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둔 것은 상당히 오래전부터다. 19세기 말 산업혁명이 초래한 오염으로 건강과 생활환경이 위협을 받으면서 환경보호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민사회는 환경문제를 현실정치에 반영하고자 했다. 그 결과 1972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 환경 콘퍼런스를 기점으로 유럽 각국은 환경 관련 부처를 설치했고, 비슷한 시기 여타 진보정당과 차별화된 녹색당이 정계에 자리 잡으면서 풀뿌리 환경운동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게 됐다. 1979년 스위스에서 세계 최초로 녹색당 출신 국회의원이 탄생했고, 1981년 벨기에는 4명의 녹색당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EU 전체적으로도 환경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상당히 높다. 유럽의회의 의원 705명 중 녹색당 의원은 72명으로 의회를 구성하는 7개 정당 중 소속 의원이 네 번째로 많다. 유럽 각국에서 여타 진보정당과 구분되는 녹색당과 소속 국회의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스위스의 경우 녹색당 지지율이 20%를 넘는다. 이러한 정치적 지지를 바탕으로 유럽은 환경과 기후변화 정책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세계적인 움직임을 선도하고 있다. 환경과 기후변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현재 인식과 100년 이상의 고민이 투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권자이자 소비자로서
강력한 친환경 정책·경영 요구하는 유럽인들
EU 산하 여론조사기관 유로바로미터가 2021년 시행한 설문은 환경과 기후변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보여준다. 응답자의 92%가 정부가 야심 찬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고, 75%는 (EU 회원국) 정책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데 여전히 부족하다고 답했다. 또한 96%의 응답자가 개인적으로 쓰레기 재활용 확대, 일회용품 줄이기, 육류 자제나 유기농 구매 등의 방법으로 기후변화 대응에 동참하고 있다고 답했다. 유럽인들의 친환경 소비 패턴은 대표적 소비재인 승용차 구매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유럽자동차협회에 따르면 2021년 승용차 판매(등록 기준) 중 친환경차 판매비중이 하이브리드차 19.6%,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 8.9%, 전기차 9.1% 등으로 37%를 돌파했다. 같은 기간 국내에서는 하이브리드 12.9%,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 1.1%, 전기차 5.6%, 수소차 0.5% 등 친환경차의 판매비중이 20.1%를 기록했고, 미국은 하이브리드차 약 5%, 전기차 3% 수준에 그쳤다.
유럽 기업들은 녹색투자에도 앞장서고 있다. 2020년 전 세계 녹색채권의 60%가 유럽에서 발행됐다. 기후환경 관련 비영리단체인 CDP(Carbon Disclosure Project)의 2021년 평가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산림 및 물 관리 등 환경 분야에서 A등급을 획득한 272개의 기업 중 유럽 기업은 104개로 40%를 차지하며, 최고 등급인 트리플A를 받은 14개 기업 중 8개가 유럽 기업이다. 이는 기후변화 영역에서 유럽 기업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처럼 환경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유럽인들은 유권자로서 친환경 정책을 주문할 뿐만 아니라 소비자로서 기업에도 친환경 경영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럽의 정치인들과 최고경영자들에게 환경친화적이지 않은 정책이나 경영 방침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유럽인들에게 기후변화 대응은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전통적 산업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것을 과거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새로운 모험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유럽이 누리던 세계질서 패권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에 넘어갔다. 분야별로 보면 제조업에서 한국·일본 등 제조강국들에게 추격당했고, 중국과 인도까지 뒤를 쫓고 있다. 금융·서비스업도 미국, 영국 등에 주도권을 빼앗긴 지 오래다. 디지털·테크 산업도 다를 바 없다. 유럽의 생산은 한때 세계경제의 절반을 차지했으나 2012년 25%까지 떨어졌고 현재는 20% 수준에 불과하다.
2019년 들어선 폰 데어 라이엔 체제의 EU 집행위는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기존 산업에 접목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EU가 후발국들과 경쟁할 수 있는 시장(level playing field)으로 세계 경제구조를 재편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며 이를 이행하기 위한 기후변화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2021년 6월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고, 2030년까지는 탄소배출을 1990년 대비 55% 감축한다’는 내용의 「유럽기후법」이 발효됐다. 2021년 7월 EU 집행위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도입, 재생에너지 확대, 온실가스배출권 거래제(ETS) 강화, 에너지효율 향상 등을 골자로 하는 ‘핏포 55(Fit for 55)’ 법률안 패키지를 후속 발의했고, 2022년 11월 현재 법안들에 대한 보완 논의가 한창이다.
탄소중립으로 향하는 가운데 유럽의 경제주체들이 보유하고 있는 기후변화 대응 분야의 핵심 원천기술은 주요한 투자처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전 세계 10대 청정기술 개발 기업 중 8개가 유럽 기업이며, 2030년까지 유럽의 청정기술 수준이 4배 이상 향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U는 자신들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온실가스배출권을 판매해 100억 유로 규모의 이노베이션 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상용화 가능성이 큰 대규모 녹색 프로젝트에 투자함으로써 한발 빠르게 녹색시장을 선점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제도만으로는 후발국 기업과의 경쟁이 불가능해진 만큼, EU 입장에서 공정한 경쟁여건을 조성해 EU시장 내에서만큼은 EU 기업들의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정책도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가 대표적이다. 해외에서 적정 탄소가격을 지불하지 않고 값싸게 생산된 제품이 EU에 수입되면 EU 기업들이 경쟁할 수 없고 관련 일자리도 사라지기 때문에, 수입품에 탄소가격을 부과해 유럽 기업과 해외 기업 간 공정한 경쟁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목표다. 역외에서 생산된 철,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기 등 5가지 제품을 역내로 수입할 때 EU 탄소가격을 기준으로 관세 성격의 과금을 할 예정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는 2026년부터 해당 제품의 대EU 수출이 많은 중국, 러시아, 인도, 터키 등의 기업이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철강 분야에서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민간 분야 역시 기후변화 대응에 동참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1,000대 기업 목록에서 지속가능성과 환경 관련 기업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낡은 스마트폰을 재생(재조립)해서 판매하는 핀란드 스타트업 스와피(Swappie)는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매년 500% 이상 성장했고, 2021년 매출은 2020년 9,800만 유로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환경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도 지속 성장 중이다. 2021년 전 세계 지속가능펀드의 규모는 전년 대비 53% 증가한 2조7,400억 달러였으며 앞으로도 커질 전망이다. 기후변화 분야 경력이 있는 기금운용 담당자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금융가의 인력 빼가기 게임도 시작됐다. 세계경제가 유럽의 의도대로 기후변화라는 트랙에 올라섰다.
러시아발 안보위기, 유럽의 녹색전환에 힘 실어준 셈
러시아·우크라이나발 안보위기는 유럽의 녹색전환에 힘을 싣고 있다. 올해 3월 8일 EU 집행위는 2030년까지 유럽이 러시아산 화석연료로부터 자립하기 위한 ‘리파워EU(REPowerEU)’ 계획을 발표했다. 단기적으로는 LNG를 수입하거나 비러시아 파이프라인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가스공급을 다변화할 방침이다. 또한 바이오메탄·수소 등 대체가스를 활용하면서 궁극적으로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탈탄소산업을 육성해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임으로써 안보위험을 줄일 뿐만 아니라 2050 탄소중립 목표도 차질 없이 달성하겠다는 전략이다.
2020년 EU는 가스소비량의 90%를 수입했고, 러시아는 이 중 45%를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EU 석유 수입의 25%, 석탄 수입의 45%를 담당했다. 유럽이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한 러시아와 관계를 끊을 수 없고 이는 안보 차원에서 커다란 리스크임이 분명하다. 꽤 오래전부터 EU는 내부적으로 그리고 미국과 같은 동맹국들로부터 편중된 에너지 수입이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받아 왔다. 그런데도 EU의 주요국들은 저렴한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포기할 수 없었고, 러시아 입장에서도 천연가스 판매수익이 엄청난 만큼 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한 EU의 기대가 막연했고 에너지안보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는 주장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입증됐다.
원산지가 한정돼 있고, 따라서 공급자가 분명한 화석연료는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하면 당장 가격과 수급이 불안해진다. 반면 태양광, 풍력, 수소 등 청정에너지는 장소나 원료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에너지주권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런 차원에서 EU는 장기적으로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수급 구조를 만들 생각이다. 다만 당장 재생에너지 100% 공급은 어렵기 때문에 탄소배출이 없고 자체 조달이 가능한 원전과 탄소배출이 비교적 적은 가스를 당분간 일정 수준 사용하겠다는 전략이 EU 택소노미 그리고 상당수 회원국의 에너지 정책에 반영돼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고 EU 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에너지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EU 집행위의 생각이다. 2020년 10월 13.43유로/MWh였던 천연가스 가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본격화된 올해 3월 7일 227.2유로/MWh까지 올랐고, 8월에는 약 350유로/MWh로 최고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재생에너지 도매가격 또한 많이 상승했지만 천연가스보다는 여전히 저렴한 편이다. 풍력발전은 50~60유로/MWh, 태양광은 35~50유로/MWh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독일과 스페인 기준). 녹색전환을 좀 더 일찍 시작해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췄어야 가계와 기업의 경제적 부담이 적었을 것이라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안보를 위해 화석연료 의존도, 특히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를 줄이고, 기후변화에도 효과적인 녹색에너지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 EU가 당면한 미래다. EU 회원국들은 재생에너지, 수소 등을 확대하는 에너지구조의 녹색전환을 기본 원칙으로 하면서 국가별 상황을 반영한 원전 정책을 연결하고 있다.
유럽은 성숙한 시민의식, 글로벌 경쟁과 경제성장, 에너지안보 강화의 측면에서 기후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결하고 가야 할 몇 가지 현실적 문제도 있다. 동유럽 국가들은 기후변화보다 경제발전에 관심이 더 많다. 이에 독일, 프랑스 및 북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EU 내 기후변화 리더십이 요구된다. 높은 에너지 가격, 코로나 극복을 위해 지출한 막대한 재정 등이 녹색전환으로의 투자에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재정이 빈약하고 민간 여력까지 부족한 일부 회원국이 얼마나 참여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기후변화 대응은 유럽이 에너지안보를 위해 마땅히 가야할 길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최근 EU의 기후·에너지·환경 정책 또한 에너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다만 단기적으로는 에너지에 대한 과다지출, 재가동된 석탄발전 등이 불안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현실이다. 매년 개최되는 기후변화에 대한 유엔 회원 국 회의(COP)에서 후발국들의 비난 그리고 지원 요구를 감당하는 것도 유럽에게 주어진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