하에 외부자원 활용(outsourcing)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 아울러 디지털 유로화의 운영시스템과 관련한 민간 부문의 참여 여부와 무관하게 디지털 유로화 서비스를 기반으로 해서 민간 부문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로 했다.

개인정보 보호가 디지털 유로화의 가장 중요한 필요요건으로 꼽혀
ECB는 이 보고서를 기초로 디지털 유로화에 대한 유럽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2020년 10월 12일부터 2021년 1월 12일까지 공개 의견접수(public consultation)를 실시했다. 그리고 지난 4월 공개 의견접수 결과를 정리해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가계와 기업이 수용 가능한 디지털 유로화의 특성, 구현 방식 등을 규명하는 첫 단계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디지털 유로화의 필요요건으로 일반인과 전문가 모두 개인정보 보호(privacy, 43%)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평가했고, 이어서 보안(security, 18%), 유로지역 내 보편적 사용(ability to pay across the euro area, 11%), 추가비용 없음(no additional costs, 9%), 오프라인 활용성(offline usability, 8%) 순으로 답변했다. 디지털 유로화의 발행 유형에 대해 일반인은 개인정보 보호에 초점을 맞춘 오프라인형에, 전문가는 개인정보 보호와 함께 신기술 도입 및 부가서비스 추가가 가능한 온·오프라인 복합형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상당수 응답자(약 40%)는 자금세탁, 테러자금 등 디지털 유로화의 불법적 이용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도록 익명성을 제한해 중앙은행과 중개기관이 사용자들의 디지털 유로화 거래내역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디지털 유로화를 기존 은행 및 지급결제 시스템과 통합해 공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답변했으며, 디지털 유로화가 단순 지급결제 외에 증권대금동시결제(delivery versus payment), 즉시결제(instant payment), 증권보관서비스(custody service) 등 다양한 부가서비스와 함께 제공되는 것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다. 적용 기술에 대해서는 디지털 유로화에 실물화폐와 유사한 특성(개인정보 보호, 오프라인 지급결제, 취약계층 사용 등)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 확보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일반인 응답자들은 전자지갑, 애플리케이션 등 소프트웨어적 기술을 사용하는 방법보다는 실물카드, 스마트폰 등과 같은 하드웨어적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을 더 선호했다.
다수의 일반인과 전문가는 디지털 유로화의 과도한 공급 및 유통이 경제에 충격을 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유액 상한(holding limit)과 차등적 사용료(tiered remuneration)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학계는 차등적 사용료 부과를, 금융기관 종사자는 보유액 상한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유액 상한과 사용료 부과를 위한 기본수준(tier 1)은 일반인의 소액결제 필요에 충분한 정도로 설정하고, 타인의 디지털 유로화 송금으로 수취인의 보유상한이 초과될 경우 초과분은 수취인이 보유한 다른 금융기관 계좌로 자동이체가 돼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디지털 유로화의 역외 지급결제 사용과 관련해서는 다수가 역외거래의 속도 및 비용과 환율 결정의 투명성을 핵심 가치로 선정했다. 또한 역외 사용 한도는 안정성과 보안성 확보를 전제로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디지털 유로화 발행 여부는 정책적 판단에 기반 둘 것
ECB의 디지털 유로화 도입 논의는 페이스북의 리브라 발행 계획이 촉발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발행이 빠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것이 더 큰 자극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테이블코인 등 민간 암호화폐 사용이 확산되는 가운데 디지털 위안화 등 여타 국가의 통화가 유로지역 내에서 대규모로 유통될 경우 유로지역의 통화주권 및 금융안정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다.
글로벌 중앙은행 협의체인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 1월 CBDC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중앙은행이 2017년 65%에서 2020년에는 86%로 크게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디지털 위안화의 경우 선전, 쑤저우 등 주요 도시에서 수차례 시범사용을 거쳐 올해 4월에는 홍콩 주민을 대상으로 역외사용 테스트를 실시하는 등 거의 상용화 단계에 다가서고 있다. 디지털 유로화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파비오 파네타 ECB 집행이사는 CBDC의 발행이 주변국 통화정책의 자율성에 비대칭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타국에 비해 더 빨리 발행함으로써 선도자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디지털 유로화의 발행은 유로화의 국제적 역할을 강화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EU 집행위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U 집행위는 2018년 말 유로화 출범 20주년을 맞이해 유로화의 국제적 역할 강화를 위한 로드맵을 제시한 바 있으며, 2019년 말 취임한 우르즐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유로화 역할 강화와 관련해서는 전임 집행위의 정책방향을 계승할 것임을 밝힌 바 있다. 유로화는 국제 준비통화(reserve currency)의 하나로서 디지털 형태로 발행될 경우 미 달러화 중심의 국제통화 시스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럽이 중국에 비해서는 다소 늦었지만 미국, 영국, 일본 등 주요 국제통화 보유국 중에서는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디지털 유로화가 실제로 발행될지 여부는 현시점에서 예단할 수는 없다. ECB는 지급결제 환경의 변화, 위험요소에 대한 평가 등에 기초해 디지털 유로화의 발행 여부를 결정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디지털 유로화의 도입은 기술적 요인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 판단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디지털 유로화의 발행은 국제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그 파급력에 따라서는 우리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는 큰 사건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도 지난해 2월부터 디지털화폐 전담조직을 신설하고 올해 디지털화폐 발행을 위한 파일럿 시스템 구축·테스트를 진행할 예정인 만큼 국제적인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향후 논의 동향을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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