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이 진정한 유럽혁신의 산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바이오엔테크는 지난 10년 동안 900만 유로 이상의 EU 연구자금을 지원받아 이토록 획기적인 기술(ground-breaking technologies)을 개발했습니다.” 2020년 12월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화이자·바이오엔테크의 코로나19 백신 승인을 발표하며 한 말이다.
유럽은 팬데믹 초기에 많은 희생을 겪었지만, 축적된 기초과학 역량과 기술력을 토대로 전 세계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 최근 EU 집행위가 발표한 2022년도 ‘과학연구혁신 성과분석(SRIP) 보고서’에 따르면, EU는 인구로는 전 세계 6% 수준에 불과하지만 글로벌 연구개발(R&D) 투자의 18%를 담당하며 세계 상위 인용 과학논문의 21%를 배출했다. 기술 성과의 경우 EU는 특히 기후 분야에서 전체 특허출원의 23%를 차지해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바이오경제(23%), 보건(17%) 분야에서도 앞서 나가고 있다.
EU의 기술주권 확보 의지 고조
그러나 치열한 글로벌 기술경쟁, 비유럽 빅테크 기업들의 독주, 급변하는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최근 EU가 느끼는 위기감은 크다. 특히 팬데믹으로 촉발된 디지털화 진전과 공급망 위기 등을 겪으며 유럽 내 기술주권(tech sovereignty) 확보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높아졌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EU는 유럽의 과학기술 경쟁력 제고와 혁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EU 자체 기술역량을 확보하고, 향후 전략 분야의 기술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2022년도 SRIP 보고서에서도 향후 EU의 6가지 주요 연구혁신 정책 가이드라인으로 ①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더 나은 미래 구축, ②경쟁력 (재)확보, ③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미리 대비), ④해결책 모색 위해 기업, 연구소 및 인력에 투자, ⑤혁신시스템 강화 위한 주체 간 연계 및 격차 해소, ⑥연구혁신 친화적인 환경 조성을 제시하고 있다.
EU 연구혁신 정책을 구현하는 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보통 7년간 진행되는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이다. 30여 개의 부·처·청이 나눠 수행하는 한국의 국가연구개발사업과 달리, EU는 1984년부터 집행위 연구혁신총국(DG RTD)이 주축이 돼 거의 모든 분야의 연구혁신 사업을 단일 프레임워크 프로그램 체계로 추진하고 있다. 개별 회원국이 추진하기 어려운 영역을 EU 차원에서 추진함으로써 자원 활용과 역량 축적 측면에서 규모의 경제를 창출하려는 것이다. 또한 소속 회원국에 관계없이 수월성 기준의 연구비 지원을 통해 유럽의 자체 과학기술 역량과 추진력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유럽 내 연구자 간 협력과 결속을 강화해 EU가 지향하는 통합에도 기여한다. 아울러 내용 측면에서도 단순한 R&D 지원을 넘어 혁신을 지향하는 프로그램으로 꾸준히 확대·발전해 왔다.
‘호라이즌 유럽’, EU의 대표 연구혁신 프로그램
현재 진행 중인 EU의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프로그램은 2021년부터 2027년까지 진행되는 제9차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에 해당한다. EU는 ‘호라이즌 유럽’에 7년간 총 955억 유로(약 129조 원)라는 역대 최대 예산을 배정하며 EU의 과학기술 연구 및 혁신 의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그린 전환과 같은 EU의 전략적 핵심정책을 뒷받침하고 유럽의 산업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최첨단 기술역량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자리해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 대응 등 글로벌 공동 이슈에서도 EU의 과학기술 리더십을 강화해 가겠다는 계획이다.
‘호라이즌 유럽’은 직전 프로그램을 일부 개편해, 과학적 탁월성 확보를 위한 기초연구 및 인력교류 지원(필러 1), 글로벌 도전과제 대응과 산업경쟁력 제고(필러 2), 혁신역량 강화를 위한 혁신기업 지원(필러 3) 등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핵심정책 분야들을 지원하는 영역인 필러 2에 절반이 넘는 예산(53.5%)이 투입될 예정이다.
또 필러 2에는 정책 추진에 필요한 민관 파트너십 체계,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미션과제에 시민참여 확대 등을 강화함으로써 R&D의 성과와 혜택이 민간과 사회로 파급, 환원될 수 있도록 하는 측면에도 주목하고 있다. 아울러 스타트업 및 초기 기업들의 고위험 혁신 지원(EIC)을 위한 필러 3을 신설해 유럽 내 혁신시스템 환경 조성을 본격화한다는 구상이다.
유럽식 가치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구혁신 국제협력 표방
한편 지정학적 긴장 등 최근 국제환경 변화를 반영해 EU는 지난해 ‘연구혁신 분야 국제협력 전략(Global Approach to Research and Innovation)’을 발표했다. 이 전략은 EU가 연구혁신 분야 국제협력에 있어 개방성을 기본으로 하되, 유럽식 가치와 원칙을 공유하는 국가들과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특히 상호성 및 공정경쟁 환경 조성, 유사입장국과의 글로벌 문제 공동대응을 강조함으로써 연구혁신 분야에서도 EU가 전략적 자율성 확보에 역점을 둘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유사한 맥락에서 EU는 미국과의 기술협력 채널로서 통상기술협의회(TTC)를 신설하고 분야별 작업반에서 인공지능(AI), 녹색기술, 보안 등 주요 분야의 기술협력 방안을 긴밀히 논의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을 비롯한 캐나다, 일본 등 과학기술 혁신역량이 우수한 비유럽권의 유사입장국들에게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으로 참여하는 것을 제안하는 등 첨단기술개발 협력과 글로벌 이슈에 대한 공동대응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다만 이와 같은 EU의 행보에도 불구하고, 브렉시트로 인해 최첨단 과학기술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과 EU 간 과학기술 협력에 변화가 수반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향후 브렉시트가 EU의 과학기술 역량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최근 티에리 브레통 EU 집행위원은 “혁신에 대한 투자는 지속 가능하고 회복력 있는, 디지털화된 경제와 사회를 위해 우리가 기술의 최전선에 있을 수 있는 능력에 투자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EU의 ‘호라이즌 유럽’에 대한 전폭적 지원은 그간 축적된 수준급의 기초역량을 바탕으로 유럽의 혁신 돌파구를 찾겠다는 EU와 회원국들의 의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팬데믹·기후변화 등 전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과학기술 분야 국제협력과 공조 체제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그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프레임워크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온 EU는 2027년까지 ‘호라이즌 유럽’을 중심으로 유럽 내 기술혁신을 가속화하는 한편 글로벌 이슈 대응에서 EU의 과학기술 리더십을 강화하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우수한 기초연구 역량과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는 EU는 향후 우리가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다. 다양하고 심도 있는 과학역량, 네덜란드·독일·프랑스 등 기술강국 회원국, 대형화되고 융복합되는 첨단 과학기술 트렌드, AI·통신네트워크 등 국제표준 논의 등을 감안할 때 EU의 위상은 앞으로도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도 대유럽 과학기술 국제협력을 위한 새로운 모멘텀을 적극 만들어나갈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