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가에도 ‘자국과 국민의 안전보장’보다 선행하는 가치는 있을 수 없다. ‘죽느냐 사느냐’는 ‘잘사느냐 못사느냐’에 앞서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일어나 ‘같이 잘살아 보자’는 다자주의 기치 아래 국제무역을 촉진하고자 탄생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이를 상설기구로 공고히 하기 위해 창설된 ‘세계무역기구(WTO)’ 또한 ‘죽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회원국들은 관세를 낮추고 수출입 제한을 막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마련된 다자무역규범이라는 대원칙하에서도 ‘국가안보’를 위한 ‘예외’가 인정되도록 합의했다. GATT 21조 ‘안전보장을 위한 예외’가 이에 해당한다.
‘원칙’과 ‘예외’의 관계에서 항상 대두되는 문제는 ‘예외’의 범위일 것이다. ‘예외’를 인정하는 범위를 과도하게 넓히면 ‘원칙’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반대로 ‘예외’를 지나치게 좁힌다면 당초 ‘예외’를 만든 의도를 몰각하는 것이 된다. 최근 GATT 21조를 둘러싼 논쟁도 이 ‘원칙’과 ‘예외’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지난 연말 공개된 WTO 분쟁결과는 ‘예외’의 범위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GATT 21조 ‘안전보장을 위한 예외’를 다룬 분쟁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 지난 12월 공개된 미국·중국 등 철강·알루미늄 232조 분쟁(DS544, 552, 556, 564)과 미국·홍콩 원산지 분쟁(DS597)에 앞서서는, 2019년 공개된 러시아·우크라이나 통과운항 분쟁(DS512), 2020년 공개된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지식재산권 분쟁(DS567)에서 ‘국가안보 예외’가 논의됐다. 피소국(미국,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은 자국 조치의 정당성을 방어하기 위해 ‘국가안보 예외’를 주장했고, WTO 분쟁패널은 GATT 21조 등에 대한 해석과 함께 피소국의 주장을 면밀히 살폈다. 특히 미국이 피소국이었던 최근 두 분쟁에서는 21조 ⒝항, 특히 (iii)호(전시 또는 기타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에 대한 WTO 패널의 해석이 큰 관심을 끌었다.
‘국가안보 예외’, 회원국의 완전한 자기판단 영역인가?
미국은 분쟁과정에서 GATT 21조 ⒝항을 원용하는 것은 WTO 회원국의 ‘완전한 자기판단(self-judging)’ 영역이며 ‘패널에 의해 판정될 수 없다(non-justiciable)’고 주장했다. ⒝항 전문(chapeau)은 회원국이 필요하다고 간주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며, 이는 전문에 더해 하위 각호(subparagraph)에 대한 판단에도 적용된다는 입장이다. 이에 WTO 패널은 조약 해석의 기본원칙인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31조, 32조 등을 근거로 GATT 21조를 검토한 결과, 기본적으로 일정 정도로 회원국의 자기판단을 용인하나 ‘완전한 자기판단’의 영역은 아니라고 판정했다. 특히 미국·홍콩 원산지 분쟁(DS597)에서 패널은 GATT 21조 ⒝항 전문이 회원국의 자기판단을 허용하나 이 조치가 하위 호에 부합하는지는 패널의 검토대상이 된다고 판정했다. 즉 ⒜항, ⒞항과 달리 ⒝항은 전문을 통해 ‘자기판단’을 용인하면서도 그것이 적용될 세부 상황을 하위 호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그 하위 호를 만족했는지를 패널이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관측된다.
WTO 패널 판정에 대해 미국은 지난 1월 개최된 WTO 분쟁해결기구 정례회의 발언을 통해 ‘국가안보 이슈’는 주권국가의 판단영역으로 WTO 패널이 판단할 사항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강조했다. WTO에서 국가안보 이슈를 재판하는 것은 WTO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WTO 근본을 해치는 행태라는 입장이다. 특히 미국은 그간 WTO 상소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상소기구가 회원국들이 협상을 통해 마련한 협정문에 근거하지 않고 도리어 월권적인 과잉해석으로 새로운 규범을 창설하려 한다는 비판을 해왔다. 미국은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이번 패널 판정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에 대한 판단에도
상이한 입장 차 확인돼
WTO 패널은 GATT 21조가 완전한 자기판단 영역이 아니며 특히 ⒝항 각 하위 호는 검토대상이 된다며, 그다음 단계로 (iii)호 해석을 진행했다. (iii)호 ‘전시 또는 기타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에 취하는 조치’에서 상대적으로 자명한 ‘전시’와 달리 ‘기타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미국은 처음엔 ‘국가안보 예외’는 회원국의 완전한 자기판단 영역이라는 입장으로 ⒝항 하위 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 진행과정에서 미국은 철강·알루미늄 232조 분쟁(DS544 등) 등 대외 공개된 정보들을 볼 때 자연스럽게 ⒝항 (iii)호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며, 특히 ‘기타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는 ‘국가 간 정치적·경제적 접촉 발생과 관련해 예상치 않게 발생해 긴급한 주의가 요구되는 위험 또는 충돌상황’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홍콩 원산지 분쟁과 관련해 미국은 ‘민주주의 및 인권 등 근본원칙의 훼손’에 직면한바 자국의 필수적 안보이익에 위협이 됐으며 이에 대한 정보들은 자연스럽게 ⒝항 (iii)호에 규정된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의 존재를 뒷받침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WTO 패널은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의 범위에 엄격하게 접근한 것으로 평가된다. 먼저 철강·알루미늄 232조 분쟁(DS544 등)에서 패널은 이를 ‘무력충돌 상황 또는 잠재하는 무력충돌 상황, 고조된 긴장 또는 위기상황, 일국을 둘러싼 전반적인 불안정 상황’이라고 해석했다. (iii)호 의미를 다른 하위 호와 함께 고려하면서 ‘전쟁’ 즉, ‘무력충돌’ 관점에서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를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홍콩 원산지 분쟁(DS597)에서도 패널은 이를 ‘국가 간 또는 국제관계 여타 참여자와의 관계 붕괴 또는 준붕괴 상황’을 의미한다고 결론 내렸다.
즉, 패널은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 의미를 사전적 해석에서 출발해 ‘극도로 중대한 상황’으로 해석하고, 특히 (iii)호 ‘전쟁’과 (i), (ii)호를 고려할 때 이는 사실상 국제관계의 붕괴 또는 준붕괴를 나타내는 상황에 해당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로 인해 패널은 미국이 자국 상황을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로 입증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참고로 러시아·우크라이나 통과운항 분쟁(DS512)에서 패널은 ‘무력충돌’을 근거로,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지재권 분쟁(DS567)에서는 ‘외교, 영사 및 경제관계의 단절’을 근거로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긴급 시’ 존재를 인정한 바 있다].
여기에 미국은 WTO 패널 판정이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패널의 해석에 따르면 회원국은 무력충돌 혹은 관계 붕괴에 직면해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기 전까지 자국의 필수적 안보이익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돼 주권국가의 현실을 경시하는 결론이라는 입장이다. 미국은 회원국의 GATT 21조 원용을 전쟁이 임박한 상황 등으로만 좁힐 경우 극단적인 상황을 막기 위한 회원국의 행동을 제약하며 당초보다 더욱 부정적 상황이 초래될 것이라고 보는 것으로 관측된다.
‘예외’ 여부 다투기보다 대안적인 해결책 찾자는 목소리 나와
GATT 21조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이 공존하는 가운데 이를 다른 방향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도 등장하고 있다. 가령 ‘국가안보 예외’ 이슈를 ‘소송(litigation)’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안보 예외 발동에 대한 ‘재균형(rebalancing)’ 작업을 통해 예외 발동의 부정적 영향을 받게 되는 회원국들을 구제하자는 제안이다. 즉 GATT 21조를 대상으로 ‘원칙’과 ‘예외’를 다투기보다 ‘예외’ 원용을 인정하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1월 WTO 분쟁해결기구 정례회의에서 미국은 ‘다른 회원국의 필수적 안보 조치로 영향을 받은 회원국에 대한 적절한 구제는 비위반 (조치) 무효화 또는 (비위반 조치에 따른) 침해를 주장하는 것’이라며 현재 WTO 체계는 본래부터 국가안보와 관련해 회원국의 주권적 책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가능하게 설계돼 있음을 강조했다. 그간 현행 WTO 규범상 비위반 제소의 경우 제소국 입증 부담, 판정 도출까지의 장시간 소요 등을 고려할 때 효과적인 대응책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국가안보 예외에 대한 신속 재균형 협의 메커니즘을 마련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즉, 국가안보 예외 발동은 주권국가의 결정사항이나 이 경우 반드시 상응하는 비용(관세 인상 등)을 지불하도록 시스템을 설계한다면, 이는 자동으로 여타 회원국들의 피해, 발동 남용 가능성 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실질적·효과적 보상책 제공 가능성, 보상협의 지연 시 해결방안 등 후속 논의가 동반돼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국가안보 이슈는 다양한 영역에서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신흥 안보 위협에 대한 각국의 관심과 대응수단도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안보, 경제 등이 패키지로 운영되는 추세에서 WTO 규범의 ‘원칙’과 ‘예외’ 간 미묘한 균형 달성은 난제지만 동시에 다자무역체제의 안전성과 예측가능성이 지속되도록 하기 위한 필수 과제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