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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EU의 향후 팬데믹 대응 정책방향
정준섭 주벨기에유럽연합대사관 보건복지관 2022년 04월호

 

코로나19가 발견되고 확산된 지 2년이 더 지났다. 코로나19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 세계에 유례없는 충격을 줬다는 점이다. 지난 3월 초를 기준으로 전 세계 누적 확진자는 4억4,500만 명에 달하고 누적 사망자는 600만 명에 이른다. 코로나19의 충격은 튼튼한 의료안전망을 갖춘 EU 회원국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 인력이 요양시설을 소독하는 과정에서 노인들이 죽어 있거나 침대에 방치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 내용은 2020년 3월 24일 유로뉴스(Euronews)에 실린 기사의 한 부분이다. 기사 내용만 보면 후진국 또는 개도국에서 일어난 일로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이 기사는 대표적인 선진국인 스페인에서 코로나19 발생 초기에 벌어진 일을 다룬 것이다. 

의료시스템 잘 갖춘 EU 회원국들, 코로나19 초기 대응에선 한계 드러내

EU 회원국의 의료보장시스템은 회원국별로 운영되고 있으며 국가 간 편차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회원국들은 높은 수준의 의료 접근성, 질 높은 의료서비스, 낮은 본인부담률 등 효율적인 의료보장시스템을 구축해 왔다. EU 회원국들의 평균 기대여명은 81.3세(유로스타트, 2019년 기준)로 전 세계 평균 기대여명 73.4세(WHO, 2019년 기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영아사망률은 출생아 1천 명당 3.4명(유로스타트, 2019년 기준)으로 전 세계 평균 영아사망률 29명(WHO, 2019년 기준)에 비해 매우 낮다. 이러한 양호한 건강지표에도 불구하고 EU의 GDP 대비 보건의료지출은 평균 8.3% 정도로 미국(16.8%), 일본(11%), 영국(10.2%)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OECD, 2019 기준)에 머무르고 있는 등 EU 회원국들이 전반적으로 비용효과적인 의료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의료보장 강국인 EU 회원국들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3월 6일 기준 EU 지역의 누적 확진자는 8,972만8,118명으로 전 세계 누적 확진자의 20.3%를 차지하고 있고, 누적 사망자는 45만8,248명으로 전 세계 누적 사망자의 7.7%에 이른다. 효과적인 의료보장시스템을 갖춘 선진국으로서는 예상 밖의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EU 지역은 코로나19 확산 이전에는 감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지 않았다. 감염병 발생에 따른 확진자 동선 추적, 밀접접촉자 격리 조치 등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대규모 환자 발생에 따른 체계적 의료시스템도 충분히 준비돼 있지 않았다. 코로나19 발생 초기 마스크, 보호복 등은 턱없이 부족했고, 의료장비 및 병상의 부족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2020년 4월 7일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Politico) 유럽판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는 EU 회원국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EU 회원국의 정상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마스크와 기본 의약품의 원료조차 만들지 못하는 자국의 무능력이었다. 의료인들이 보호복을 구하지 못해 쓰레기봉투를 입고 있는 모습은 세계 공급망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개별 회원국 차원의 초기 대응에 한계가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EU 차원의 초기 대응에도 많은 문제점이 지적됐다. 코로나19 발생 초기 많은 EU 회원국은 급속한 코로나19 확산에 당황해 국경을 봉쇄하고 마스크, 의료장비 등 필수 의료물품의 수출을 제한하는 조치를 도입하는 등 코로나19에 공동대응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보건정책 권한의 상당 부분이 회원국 소관으로 돼 있기 때문에 더욱 부각된 측면이 있다. 

감염병 대응과 관련해 EU 차원의 공동대응 노력은 코로나19 발생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시도돼 왔다. 신종 감염병 출현 등에 대응하기 위해 2004년 유럽질병예방관리센터(ECDC; European Centre for Disease Prevention and Control)를 설립했고, 감염병 조기경보대응시스템(EWRS; Early Warning and Response System) 등을 통해 공동감시활동 등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ECDC는 회원국 간 이견을 조정할 권한이 없는 등 코로나19 대응 초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EU 차원의 보건위기 대응 전담기구 ‘HERA’ 2021년 신설

회원국 간 갈등 및 혼선을 해소하고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EU 회원국 정상들은 코로나19 공동대응, 대규모 경제회복 대책, 원활한 국경이동 촉진 등에 대해 합의하고 추진해 왔다. 보건정책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공동대응은 코로나19 백신 확보 대책이었다. 2020년 6월 EU는 백신전략(EU Vaccines Strategy)을 발표하고 유망한 백신의 개발을 지원하는 한편, 개발 이전부터 우선구매 방식을 활용해 백신을 조기에 확보했다. EU 회원국들은 현재까지 화이자 백신 24억 도즈 등 8개 백신 회사와 최대 42억 도즈 규모의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EU는 발 빠른 백신 확보에 이어 코로나19 치료제전략(EU Strategy on COVID-19 Therapeutics)을 통해 유망 치료제 10대 목록을 발표하고 공동구매를 추진하는 등 치료제 확보에도 나서고 있다. 아울러 코로나19 초기 극심한 부족현상을 보였던 마스크, 보호복, 보호장갑 등 개인보호장비에 대해 EU 차원의 비축사업을 확대하는 등 팬데믹에 대한 공동대응 능력을 확충해 왔다.

EU는 역내에서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기 위한 회원국 간 합의도출에도 주력했다. 우선 EU 회원국의 역학 상황에 따라 색깔을 부여(녹색, 주황색, 적색, 진한 적색)하는 분류체계를 도입해 역학 상황을 고려한 방역조치 적용이 가능하도록 했고 회원국들이 여행자에 대해 EU 공통의 승객위치확인서(passenger locator form)를 도입하도록 했다.

백신접종이 시작된 이후 EU는 회원국 전체에 통용되는 접종증명서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이는 2021년 7월부터 시행됐다. EU의 전자 코로나19 증명서(EU Digital COVID Certificate)는 EU 회원국 전체에서 사용이 가능하며 EU 주변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와 증명서 상호인정이 추진되고 있다. 

한편 EU 권역 내 확진자에 대한 동선 추적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주요한 이슈였다.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접촉 사실을 통보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의 개발은 사생활 보호라는 기본적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반대에 직면했다. EU는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우선하는 원칙을 채택했으며, 익명성에 기반한 블루투스 근접 기술을 이용해 자발적으로 앱을 설치한 사람들에게 확진자와 접촉한 사실을 통보해 주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회원국 간에 연동되도록 했다. 

EU는 미래 보건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 11월 유럽보건연합(EHU; European Health Union) 구성 계획을 발표했고 구체적 실행을 위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EHU의 핵심 목표는 보건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EU 보건시스템의 복원력을 제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EU 차원의 보건위기 개입, 역학상황에 대한 공동 감시 및 위기분석, 진단검사 및 동선 추적 개선, EU 차원의 준비태세 강화 및 회원국 간 조율 강화, 필수 의약품 및 의료장비의 공급 안전성 확보를 정책방향으로 설정했다. EHU 추진과 관련해 EU는 현재까지 보건위기 대응 전담기구 신설, 유럽의약품청(EMA) 및 ECDC의 기능 강화, 유럽의약품전략(Pharma-ceutical Strategy for Europe) 추진 등의 주요 정책을 발표
했다. 

미래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정책은 EU 차원의 보건위기 대응 전담기구 신설이라고 할 수 있다. EU의 보건위기 대응 전담기구 신설 계획은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2020년 정책연설에서 처음 발표됐고, 보건비상대응기구(HERA; Health Emergency Preparedness and Response Authority)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9월 16일 설립됐다. 

HERA는 미국의 첨단바이오의약품연구개발국(BARDA; Biomedical Advanced Research and Development Authority)의 기능과 역할을 참고해 설립됐는데, 향후 수행할 핵심적인 기능으로는 ①백신 등 의료적 대응수단의 개발·생산·구매·비축, ②보건위기 대응을 위한 정책 조정 및 산업계 등 이해관계자 협력, ③글로벌 보건위기 공동대응 등이 제시되고 있다. HERA의 기능은 현재 ECDC 및 EMA에서 수행하지 않고 있는 새로운 기능을 중심으로 설정됐고, 이에 따라 EU 차원의 보건위기 대응 권한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보건위기 상황에 대비해 정부·의료계·산업계 간 긴밀한 협력관계 구축할 필요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전 세계 국가들이 백신 개발 및 확보를 위해 경쟁을 벌인 바 있다. 미국의 BARDA에 이어 EU가 HERA를 설립함에 따라 강대국의 백신 개발을 위한 투자 및 백신 확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글로벌 백신허브화 추진단을 설립해 백신 개발 및 생산역량 확충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향후 이러한 기능을 더욱 확대해 미래 보건위기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 보건당국과 EU의 HERA 및 미국 BARDA 간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글로벌 공동대응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EU는 HERA 설립을 계기로 보건위기 상황에서 보건·정치·경제 등을 감안한 종합적 판단이 가능하도록 의사결정 체계를 개선하고 있다. 보건위기 사태가 선포될 경우 EU 집행위와 회원국이 참여하는 보건위기위원회(Health Crisis Board)를 설치하는 한편, 각 분야 집행위원이 참여하는 조정위원회를 설치해 정무적 조정(political steering)이 가능하도록 제도화했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 메르스 등의 경험을 토대로 보건위기 상황에서의 의사결정 구조를 지속적으로 개선해 왔으며, 이번 코로나19 대응에서도 큰 성과를 도출한 바 있다. 

감염병 등 보건위기 상황에서는 정부의 힘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으며, 민간 의료기관 등 의료계, 제약 기업 등 산업계와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EU는 HERA 설립과 함께 공동산업협력포럼(Joint Industrial Cooperation Forum)을 설치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역시 현재의 협력관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제도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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