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은 이미 우리 삶의 외생변수가 됐다. 앤드류 맥아피(Andrew McAfee) MIT 교수는 정보기술(IT) 발전에 따라 기계와 인간, 플랫폼과 공급망, 중앙화와 분산화가 어떻게 상호 간 조화를 이루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했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노동의 종말』에서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착취해 간다고 했고, 호주의 정치철학자 팀 던롭(Tim Dunlop)은 『노동 없는 미래』에서 인간 역사상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미래를 전망했다.
정보기술은 국제무역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맥킨지는 정보기술이 무역에 미치는 영향을 거래비용 감소(사물인터넷, 전자상거래, 블록체인, 자동문서처리), 생산과정 변화(AI, 자동화, 3D 프린팅), 새로운 제품 개발(전기차, 신재생에너지, 디지털 제품)로 나눠 분석하고 전체적으로 무역을 증가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WTO도 IT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분야별 협상의 일환으로 IT 제품에 대한 별도의 협상을 시작했다. 1996년부터 29개 회원국이 IT 제품의 관세철폐를 위한 협상을 실시했고, 복수국가 간 협정의 일환으로 WTO에 포함됐다. 203개 제품의 관세를 철폐했고, 현재 83개 국가가 참여하고 있다. 2015년부터 54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정보기술협정(ITA; Information Technology Agreement) 품목 확대를 위한 협상이 이뤄졌고, 201개 추가 품목에 대한 무역자유화에 합의했다.
ITA는 복수국가 간 협정(plurilateral agreement, 특정 의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WTO 일부 회원국을 대상으로 하는 협정을 뜻하나 ITA의 경우 WTO 각료선언을 통해 관세인하 혜택을 ITA 회원국뿐 아니라 WTO 전체 회원국에게 개방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WTO의 무역자유화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1996년 미국, EU 등을 중심으로 협의가 시작돼 그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29개국이 선언문을 채택했고, 1997년 40여 개국이 참가한 제1차 ITA는 임계질량 방식(critical mass, 대상품목의 세계 무역 중 90% 이상을 차지하는 회원국들의 가입을 조건으로 협정이 발효되는 방식)으로 발효됐다. 대상품목은 컴퓨터, 통신장비, 반도체, 반도체 제조장비, 소프트웨어, 계측기기 등 203개 품목이다. WTO 사무국에 따르면 이 품목들의 전 세계 수출은 1997년 5,490억 달러에서 2020년 2조460억 달러로 약 4배가 됐다. 현재 ITA 회원국은 83개 국가로 확대됐고 대상품목에서 전 세계 무역의 약 96%를 차지하고 있다.
두 차례 ITA로 전 세계 수출의 15% 차지,
중국과 인도의 상반된 입장은 관전포인트
1997년 제1차 협상 타결과 함께 대상품목을 확대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으나 가전제품에 대한 회원국 간 이견은 극복되지 못했다. 이후 오랫동안 추가 협상 논의가 없었으나 2012년 ITA 출범 15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계기로 확대 협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8개국이 ITA 품목 확대제안서를 제출했다. 8개국 이상이 지지하거나 지지국 교역 규모가 전 세계 교역량의 50% 이상인 품목을 중심으로 선별하고 각국의 민감품목은 일부 삭제하는 방식을 병행해 대상품목 선별작업을 계속했다. 그 결과 2015년 7월 24일 54개 회원국이 참가한 가운데 IT 제품 201개 추가 품목 자유화에 합의했다. WTO 사무국에 따르면 ITA 확대 제품의 세계 수출은 2012년 1조3,850억 달러에서 2020년 1조7,780억 달러로 연평균 3.2% 증가했다. 1997년 ITA 체결 후 20년간 세계 ITA 수출은 세 배로 증가했고, 전 세계 수출의 15%를 차지하게 됐다.
지난 9월 말 개최된 WTO 퍼블릭 포럼에서 ITA에 관한 자유토론이 있었다. 협정이 개도국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과 개도국의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 확대에 도움된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또 우루과이라운드와 도하라운드에서 합의한 의제를 먼저 협의해야 한다는 의견과 환경변화를 고려해 새로운 의제에 대해서도 협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새로운 복수국가 간 무역협정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의견 대립이 투영된 것이다.
ITA에서 특이한 점은 제1차 ITA는 개도국을 포함한 83개국이 참가했으나 제2차 ITA에는 인도를 포함한 다수의 개도국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도의 경우 처음부터 제1차 ITA에 참여했다. WTO 사무국 자료에 따르면, 인도의 ITA 대상품목 수입은 1996년 10억 달러에서 2015년 320억 달러로 연평균 20% 증가했고, 세계 전체 ITA 대상품목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0.2%에서 1.7%로 확대됐다. 반면 인도의 ITA 대상품목 수출은 1996년 5억 달러에서 2015년 22억 달러로 증가했지만 세계 전체 ITA 대상품목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그 결과 ITA 대상품목의 무역적자는 5억 달러에서 298억 달러로 대폭 확대됐다. 인도의 IT서비스 육성 정책과 관세인하 정책이 전자제품의 국내 수요를 증대시켰고, 무역역조 확대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인도 정부는 ITA가 국내 전자산업 육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우루과이라운드 설정의제와 도하라운드 이행과제 우선논의를 주장하며 제2차 ITA 협상엔 불참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 확대로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니카라과, 파나마, 페루 등 다수 국가도 불참했다.
중국은 인도와 다른 길을 걸었다. 중국은 인도보다 늦은 2001년 WTO에 가입하고, 2003년 ITA에 참가했다. 중국의 ITA 대상품목 수입은 1996년 129억 달러에서 2015년 4,128억 달러로 연평균 20% 증가했고, 수출은 1996년 113억 달러에서 2015년 5,505억 달러로 연평균 23% 증가했다. 글로벌시장에서 중국의 수입비중은 1996년 2.3%에서 2015년 22.5%로 확대됐지만 수출비중은 2.1%에서 33.3%로 더 빠르게 늘어났다. 무역흑자도 1996년 1억 달러에서 2015년 1,377억 달러로 증가했다. 중국은 ITA를 활용해 국내 전자산업 육성에 성공했고, 이를 토대로 제2차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다. 실제 중국은 제조업 육성과 혁신을 위해 R&D 지출을 2000년대에 10% 이상 꾸준히 증액시켰다. 중국이 ITA에 참여한 2003년부터 제2차 협상이 시작된 2012년까지 세계 전자제품 수출증가율은 7%에 불과했으나 중국의 전자제품 수출은 연평균 30% 이상 증가했다.
IT는 일반적으로 데이터를 저장·송수신·처리하기 위한 기술이고, 대상제품으로는 컴퓨터, 통신장비, 저장장치, 기타 장치들로 정의된다. 최근 융합(convergence)과 기술 확산(divergence)이 증가하면서 제품 간, 기술 간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특히 IT의 경우 우리 모든 일상에 침투하고 있고, 대부분의 제품으로 확산돼 그 정의나 대상품목 선정에 어려움이 있다. 빠른 기술발전으로 새 제품들이 계속 나타나면서 국제표준품목 분류(HS)의 특정 번호로 분류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ITA의 경우 IT라는 정의에 집착하기보다 회원국들이 자유화 희망대상 품목들을 선정ㆍ제시하고 경제적으로 의미가 있는 품목(제2차 ITA 협상 시 8개국 이상 지지하거나 지지국 교역 규모가 전 세계 교역량의 50% 이상인 품목을 선정)을 중심으로 하되, 각국이 민감해하는 품목은 제외하는 방식으로 정한다.
그간의 ITA 협상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품목은 가전, 특히 TV다. 1997년 필자가 참석한 ITA 품목 확대 협상에서 TV 포함 여부에 대한 회원국 간 갈등이 협상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일 정도였다. 2012년 ITA 2차 협상에서도 TV를 제외했다. 이를 WTO 사무국은 ‘TV 교착상태(TV impasse)’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부 회원국들은 TV를 포함시키는 것을 기술발전에 따른 당연한 논리적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일부 회원국들은 이에 매우 민감하다. ITA 품목 확대 협상 시 TV는 품목선정의 기준인 세계 무역의 50% 이상을 기록했지만(51.9%) 민감성을 고려해 제외됐다.
비관세장벽에 대한 관심 대두···회원국 확대 노력도 이어져야
ITA 각료선언문은 관세인하뿐 아니라 IT 제품과 관련된 비관세장벽 해결방안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협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IT 제품에 대한 관세인하는 성과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최근 비관세장벽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고 있다. 우선 각국의 표준을 조사하기 위해 정보기술협정위원회는 회원국에 전자파적합성(EMC), 전자파간섭(EMI) 등의 적합성 평가절차에 대한 자료 제출을 독려하고 있다. 스위스를 포함한 일부 회원국들을 중심으로 ITA 적합성 평가절차 시험결과, 라벨링 및 투명성 등에 대한 비공식 논의를 진행 중이며, 향후 워크숍 등을 통해 논의를 확대할 전망이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제1차 ITA가 개도국에 실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인도 등 많은 개도국들이 제2차 ITA 참여를 거부했다. ITA 회원국의 관세인하 혜택을 WTO 전체 회원국들에게 부여하기 때문에 ITA에 추가로 참여할 요인이 적은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른바 무임승차 문제다. 그간엔 주로 선진국들이 FTA 협상 시 또는 WTO 가입협상 시 패키지로 ITA 가입을 요구하거나, EU 회원국 확대로 ITA 회원국도 확대됐다. 올해는 최빈국 중 최초로 라오스가 ITA에 가입하면서 전체 회원국은 83개국이 됐다. ITA는 대상품목에서 참가국들이 세계 무역의 90% 이상을 차지할 경우 발효하므로 향후 추가 협상 시 개도국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하고, 개도국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성공사례를 발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세계반도체산업협회, 미국 상공회의소 등 43개 경제·산업 단체는 지난 5월 WTO에 ITA 확대 개정 협상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미국 반도체협회와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은 그 대상품목으로 반도체 제조장비, 에너지효율기술, 스마트제조기술, 의료장비 등 250여 개 품목을 제시했다. 이 협회는 자체연구를 통해 82개국이 제3차 ITA에 참여하면 10년 내 세계 무역이 7,840억 달러 증가하고, 미국에서 ICT 제품 수출증가 35억 달러, 신규 일자리 창출 7만8천 개 등 약 2천억 달러의 경제적 효과가 기대된다고 분석했다.
IT가 자동차, 드론, 의료장비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ITA의 미래에 따라 우리나라 산업의 생산과 수출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국가별 비관세장벽에 대한 분석과 함께 우리나라 산업 및 제품의 국제경쟁력, 각 산업의 발전전략 등을 철저히 분석해 향후 있을 수 있는 ITA 협상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