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에서는 어떤 코로나19 대응 방안을 논의할까? 2020년 1월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를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Public Health Emergency of International Concern)로 선언하고, 이어 3월에는 전염병 대유행(팬데믹)으로 분류했다. 세계 각국은 코로나19에 맞서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방역태세 강화와 더불어 올해 들어서는 백신 개발 및 확보를 위한 각고의 노력을 거듭해 왔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코로나19라는 보건위기에의 대응이 국제무역을 관장하는 WTO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19 발생 초기부터 필수 의료용품 등 중요 상품·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과 공급망 보호, 그리고 이를 위한 국가 간 협력이 코로나19 대응에 필수적임을 인지해 왔다. 이것이 바로 자유로운 무역과 시장개방을 관장하는 WTO의 코로나19 대응 노력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다.
WTO 차원에서 코로나19 관련 상품 이동 및
공급망 확보 논의 필요성 제기
2020년 상반기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확산되면서 각국은 국경 간 이동을 차단하는 한편, 코로나19 관련 상품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지난 10월 초 기준 WTO가 파악한 각국의 수출 금지·제한 조치는 77개에 이르며, 그중 57개가 2020년 2~4월에 도입됐다. 조치들은 대부분 전면 수출 금지, 비자동수출허가(non-automatic export licensing schemes), 수출 제한 혹은 조건부 금지의 형태로서, 대상 품목은 개인보호장비(personal protective equipment) 외 소독제, 의약품, 다양한 의료물품, 인공호흡기를 포함한 의료장비까지 아우른다.
수출 제한 조치가 도입되자 코로나19 취약국과 해당 용품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국가들은 코로나19 확산 대응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이에 WTO 차원에서 코로나19 관련 상품의 이동 및 공급망 확보를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고,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제안서 중 하나가 WTO 내 개혁 소그룹인 오타와 그룹이 2020년 12월 WTO 일반이사회에서 최초 회람한 ‘무역과 보건 이니셔티브’다. 우리나라도 공동제안국으로 참여 중인 이 이니셔티브는 필수 의료용품의 원활한 이동과 공급망 확보를 목적으로 불필요한 수출 제한 자제, 무역원활화 조치 모범사례 공유, 투명성 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오타와 그룹에 참여하지 않는 여타 회원국들의 공동제안국 참여가 확대되면서 현재 관련 논의가 무역과 보건 이니셔티브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코로나19 백신 생산 확대 방안으로
‘무역 관련 지재권의 일부 면제’ 제안
다만 개별 국가의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수출 제한 조치는 WTO에서 금지된 조치는 아님을 염두에 둬야 한다. WTO 회원국들은 1994년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20조(일반적 예외) 등을 원용해 공중보건 보호를 위해 필요한 무역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실제로 상당수 회원국은 자국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1994년도 GATT 제20조 (b)호(인간, 동물 또는 식물의 생명 또는 건강 보호) 및 제11조 제2항 (a)호(수출 체약국에 불가결한 산품의 위급한 부족 방지 또는 완화를 위한 수출 금지 또는 제한)를 근거로 제시했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WTO 회원국을 차별하지 않아야 하고, 국제무역에서 위장된 장벽이 돼서는 안 된다.
한편 각국은 코로나19 관련 용품에 대한 접근 가속화와 확대를 위해 무역원활화 조치도 도입해 왔다. 2021년 6월에 발표된 「G20 무역조치 관련 WTO 보고서[Report on G20 Trade Measures(Mid-October 2020 to Mid-May 2021)]」에 따르면, 코로나19 발생 이후 G20 국가가 취한 코로나19 관련 무역정책 가운데 무역제한적 조치의 비중은 28%인 반면 무역원활화 성격을 갖는 조치는 72%에 이르며, 이러한 조치의 약 60%가 관세·수입세의 철폐 및 인하 형식으로 실시됐다. WTO 내 코로나19 대응 관련 논의에서 여러 국가가 코로나19 대응 방안으로서 무역원활화가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예측 가능하고 간소화된 통관 및 국경 절차 마련을 위한 무역원활화협정(Trade Facilitation Agreement) 이행을 촉구해 오고 있다.
지난해 말 코로나19 백신이 성공적으로 개발된 이후, 백신은 코로나19 대응의 게임 체인저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신 수급불균형으로 인해 특히 개도국에서는 필요한 백신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백신에 대한 공평한 접근 문제가 발생했고, 이는 WTO에서도 큰 현안으로 제기돼 왔다. 결국 전 세계의 백신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백신 생산이 확대돼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WTO 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백신 생산 확대 방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인도와 남아공이 최초 제안하고 현재 약 64개 개도국이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하고 있는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의 일부 면제(TRIPS waiver)’ 제안이다. 이 제안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보건상품 및 기술에 대해 최소 3년간 특허권·저작권·산업디자인·영업비밀 보호 관련 의무를 면제하고, 일반이사회의 종료 결정 시까지 면제를 적용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지난 5월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선진국으로는 처음으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지식재산권 면제 지지 입장을 표명한 이후, 6월 중순 텍스트 기반 협상이 개시됐다. 하지만 백신 개발 등의 혁신을 위해 지식재산권 시스템이 보호돼야 한다는 여타 선진국과 백신·치료제 등 생산 확대를 위해 지식재산권 일부 면제가 인정돼야 한다는 개도국 간 이견이 지속되면서 논의에 진전은 없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EU는 지식재산권 면제까지는 아니더라도 TRIPS 협정의 강제실시권 사용 기준을 완화함으로써 개도국들의 지식재산권 접근을 보다 용이하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지난 2월 15일 자신의 사무총장직 수임발언에서 의료용품 생산 확대를 위해 다자주의 틀 안에서 기술이전과 자발적 라이선스 계약을 촉진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한 바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는 백신 제조업체들이 개도국과 자발적 라이선스 계약 체결을 통해 백신 생산에 필요한 기술을 이전해 주는 방안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WTO는 코로나19 백신 생산 확대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백신 제조업체 및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간담회 및 고위급대화 등을 각각 4월 14일과 7월 21일에 주최했다. 앞서 언급한 지식재산권 일부 면제 제안은 WTO 협정 규범을 변경하는 것인 만큼 일부 회원국의 반발을 피할 수 없었지만, ‘제3의 길’은 기존 WTO 틀 내에서 추진된다는 점에서 회원국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4년 만에 열리는 제12차 WTO 각료회의···
코로나19 대응 방안 마련 노력
WTO의 코로나19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한 상기 회원국들의 노력과 더불어 WTO는 자체적으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코로나19 대응 관련 투명성 강화를 위해 지난해 6월 말 회람된 제23차 「G20 무역조치 관련 WTO 보고서」부터 코로나19 관련 회원국 조치를 포함했으며, 분야별 혹은 주제별 자체 분석 보고서도 꾸준히 작성해 왔다.
WTO는 코로나19의 전방위적 영향에 효과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국제기구 간 협력에도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19 관련 상품의 이동 촉진과 개도국 대상 금융·무역 지원을 목적으로 IMF·WB·WHO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활동 중이다. 지난 6월에는 WHO 및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와 코로나19 관련 정보 제공을 위한 워크숍 개최 등에 합의한 바 있으며, 9월 27일 기술이전을 주제로 워크숍을 개최했다.
오는 11월 30일부터 12월 3일까지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제12차 WTO 각료회의는 약 4년 만에 열리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첫 각료회의다. 회원국들은 코로나 시대에 WTO의 적실성을 제고하기 위해 이번 각료회의 성과물로 WTO의 코로나19 대응 방안이 채택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만 선진국과 개도국 간 보건 이슈를 둘러싸고 이견이 계속되고 있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인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WTO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회원국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에 대한 최종 결과물은 제12차 각료회의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