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부터 개최된 WTO 제12차 각료회의(MC12)는 당초 예정된 폐막을 이틀 연기하는 진통을 겪으면서 MC12 결과 문서를 도출했다. MC12 결과물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팬데믹 대응, 지식재산권 일시면제(TRIPS waiver) 및 수산보조금 협정 등이다.
최근 몇 년간 국제사회에서 WTO로 대표되는 다자통상체제의 실효성이 크게 도전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이번 MC12 결과 도출은 그나마 WTO의 체면을 유지하게 해준 성과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WTO는 지난 2년여간 지속적으로 제기된 코로나19 백신 불평등 문제, 지정학적 위기로 인해 초래되는 무역왜곡 및 식량위기 확산 등에 대해서 어떠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MC12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번에 성과를 못 낸다면 WTO에 대한 신뢰와 적실성(relevance)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선진국, 개도국 구분 없이 WTO 내 공유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수산보조금 협상 타결은 WTO에 꼭 필요한 성과였다.
수산보조금 협상은 당초 도하개발어젠다(DDA; Doha Development Agenda) 협상의 일부로 다뤄져 오다가 2015년 유엔 제70차 총회에서 지속가능개발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의 과제로 ‘2020년까지 과잉어획능력 및 남획을 초래하는 유형의 수산보조금을 금지하고, 불법·비보고·비규제(IUU; Illegal·Unreported·Unregulated) 어업을 초래하는 보조금 근절 및 이와 유사한 신규 보조금의 도입을 제한한다’는 목표가 포함되면서 오랫동안 지지부진하던 협상에 동력을 부여받았다. 협상 개시 이후 21년 만에 타결된 수산보조금 협상은 불법어업 및 과잉어획된 어종에 대한 보조금 지급금지를 다자간 합의로 도출한 것으로, 이는 2013년 발리 각료회의(MC9)의 무역원활화 합의 이후 첫 WTO 다자간 협상성과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또 WTO 수산보조금 협정은 164개 회원국들이 해양생태계를 보전하고 수산자원의 고갈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성 있는 다자규범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WTO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근 환경 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는 있으나 자원 고갈 방지를 위한 다자무역협정 체결은 수산보조금 협정이 WTO 역사상 첫 번째 사례인 것이다.
수산보조금 지급제한엔 합의하나
과잉어획·과잉능력 범위, 규율정도 등에선 이견
이번에 타결된 수산보조금 협정은 크게 세 가지 분야에 지급되는 보조금을 금지하고 있다. 첫째는 IUU 어업 관련 보조금, 둘째는 과잉어획된 어족자원(OFS; Overfished Stocks) 어업 관련 보조금, 셋째는 기타 보조금이다. 당초 수산보조금 협상은 IUU, OFS 이외에도 과잉어획 및 과잉능력에 기여하는 보조금(OCOF; Overcapacity Overfishing)을 규율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사실 이에 대한 협상은 내용도 가장 복잡하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 차이가 커 첨예하게 대립되는 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법어획과 이미 과잉어획된 어족 자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WTO 회원국들이 가능한 한 강화된 규율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해당 규율과 관련된 판정 요건 및 주체, 적법절차 등 기술적 논의를 중심으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반면 과잉어획 및 과잉능력 관련 협상은 분위기가 달랐다. 앞으로 보조금을 계속 지급할 경우 과잉어획 또는 과잉능력 상태에 도달하게 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미리 보조금을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에는 회원국들 간 공감대가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보조금을 어느 정도 규율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합의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개도국 및 저개발국(LDC) 특별대우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 차이는 협상 마지막 순간까지 좁혀지지 않았다. 인도를 중심으로 한 개도국들은 과잉어획이 선진국들의 대규모 기업형 어업에서 비롯되므로 개도국들의 빈곤퇴치, 식량안보를 위한 수단인 소규모 영세어업에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개도국들은 현재의 고갈된 수산자원과 해양생태계 오염에 대한 책임과 부담은 거대한 원양어선을 운영하면서 수십 년간 대규모 어획활동을 했던 선진국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오염자 부담(polluters pay)’ 원칙하에 상당 기간의 협정적용 유예 및 영세어민 면제조항 등 개도국과 LDC 특별대우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반면 미국 등 선진국 진영에서는 과도한 협정적용 면제(carve out)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해당 협상이 수산자원 고갈의 악화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통상협상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개도국과 선진국을 구분할 것이 아니라 WTO 회원국 모두가 수산자원 보존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과도한 협정적용 면제 또는 유예기간이 합의된다면 협정이 적용되기 이전에 수산자원이 고갈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게다가 유엔 지속가능개발목표에서 설정된 2020년이라는 협상시한을 이미 놓친 상황에서 추가로 오랜 기간의 협정적용 면제조항을 수용할 여유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명목상 개도국이지만 실질적으로 선진국들보다 더 큰 규모의 원양어업과 어획능력이 있는 일부 개도국이 개도국 특혜를 향유하게 되면 수산보조금 협정의 실효성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가장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OCOF 분야 협상과정에서 편의치적 선박(flag of convenience, 선주의 소재국이 아닌 소유·운항 등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국가에 등록된 선박)에 대한 보조금 주의조항 등 일부를 제외하고 OCOF 관련 규범은 전체 협정에서 빠지게 됐다.
아세안·중남미 등 지역공동체들의 입김 세져···
어렵게 타결된 수산보조금 협정 지켜낼 수 있을지
그러나 WTO 회원국들은 협정발효 4년 이내 OCOF 관련 규범이 합의되지 않는다면, 일반이사회가 달리 결정하지 않는 한 이번에 타결된 수산보조금 협정 자체도 즉시 폐기된다는 조항을 포함시키면서 일종의 배수진을 쳤다. 또한 이번 과잉역량 과잉어획 관련 규범은 적절하고 효과적인 개도국 및 LDC 특별대우를 반영한다는 유엔 지속가능개발목표를 재차 명시하고, MC13까지 해당 규범 관련 권고사항을 도출해 내라는 구체적인 시한을 제시했다.
협상시한과 관련해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상황은 MC12 이후 개최된 WTO 일반이사회에서 그간 2년마다 개최되던 각료회의를 매년 개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것이 회원국들 사이에서 상당히 힘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주장은 WTO 각료회의 개최를 좀 더 정례화함으로써 각료회의 개최 시마다 성과물을 도출해야만 한다는 부담을 줄이면서 상황 점검용으로 각료회의를 활용하자는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만약 이 제안에 대한 컨센서스가 형성된다면 WTO 회원국들은 2023년까지 OCOF 관련 협정문을 추가로 합의해야 하며, 올 하계 휴가 이후 WTO 회원국들은 바로 협상을 재개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번 다자협상은 2013년 무역원활화 이후 약 10여 년 만의 성과다. 국제무대에서 개도국과 선진국 간 갈등은 과거에도 물론 존재했지만 지난 10여 년간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위상 강화 이외에 아세안, 중남미, 아프리카 회원국 등 지역공동체들이 협상 단위자격으로 각각 이익을 거세게 주장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전에는 미국 등 강대국 몇 나라로 구성된 진영과 중국을 비롯한 개도국 등으로 구성된 진영으로 양분되는 것이 통상적이었는데, 지금은 각각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국가들끼리 협상그룹을 만들고 협상의 주체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에 WTO 회원국들은 협상파트너와 관련해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수산보조금 협상도 이러한 국제사회의 동력구조 가운데 합의도출에 난항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지난 2년간 협상의장(산티아고 윌스 당시 콜롬비아 대사)의 리더십과 헌신적인 노력이 WTO 회원국 간 입장차 및 공통점 식별과 문안 반영에 크게 기여했다. 다수의 WTO 회원국은 협상의장의 통합텍스트에 대한 지속적인 개선 노력과 발효 이후 4년 이내 추가합의라는 창의적인 접근방식을 통해 그나마 일부라도 합의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간 국제무대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온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의 강한 리더십과 정치력이 주요국들의 합의를 이끄는 데 기여함으로써 전체 협상 진전에 동력을 줬다는 평가도 있다. 다수 간 기술적인 입장 차이를 극복할 수 없을 때 결국 정치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고, 이는 앞으로 남은 협상의 타결에도 절대적으로 유효한 명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폭염과 물 부족 등의 문제가 강타한 2022년 유럽을 보면서, WTO 회원국들의 개별적인 노력만으로 자원과 환경 관련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고, 이것이 우리가 다자규범 형성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라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민감성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관련 제도를 점검하고 다자논의에 적극 참여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향후 수년 내 WTO가 수산자원의 고갈 방지 및 생태계 보존과 관련해 새로운 다자규범을 도출해 입법기능 복구 신호탄을 쏘아 올림으로써 여전히 우리의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기구라는 점(relevance)을 증명해 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