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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개혁 논의, 이번에는 WTO 위기설을 잠재울 수 있을까?
안홍상 주제네바대표부 참사관 2023년 05월호

얼마 전 1995~1999년 WTO 사무차장을 역임한 김철수 전 통상산업부 장관이 제네바를 방문했다. 1995년 출범한 WTO는 당시 모두의 이목을 끌었던 국제기구로서 그때를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큰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또한 WTO 출범 시기부터 근무한 사무국 직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새로운 무역질서를 만들어간다는 희열에 밤늦게까지 일해도 즐거움이 가득했다고 한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WTO 각료회의가 열리는 도시에는 대규모 시위대가 등장하는 등 WTO 각료회의는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지난해 6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제12차 각료회의(MC­12) 때는 시위대는커녕 차량 통행을 제한하지 않았다면 현지 시민들조차 각료회의가 개최된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WTO 위기설’은 해묵은 이슈다. 일부 회원국은 생존의 문제라고까지 표현한다. 다행히 회원국이 합심해 채택한 MC­12 결과문서(outcome document)는 분쟁해결(dispute settlement)을 제외한 WTO 기능(규범 제정, 모니터링·심의 등)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제13차 각료회의(MC­13)에서 그 결과를 보고토록 규정하고 있으며, 2024년까지 완전히 작동하는 분쟁해결체제를 복원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다만 2024년 2월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개최될 MC­13이 약 10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도 WTO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은 그려지지 않고 있다.

 

비공식 논의 통해  ‘분쟁해결 기능’ 개혁에 가시적 진전,
7월까지 합의 도출해 9월부터 문안에 기반한 협상 진행


그나마 ‘분쟁해결 기능’에 대한 개혁은 가시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다. 2019년 12월 상소기구 기능이 마비된 이래 다양한 분쟁해결체제 정상화 노력이 이뤄졌으나 모두 실패했고, 그 주요 원인으로 미국의 참여 부재가 지목되곤 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부터 올해 1월까지 미국이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회원국의 참여를 전제로 분쟁해결 기능 개혁에 대한 비공식 논의를 이끌어왔다. 미국은 공식적인 회의 형식을 갖추면 각국이 자국 입장을 고수해 회의 진전에 장애가 될 것이라며 비공식 논의를 주장했다.

4~9월에 걸친 1단계 회의에서는 회원국들이 각각 생각하는 이상적인 분쟁해결체제의 원칙 또는 요건을 제안하고 이를 설명했다. 우리나라 등 대다수 국가는 현재 분쟁해결양해(DSU)의 원칙과 규정에 입각한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 미국은 지난해 10월에서 올해 1월까지의 2단계 논의에서 1단계 내용을 바탕으로 재심(상소) 제도 등 12개 주제를 제시하고, 각 주제에 대해 분쟁해결 기능에 필요한 회원국의 구상(conceptual idea)을 제안하도록 했다. 다시 말하면 우선 분쟁해결 기능이 가져야 할 기본 원칙을 설정한 후의 ‘뼈대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미국의 정확한 의도에 대해서는 회원국마다 의견이 갈린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미국이 MC­12에서 합의한 결과를 형식적으로 이행하려는 노력에 불과하고 결국 시간을 끌기 위한 시도라는 회의론적 시각이었다. 한편 일부 개도국들은 비용 문제와 역량 부족으로 분쟁해결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만큼, 이러한 기회를 통해 접근성을 높이고 특혜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였다. 모두 일리 있는 태도다. 다만 미국 내 WTO 분쟁해결 기능에 대한 회의론적 시각이 지배적인 만큼, 미국은 개별 회원국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미국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입증하고 그간 보여준 스스로의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한편 자국의 입장을 구체화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 아닌가 싶다.

미국 주도의 2단계 논의 이후 올해 2월부터는 ‘비공식적인 조정자(facilitator)’ 신분으로 마르코 몰리나(Marco Molina) 주제네바 과테말라대표부 차석이 논의를 이끌어가고 있다. 인도 등 일부 국가가 조정자 추천 과정의 불투명성을 근거로 미국이 추천한 몰리나 차석의 조정자 임명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회원국들은 그간 논의를 바탕으로 세부 분야별로 현재 체제를 개선할 수 있는 사항들을 제안하고, 7월까지 이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9월부터는 문안에 기반한 협상을 할 계획이다. 최종 목표는 연말까지 분쟁해결 기능 개혁 패키지를 구성해 내년 2월 MC­13까지 성과를 내겠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몇몇 국가가 의미 있는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분쟁해결 기능을 자주 활용한 국가로서 과거 경험 등을 바탕으로 일부 진정성 있는 개혁안을 제시해 다수 회원국의 호응을 끌어낸 바 있다.

갑론을박 속에 전개되고 있는 분쟁해결 기능에 대한 개혁 논의와는 달리 ‘모니터링·심의(monitoring?&?deliberative) 기능’에 대한 개혁 논의는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선진국을 중심으로 WTO 사무국 기능 개선, 투명성 제고 방안 등 ‘손에 잡히는’ 개혁 사항을 논의해 왔고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개도국의 경우 개발과 포용성 증진을 위한 WTO 개혁을 목표로 하며, 기존 WTO 규범이 선진국에 유리하게 작성돼 전체적인 균형 재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투명성·통보 등 규범에서 개도국에 추가 부담을 지우는 것은 곤란하고, 발전 단계를 고려한 개도국 특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간 선진국들은 상향식 개혁, 행동을 통한 개혁 등을 계속 주장해 왔다. WTO 기구에서 ‘작지만 쉽게’ 개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항을 논의할 것을 제안해 WTO 상품·서비스 이사회 등에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규범 제정 또는 협상 기능’ 개혁은 선진국·개도국 이견 극명…
‘서비스 국내규제’는 이행 직전 인도·남아공의 이의 제기로 제동


대립이 가장 첨예한 분야는 바로 ‘규범 제정 또는 협상(rule-making or negotiation) 기능’ 개혁으로, 선진국과 인도·남아공 등 일부 개도국 간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분야다. 1995년 WTO 출범 후 기후변화, 디지털 전환, 보건 이슈 등 통상 환경의 변화로 새로운 규범이 제정돼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반면, 2001년 도하개발라운드에서 완수하지 못한 과제부터 마무리 짓고 가야 한다는 인식도 있어서 출발점부터 상이한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한편 2017년 제11차 각료회의(MC­11) 이후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관심 있는 국가끼리 복수국 간 협상 형태로 서비스 국내규제, 투자원활화, 전자상거래 등을 논의하는 공동성명 이니셔티브(JSI; Joint Statement Initiatives) 협상이 출범했다. 당초 목적은 협상을 빠르게 진전시켜 도출한 결과를 WTO 기존 협정 내 편입함으로써 새로운 규범을 제정하고 협상 기능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2021년 12월 최초로 타결된 ‘서비스 국내규제’는 지난 2월 초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는 수순이었으나, 인도와 남아공이 종료 직전에 양허표 수정사항의 효과와 법적 근거 등을 이유로 이의를 제기해 현재 협의가 진행 중이다. 새로운 WTO 규범은 전체 회원국이 참여하는 다자협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온 인도와 남아공 등 일부 국가는 이러한 차원에서 딴지를 건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서비스 국내규제는 수정된 양허표를 각국이 스스로 적용하고 다른 국가들이 이에 대한 혜택을 향유한다는 점에서 비교적 쉽게 수용될 수 있다고 생각됐으나 이마저 제동이 걸린 상황이다. 상반기 타결이 유력한 ‘투자원활화’나 연말 타결을 목표로 하는 ‘전자상거래 협상’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규범을 제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규범이 기존 WTO 규범 내 편입되는 것이 더욱 요원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이러한 WTO의 3대 기능 외에도 개혁을 명분으로 현재의 체제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우선 개도국들의 모임인 G90의 개도국 특혜 관련 제안서를 들 수 있다. 개도국들은 개발(development), 특히 개도국 특혜(special?&?differential treatment)가 WTO 개혁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입대체보조금이나 수입제한조치 허용 등 WTO 규범에 대한 자의적 위반을 가능하게 해 취지를 무색케 하는 사항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에 선진국들은 해당 논의 자체를 반대해 선진국과 개도국 간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올해 3월 초 아프리카 그룹이 제안한 산업개발을 위한 정책 재량(policy space) 확보 제안서도 흥미로운 사례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후변화 대응, 산업화 목적 등을 위해 WTO 규범의 일부 예외와 수정이 필요하다며 개도국에 대한 국산부품 사용 요건의 허용, 허용보조금의 부활 및 이용 허용, 기술이전에 대한 접근성 강화 등을 주장한다.

최근 개도국뿐만 아니라 EU도 통상정책에 대한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WTO 심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부 일방주의 정책을 옹호하고 있다. 정부의 산업 개입 정책, 보조금 개혁 등을 심층 논의하기 위한 별도 회의체 신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필요한 국제교역제품 탄소배출량 측정 방법 등을 논의하기 위한 심의 필요성, 개발과 포용성 측면에서의 논의 강화 등을 제안한다. 이는 EU의 일방주의적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투명하게 논의하자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국가들은 논의 자체에 찬성은 하면서도 구체적인 논의 방식 및 주제 등에 의문을 제기하며 EU의 의도에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예상외로 큰 성과 낸 제12차 제네바 각료회의 이어
내년 2월 제13차 회의 때 ‘아부다비의 기적’ 일어나길


최근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수산보조금 협상 타결 등 다수의 성과를 도출한 MC­12를 ‘제네바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계하며, 차기 각료회의에서도 지속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MC­12를 앞두고 협상 성공을 예상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비관적인 상황에서 이처럼 커다란 성과를 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다가올 MC­13에서는 지난 MC­12 각료들이 합의한 결과문서에 따라 WTO 개혁이 최우선 순위로 고려될 예정이다. 그러나 WTO 개혁과 관련해 아직 분야별로 갈 길이 먼 상황인 만큼 다수의 회원국은 WTO의 위기가 당분간 계속되리라 예측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문해 본다. WTO를 살리는 차원에서 ‘아부다비의 기적’을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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