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스위스 제네바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뉴 콘퍼런스 홀. 193개 WIPO 회원국의 지식재산 분야 수장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글로벌 팬데믹으로 2019년 10월 이후 3년 만에 WIPO 총회가 대규모 대면회의 형태로 열린 것이다. 올해 제63차 총회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지식재산 시스템 지원을 위한 제안서 채택, 그리고 오랜 시간 지속된 두 가지 WIPO 상설위원회 논의에 대한 외교회의(diplomatic conference) 개최 제안서 채택이 그것이다. ‘국경 간 무역을 용이하게 하는 디자인 보호에 관한 협정’과 ‘지식재산, 유전자원 및 전통지식’ 관련한 두 가지 상설위원회 논의 중 이 글에서는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전자원 등의 보호에 관한 논의’ 경과와 쟁점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WIPO와 유전자원의 만남 그리고 IGC의 탄생
유전자원 등의 보호에 관한 논의는 유엔의 지식재산 분야 전문기구인 WIPO의 5개 상임위원회 중 하나인 ‘지식재산과 유전자원, 전통지식, 민간 전승물에 관한 정부 간 위원회(IGC; Intergovernmental Committee on Intellectual Property and Genetic Resources, Traditional Knowledge and Folklore)’에서 이뤄지고 있다. 유전자원(GR), 전통지식(TK) 등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방안 그리고 이들을 활용해 취득한 지식재산권(이하 지재권)으로부터 얻는 권리자의 이익을 공유하는 방안 등을 핵심적으로 다룬다. 예를 들어 개인이나 기업이 의약품, 화장품 등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동식물(GR)이나 민간요법(TK) 등을 활용했을 때 해당 의약품이나 화장품과 관련된 특허, 상표, 디자인, 저작권 등의 지재권을 행사함으로써 발생하는 이익을 원료나 아이디어 제공자 측과 배분하기 쉽도록 관련 지재권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지재권을 취득하는 쪽은 주로 선진국이고, 유전자원이나 전통지식을 제공하는 쪽은 주로 최빈개도국이기 때문에 WIPO 논의에서 양 진영이 서로 의견 차이를 보이며 대립하고 있다.
유전자원 보호와 이익 공유라는 개념은 1992년 5월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채택된 ‘생물다양성 협약(CBD; Convention on Biological Diversity)’에서 시작됐다. 이 협약은 ‘생물다양성 보전’,? ‘생물다양성 구성 요소의 지속 가능한 이용’,? ‘유전자원 이용에서 생기는 이익의 공정하고 공평한 배분’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이 중 ‘유전자원 이용과 이익 배분’이라는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보충 협정으로, 계약 당사자가 유전자원에 대한 접근(access), 이익 공유(benefit-sharing) 및 준수(compliance)와 관련해 조치할 의무를 규정한 나고야 의정서가 2010년 채택됐다. 의정서 제3조는 유전자원(GR)과 함께 유전자원 관련 전통지식(TK)도 협정 적용범위에 포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생물다양성 협약 체결 이후 분야별 작업반을 구성해 협약 이행을 위한 논의를 실시했다. 1998년 제4차 생물다양성 협약 당사국회의에서 GR, TK 보호에 관한 논의가 지재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해당 논의를 유엔의 지식재산 분야 전문기구인 WIPO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WIPO는 관련 위원회 구성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1998년 6월부터 11월까지 개도국의 요청에 따라 남미와 동남아 등 28개국의 GR, TK 현황을 파악하는 실태 조사를 시행했으며, 2000년 10월 총회 의결로 관련 논의를 위한 ‘정부 간 위원회(IGC)’ 설치를 결정하고, 2001년 4월 최초의 유전자원 관련 지재권 논의로서 제1차 IGC 회의를 개최했다.
2001년 시작된 IGC 회의는 유전자원, 전통지식 외에 민화, 시, 노래, 춤, 연극 등 민간 전승물(Folklore)에 관한 전통문화 표현물(TCEs; Traditional Cultural Expressions)도 논의 주제로 포함했고, 세부 주제와 쟁점사항에 대한 논의를 거쳐 2010년 제17차 회의에 이르러서야 문안 협상(text-based negotiation)을 시작했다. 이후 논의에 진척을 보이지 못한 채 협상기한에 도달하자 2011년 제49차 WIPO 총회에서는 IGC 협상기한을 2013년까지 연장하고, 회의 개최 주기를 기존 연 2회에서 연 3회로 늘리면서 논의방식도 한 회의에서 한 가지 주제만을 다루도록 결정했다.
다음 해인 2012년 열린 제20차, 21차 회의에서는 주제별(GR, TK, TCEs) 단일 문안을 완성했고, 2019년까지 협상기한을 계속 연장해 가면서 회차를 거듭해 문안 간결화를 위한 논의를 계속해 왔다. 하지만 2020년 3월로 예정됐던 제41차 회의가 글로벌 팬데믹을 이유로 잠정 무기한 연기된 후 1년 반이 지난 2021년 8월에서야 논의가 재개됐고 그동안 회의는 공전했다. 2022년 들어 팬데믹이 사그라들자 WIPO 사무국은 그간 밀렸던 진도를 빼려는 듯 연말까지 총 네 차례 회의를 계획해 지난해 2월, 5월에는 GR에 관한 제42, 43차 회의가 열렸고, 9월과 12월에는 TK, TCEs에 관한 제44, 45차 회의가 개최됐다.
선진국과 개도국 간 유전자원·전통지식 출처 공개에 이견,
공평한 이익 공유 관점도 달라
IGC 회의에서는 유전자원 이용국인 선진국 진영과 유전자원 제공국인 최빈개도국 진영 간에 뚜렷한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먼저 실질적 내용 측면에서 보면 유전자원 등에 대한 접근 그리고 유전자원 이용에 따른 이익의 공유(ABS; Access and Benefit Sharing) 방식을 두고 각국의 재량에 맡기자는 선진국과 정부 주도 방식으로 이행하자는 개도국이 대립하고 있다. 또한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궁극적으로 체결될 협약이 갖는 성격과 관련해서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안 형태로 가자는 선진국 측과 법적 구속력을 갖는 강제 규범으로 가자고 주장하는 개도국 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양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12년 미국은 단일 문안과 별개로 유전자원 이용국인 선진국 견해를 반영해 GR, TK, TCEs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특허 심사과정에 이를 활용함으로써 등록요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특허 신청을 걸러내는 방식으로 기존 GR, TK 등을 방어적으로 보호한다는 내용의 권고안을 제안했고 우리나라, 일본 등이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우리를 포함한 선진국 진영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특허 등을 출원할 때 유전자원이나 전통지식의 출처를 의무적으로 공개하자는 내용이다. GR·TK 제공국은 특허출원서에 해당 발명에 이용된 GR·TK의 출처를 의무적으로 공개할 뿐 아니라 GR·TK 사용자와 제공자 간의 사전통보 승인(PIC; Pre-Informed Consent) 그리고 공평한 이익 공유의 증거도 함께 제출하라고 주장하는 반면, GR·TK 이용국은 발명에 사용된 GR·TK의 출처와 지재권 등록요건 간의 연계성이 부족하고 이러한 절차가 법적 불확실성을 초래하며 출원인과 각국 특허청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이에 반대하고 있다.
또 하나의 쟁점은 보호 방법에 관한 것이다. GR·TK 이용국은 분쟁해결 절차는 계약 당사자 간 자율성으로 결정하고, 사적 계약을 통해 공평한 이익 공유가 가능하도록 하며, 등록요건을 만족하지 못한 특허(지재권)가 등록되지 않도록 GR·TK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서 이를 특허청 심사관이 활용하도록 하자는 의견이다. 하지만 GR·TK 제공국은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한 방어적 보호는 GR·TK 관련 정보가 제3자에 의해 오용될 가능성이 있고, 현 지재권 제도로는 GR·TK 보호에 한계가 있으므로 국제협약을 통한 각 국가의 국내법 개정과 정부의 개입(점검기관)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있다. 그 밖에 잘못된 특허가 허여됐을 때 특허를 취소하는 등 제재수단을 포함할지, 널리 알려진 TK·TCEs를 예외로 할지 그리고 수혜자는 누구까지로 한정할지 등에 대해서도 일치된 의견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7월 총회 결정에 따라 2024년 외교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WIPO 회원국들은 특별 세션과 외교회의 준비위원회 일정을 마련해 놓고 있다. 20년 넘게 진행됐고 최근 몇 년간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쳇바퀴 돌듯 공전하던 IGC 논의가 마침내 마감시한을 부여받았다. 더 이상 성과 없는 논의를 지속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양 진영이 각자의 최종 입장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분석을 통해 협상의 결과물로서 제시될 국제협약의 틀과 수준을 깊이 있게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구슬을 가진 사람도 그 구슬을 꿰는 기술자도 모두 서로가 절실한 공생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승자가 되는 상생 전략이 절실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