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제12차 각료회의(MC-12)가 지난 6월 12일부터 6일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됐다. 2017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제11차 각료회의가 개최된 지 약 5년 만이다. 그간 WTO 각료회의는 코로나19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계속 연기됐고, 다뤄야 할 현안도 누적돼 왔다.
이번 각료회의의 의제 중 하나는 전자적 전송물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무관세 모라토리엄의 연장 문제였다. 이 모라토리엄은 디지털산업이 발전하면서 1998년 WTO 제2차 각료회의 전자상거래 선언의 일부로 채택됐고, 매 각료회의마다 지속적으로 연장돼 왔으나, 최근 각료회의에서는 모라토리엄 연장에 대한 입장이 선진국과 개도국 간 첨예하게 대립돼 왔다.
모라토리엄의 정의·범위·영향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 첨예하게 대립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은 모라토리엄의 연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며, 모라토리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모라토리엄의 정의, 범위 및 영향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모라토리엄의 정의에 대해서는 상품 외에 서비스도 전자적 전송물에 해당하는지, 그리고 범위에 대해서는 전자적 전송물 자체만 포함되는지 아니면 영화, 음악 등 콘텐츠도 포함되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이들 국가는 주장한다.
모라토리엄의 연장을 지지하는 회원국들은 전자적 전송물에 상품 및 서비스가 모두 포함되고, 전자적 전송물 자체뿐만 아니라 콘텐츠도 당연히 포함된다면서 모라토리엄의 범위를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반면 개도국들은 개도국이 주로 콘텐츠를 수입하는 입장인 점을 고려해, 모라토리엄의 정의 및 범위를 가능한 한 좁게 해석해 모라토리엄의 영향이 미치는 분야가 축소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모라토리엄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특히 대립되는 의견이 많다. 인도, 남아공 등은 모라토리엄이 개도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먼저 모라토리엄으로 인해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관세 부과가 제한되면서 개도국의 세수 손실이 막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컨대 모라토리엄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적 연구를 해온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라슈미 방가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2019년 보고서 「전자적 전송물 무역 확대가 개도국에 미치는 영향(Growing Trade in Electronic Transmissions: Implications for the South)」에서 모라토리엄으로 야기된 세수 손실 80억 달러 중 선진국들의 세수 손실은 2억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그는 3D프린팅, 인공지능(AI) 등 첨단 디지털산업이 성장하면서 모라토리엄으로 무관세 처리돼 세수 손실을 야기할 수 있는 산업의 규모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인도와 남아공은 모라토리엄으로 정책 선택의 폭이 좁아지면서 개도국의 정책적 재량이 침해받고 있다고도 주장한다. 이로 인해 국내적으로는 개도국의 디지털 산업화 진전에 제약이 생기고, 세계적으로는 개도국 기업들의 디지털시장 참여가 어려워진다는 입장이다.
스리랑카, 파키스탄, 네팔, 인도네시아 등도 인도와 남아공의 입장을 지지하며 모라토리엄의 연장에 유보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한편 최저개발국(LDC)들을 비롯한 여타 개도국은 모라토리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현실적으로 모라토리엄의 연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개도국들의 어려움을 고려해 디지털 이슈에 대한 개발 측면에서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했고, 논의해야 할 이슈로 인터넷 접근성 개선, 모바일 결제 등 디지털 금융시스템 강화 등을 제기해 왔다.
개도국은 세수 손실 우려,
미·EU 등은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 강조
한편 미국, EU, 캐나다, 호주, 일본, 스위스, 한국 등 전자상거래에 우호적인 회원국들은 모라토리엄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을 근거로 들며 모라토리엄의 영구화를 지지하고 있다.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도 전자상거래를 통해 비대면 경제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고, 모라토리엄은 안정적인 전자상거래 환경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이론적 그리고 경험적 측면에서 모라토리엄을 통해 기업과 소비자의 비용부담을 완화할 수 있고, 세계경제 전체적으로는 사중손실(deadweight loss)을 최소화할 수 있다. 모라토리엄을 지지하는 회원국들은 이러한 경제적 혜택이 모라토리엄이 야기할 수 있는 세수 손실을 크게 상쇄한다는 입장이다. 세수 손실은 부가가치세(VAT), 소비세 등 내국세를 통해서 보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탐색해야 한다고 본다. 한편 OECD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 「3D프린팅과 국제교역(3D Printing and International Trade: What is the Evidence to Date?)」에서 3D프린팅산업이 성장할지라도 개도국의 세수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모라토리엄을 지지하는 회원국들은 WTO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거론한다. 모라토리엄은 WTO에서 유일하게 합의된 전자상거래에 대한 규범이다. 2019년부터 전자상거래 분야에서 복수국 간 협상이 진행 중이나, 아직 협상이 어떠한 방향으로 타결될지, 그리고 협상 결과가 어떻게 WTO 체제 내에 편입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만약 모라토리엄이 중단된다면 WTO의 유일한 전자상거래 규범이 없어지는 것이고, 이는 전자상거래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WTO가 규범 마련을 위한 다자체제로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신뢰성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90여 개의 전 세계 상공단체가 모라토리엄 연장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처럼 의견이 양분화되고 있음에도 일단 이번 각료회의에서는 치열한 논쟁 끝에 모라토리엄을 차기 각료회의까지 연장하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단, 2023년 12월 개최될 예정인 차기 각료회의가 만약의 경우 2024년 3월까지 개최되지 못한다면, WTO 일반이사회 또는 각료들이 별도의 모라토리엄 연장 결정을 취하지 않는 이상 모라토리엄은 종료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과거에는 모라토리엄이 단순히 차기 각료회의 때까지 연장된다고 언급하는 데 그쳤지만, 이번 결정에서는 인도와 남아공의 의견을 일부 반영해 각료회의가 예정대로 개최되지 않으면 모라토리엄이 종료될 수 있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또한 개도국들의 의견을 반영해 모라토리엄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를 하고,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에서 특히 개발 측면에 대한 논의를 강화하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다음 각료회의까지 모라토리엄이 연장됐다고 마냥 안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에서 모라토리엄의 정의, 영향 및 범위에 대한 논의에 진전이 없고, 개도국들이 희망하는 개발 측면에 대한 논의가 내실 있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차기 각료회의에서도 모라토리엄의 연장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이 다시 벌어질 것이다.
우리나라는 모라토리엄 영구화 지속적으로 지지···
개도국의 우려 불식시키는 노력 필요
모라토리엄에 대한 논의는 실제로 우리나라의 전자상거래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도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거래가 활성화됐고 전자상거래시장도 크게 성장했으며, 이러한 시장 형태에 공급자와 소비자가 점차 익숙한 모습을 보이면서 팬데믹 상황이 종식된 후에도 전자상거래 또는 디지털 교역 분야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만약 우리가 현재 관세 없이 온라인을 통해 여타 국가로 공급 및 소비하는 상품·서비스에 관세가 부과되는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지금처럼 거래가 활성화될 수 있을까? OTT 플랫폼을 통해 영화, 음악 등 디지털 콘텐츠가 국경을 초월해 온라인으로 활발하게 거래되고 디자인, 컨설팅 등도 전자적 전송물 형태로 국경 간에 간편하게 이동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생산한 디지털 콘텐츠의 해외 수출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한국 정부는 다자적 측면에서 일반이사회 결정으로든지, 복수국 간 협상 측면에서든지 모라토리엄 영구화를 지속적으로 지지해 왔다. 다만 각료회의 협상과정에서 모라토리엄을 우려하는 회원국들의 의견을 반영해 차기 각료회의까지 연장하는 관행이 축적됐을 따름이다. 모라토리엄의 영구화를 위해서는 개도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도국도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를 통해 자국 산업이 발전하고 소비자들이 혜택을 받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산업을 보호할수록 경쟁력이 약해지고, 과감하게 개방하거나 개방의 폭을 크게 하면 경쟁력이 강해진다’라는 명제는 이 분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경제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자상거래가 강한 국가의 모범사례를 찾는다거나, 아니면 디지털 거래를 통해 세계시장에 진출한 개도국의 중소기업 및 창업가의 경험을 청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향후 우리나라도 모범사례를 축적해 양자적 측면에서 활발한 설득 노력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