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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EU의 경제안보 입법, 선진 정책인가 생존 전략인가
송은지 주벨기에EU대사관겸주NATO대표부 2등서기관 2023년 06월호

2023년은 EU라는 단일시장이 출범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27개 회원국 총 4억4,700만 인구의 EU는 GDP 세계 3위(17조2천억 달러), 세계 무역규모 2위(4조3천억 달러) 그리고 세계 구매력평가지수 1위라는 거대한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EU라는 단일시장은 상품과 서비스,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넘어 이제는 공동의 가치를 지향하는 하나의 지정학적 공동체로 전진하고 있다.

방위안보 차원에서 고안됐던 ‘전략적 자율성’,
미국 보호주의 등으로 EU의 경제·통상 정책목표로 자리 잡아


최근 몇 년 동안 발표된 EU의 대외정책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용어는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이다. 즉 EU가 스스로의 이익과 정책을 여타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겠다는 것이다. 본래 방위안보 차원에서 고안됐던 이 개념은 이제 EU 집행위의 경제·통상 정책목표로 자리 잡았고, 인권, 기후변화 대응 등 EU의 대외정책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됐다. 실제로 샤를 미셸 EU 상임의장은 올해 4월 프랑스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몇 년 전에 비해 EU의 전략적 자율성에 큰 도약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최근 EU가 경제안보 분야에서 전략적 자율성 확대를 추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우선 미국의 보호주의적 통상정책과 자국 우선주의적 행보로 기존의 대서양 동맹에 대한 EU의 신뢰가 하락했고, 이는 유럽 자체의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을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더해 코로나19 확산으로 국가별 봉쇄정책이 시행되고 세계의 공급망이 교란되는 가운데 유럽이 원자재 가격상승과 공급부족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 것도 한 요인이다. 아울러 지난해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EU는 그간 가스와 전력, 핵심원자재, 첨단기술과 부품 등 필수적인 산업기반을 중국·러시아 등 특정 국가에 과다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



EU는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규모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며, 지난해 EU의 대중국 수입의존도는 약 20.8%로 다른 어떤 나라에 대한 의존도보다 높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중국으로부터의 완전한 경제적 분리(decouple)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EU는 앞으로 경제리스크 완화(derisk)에 집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따라서 EU가 주창하는 경제안보의 자율성이란 유럽에 위협이 되는 제3국의 비시장 관행에 대응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중립성을 유지하며 공정한 경쟁의 장을 유지하는 중도적 노선에 가깝다. 그래서 미국과 달리 EU는 직접적인 대립구도를 형성하거나 특정 국가를 직접 거론하는 행보는 자제하고 있다. 그보다는 기존에 비해 환경, 인권 등의 기준에서 더 까다로운 규범을 만드는 방식으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노선을 고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EU가 발표한 몇 가지 대표적 법안을 살펴보기에 앞서, EU의 법안이 공식 채택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EU의 정치 체계는 27개 회원국 간 합의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다소 복잡한 형태를 띤다. 법안 초안이 발의되면 집행위, 이사회, 유럽의회 등 3대 주요 의사결정 기구의 협의를 거쳐 최종 문안이 채택된다. 여러 기구를 거치다 보니 통상적으로 법안 제안부터 관보 게재까지 최소 1~2년가량 소요된다.

EU 집행위가 법안 초안을 발표하면 EU 이사회와 유럽의회가 내부 협의를 거쳐 각자의 수정안을 제안하고, 각 수정안을 바탕으로 기구 간 조정을 위한 ‘3자 협의’가 진행된다. 집행위, 이사회, 유럽의회가 최종적으로 합의한 문안은 EU의 법안으로 공식 채택된다. 물론 집행위 초안에 여타 기구들이 이견 없이 동의할 수도 있으나 각 기구의 정치적 입장과 회원국 간 이견 등으로 인해 그럴 확률은 현저히 낮다. 따라서 EU 내부의 협의과정에서 법안의 성격과 범위가 초안 대비 상당 부분 변화하기도 한다.

각종 입법과 정책에 환경·인권 등 국제사회적 가치 결부…
결국 치열한 경쟁에서 우위 점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비판도


최근 우리가 주목할 만한 EU의 경제정책 법안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지난해 9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의 국정연설에서 예고돼 올해 3월 16일 공개된 EU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s Act)」이다. 이 법은 공식 발표 전부터 관련 업계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발표된 초안은, 제3국으로부터 니켈, 리튬, 망간, 구리 등 16종 전략원자재를 수입하는 경우 2030년까지 특정국에 대한 수입의존도를 65% 이하로 낮출 것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EU 역내에서의 전략원자재 채굴·처리·재활용 목표 비율도 제시하고 있다. 2016~2020년 통계에 따르면 33종의 EU 핵심원자재 중 21종에 대한 최대 공급자가 중국인 만큼, 「핵심원자재법」은 EU가 단일시장으로서 갖는 리스크를 완화할 수 있는 중요한 법적 도구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법안 초안은 또한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대기업들에 전략원자재 공급망에 대한 감사 의무를 부과하는데, 향후 관련 내용이 국내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계속 살펴봐야 한다.

다음으로 「핵심원자재법」과 같은 날 공개된 「탄소중립산업법(Net-Zero Industry Act)」이다. 이 법안은 2030년까지 태양광, 풍력, 배터리 등 8대 탄소중립 기술 연간 수요의 최소 40%를 EU 역내에서 조달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위한 기술혁신과 인프라 지원 방안 등을 규정하고 있다. 또 탄소중립 기술과 그 제조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EU가 기존의 복잡한 행정절차를 간소화하는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법안 발효 후 유럽으로의 투자유치가 확대되면 EU는 탄소중립과 기후목표 달성에서 큰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주목할 만한 다른 법안은 EU의 ‘공급망 실사 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이다. 기업활동이 인권과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방지하고 EU 역내외 기업 간 공평한 경쟁의 장을 조성하기 위해 지난해 2월 제안됐다. 이 지침은 아직 내부 협의 중이지만 최종 문안에 따라 기업 매출액과 직원 수 등을 기준으로 선정되는 EU 역내외 기업은 공급망에서의 노동, 인권, 환경 등의 부정적 영향을 실사할 의무를 갖게 되며 피해 구제를 위한 절차 등도 도입해야 한다.



이 정책은 앞서 기술한 2개 규정(regulation)과는 달리 지침(directive)으로 제안됐기 때문에 EU의 최종 합의만으로 적용되지는 않으며, 개별 회원국들이 별도로 국내법을 제정한 이후에 실질적 효과가 발생한다. ‘공급망 실사 지침’은 환경보호, 노동권 존중과 같은 무형적 가치를 보호하고 촉진한다는 점에서 EU 지도부가 지향하는 글로벌 리더십을 드러내고 있다. 향후 유럽 내 ‘공급망 실사 지침’이 보편화되면 우리 기업도 제품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노동조건, 환경오염, 산업재해 등 관련 체계를 점검하고 관리해야 하므로 그 영향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EU 지도부는 그린 전환과 디지털 혁신을 양대 축으로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고 유럽의 산업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언급된 세 가지 법안 외에도, EU는 「반도체법」, 「인공지능법」, 「디지털시장법」과 「디지털서비스법」, ‘핏 포 55(Fit for 55)’ 패키지 법안 등 다양한 분야의 입법을 통해 EU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국제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들을 각종 입법과 정책에 명시적으로 결부하는 EU의 행보는 분명 혁신적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결국 치열해지는 경제 분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집행위가 고안하는 수많은 정책이 실제로 적용됐을 때 기업과 시민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 파급효과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다수다.

단일시장이 주는 혜택 최대한 활용하면서
EU의 새로운 기준에 부응할 수 있는 역량 강화해야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EU의 경제입법과 정책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언제나 내재돼 있다. 무역의존도가 높고 대중국 중간재 수출이 많은 우리나라는 EU·중국 간 공급망과도 밀접히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세 법안의 경우 EU 역외국이나 기업들에 대한 차별적 대우나 조치가 명시돼 있지는 않고, EU의 각종 인센티브 정책들이 오히려 우리 기업에는 유럽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복수의 EU 정책이 연계됐을 때 어떤 효과를 낳을지는 미지수이며, EU의 선도적 입법이 개별 회원국이나 제3국의 유사한 입법으로 이어지는 등의 부수적 효과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EU의 단일시장이 주는 기회와 긍정적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살피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EU의 새로운 기준들에 부응할 수 있는 국내 역량을 강화하고 환경을 조성하면서, 필요하다면 우리도 비슷한 노선에 합류하는 선택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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