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산업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대부분 ‘농업’이라고 답할 것이다. 농업 생산과 관련된 의사결정 중 다수가 날씨와 직결돼 있고, 그 결과도 날씨에 따라 상당 부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벨기에에서 근무하면서 만난 이곳 사람들에게서는 ‘유럽인들이 기후변화에 따른 식량 안보 위협을 크게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유럽 자체가 식량 순수출 지역이고, 벨기에는 그 중심부에 위치해 안정적인 식생활을 누리고 있는 점이 분명 영향을 줬을 것이다.
전쟁 장기화 속 식량 문제 해결하기 위해 친환경 의무 유예…
우크라이나 식량 수출 지원 등 둘러싸고 갈등 심화
그러나 최근 이런 분위기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식량 안보 우려와 연이은 이상기후 현상으로 식량 생산이 차질을 빚고 식료품 가격이 상승하면서 유럽인들도 이제 기후변화와 식량 안보 문제를 일상에서 체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EU 농정의 핵심 이슈가 됐다. 단기적으로는 당장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식량 생산과 유통이 원활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주목받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농약과 비료를 줄이면서도 기후변화에 따른 생산 차질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미 EU는 올해부터 강화하기로 한 여러 가지 친환경적인 조치나 의무에 대해 일시적으로 유예 조치를 도입해 유럽 내 식량 생산이 충분히 이뤄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의 농산물 수출이 러시아의 흑해 봉쇄로 어려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무관세 수입을 허용하고 인접국 육로 등을 활용해 수출을 촉진하는 이른바 ‘연대회랑(solidarity lane)’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이런 조치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첫째, 친환경적 의무 유예와 관련해 EU 내부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하고 있다. 농업인들이 직불금을 받으려면 생물다양성 보존이나 토양 보호에 도움이 되도록 작물 돌려짓기(윤작) 또는 일정 비율 이상의 농지 면적을 휴경토록 한 의무가 있는데, 이런 의무의 유예를 내년에도 연장하자는 제안이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루마니아는 기상 여건 악화에 따른 작황 부진과 물가 상승에 따른 투입재 비용 상승으로 농업인들이 파산위기에 처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친환경 의무 유예를 한시적으로 연장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유예를 반대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윤작과 휴경을 통해 확보한 농업 환경의 다양성 그 자체가 기후변화에 대한 농업의 회복탄력성을 높이기 때문에 당장의 생산량만 고려하는 근시안적인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시각에서는 윤작과 휴경이 생산 확대의 걸림돌이 아니라 농업 생산을 보호하는 근본 대책이기 때문이다. 지난해와 올해에 이어 내년까지 예외적으로 의무를 유예하는 것은 EU 집행위 입장에서는 예외 조치의 근거가 되는 법령 개정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수용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둘째,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제3국 수출 지원을 둘러싸고 논쟁이 격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이 폴란드, 루마니아 등 우크라이나 인접국에 직접 풀리면서 이들 국가의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고 농가의 경영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농가가 파산하면 당장 내년 EU의 농산물 생산 자체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 결과 EU 집행위는 지난 5월부터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등 우크라이나 인접 5개국에 대해서는 해당 국가 시장 내에서 밀, 옥수수, 유채씨, 해바라기씨 등 우크라이나 농산물 판매 및 유통을 불허하되, 제3국으로의 환적은 허용하는 타협안을 제시해 한시적으로 시행해 오고 있다. 일종의 임시방편이다.
문제는 전쟁의 장기화로 점점 경제 여건이 어려워지는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주요 수입원인 농산물 수출에 필요한 시장을 제공해 주길 EU에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최근 논의되는 신규 운송루트 발굴 등과 같이 갈등 국면에 있는 양측 모두를 만족시킬 대안을 발굴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기후변화와 식량 안보 해결사로 주목받는 신유전체기술,
GMO와 달리 종 내 유전체 편집으로 빠르게 새 품종 개발
유럽에서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곧 농약에 대한 규제 강화로 연결되는 경향을 보인다. 2019년 발표된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과 이를 구체화한 ‘농장에서 식탁까지 전략(Farm to Fork Strategy)’에서 EU가 2030년까지 고위험 농약사용량을 50%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정한 것을 봐도 EU가 농약에 두는 정책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농업 현장에서는 이 정책이 비현실적인 목표이고 농업과 식량 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몰이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인한 글로벌 식량 안보 우려는 이 같은 목소리에 힘을 더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회원국별 농약 감축 목표를 정한 ‘농약의 지속 가능한 사용에 관한 규정안(SUR; Sustainable Use of Pesticides Regulation)’이 지난해 발표됐지만 입법 절차 진행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래서 주목을 받는 것이 신유전체기술(NGT; New Genomic Techniques)에 대한 규제 완화다. 환경 보호를 위해 농약사용을 줄이면서도 극심해지고 있는 기후변화 상황이나 질병을 견딜 수 있도록 하려면 새로운 품종의 개발이 필요한데, 신유전체기술을 활성화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EU는 신유전체기술을 살아 있는 유기체의 유전체에 표적 돌연변이(돌연변이 유발)를 생성하는 방법, 즉 유전체 편집기술로 정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2년에 소개된 ‘유전자 가위’는 단일 염기 수준에서 DNA를 정밀하게 편집할 수 있으며, 이를 활용하면 통상 10년 이상 소요되는 전통적인 육종보다 훨씬 빠르게 새로운 품종을 개발할 수 있다고 한다. 개별 종 내의 유전자를 편집하는 신유전체기술은 유럽에서 그동안 엄격하게 규제해 온 유전자재조합식품(GMO)과는 차별성이 있다고 EU는 강조하고 있다. GMO는 통상 서로 다른 종 간 유전자 이식을 통해 개발된다.
2018년 EU 사법재판소는 신유전체기술을 통해 개발된 제품이 GMO로 분류되며 GMO 관련 법률에 따라 처리돼야 한다고 판결했다. 결국 신유전체기술을 활용해도 여타 GMO와 동일하게 큰 비용과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위험평가 및 승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규제가 적용되면 신유전체기술을 활성화하기 매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특히 식량 안보와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새로운 규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전통적 육종방식으로 발생할 수 있는 범주의 신유전체기술은
GMO 법률 적용 면제하고 그 외는 절차 간소화
결국 EU 집행위는 지난 6월 신유전체기술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규정안을 발표했다. 신유전체기술을 두 개의 범주로 구분해 자연적인 교배 또는 전통적인 육종방식으로 발생할 수 있는 범주의 기술이 적용된 작물(범주 1)은 GMO 법률의 적용을 면제해 복잡한 위해평가 등을 거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 외(범주 2)의 경우에는 현행처럼 GMO 법령의 적용을 받아 시장 출시 전 위험평가 및 승인을 받도록 하되, 평가절차를 간소화하거나 평가가 신속하게 진행되도록 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최근 EU에서 논의되는 모든 농정 이슈에서 기후변화와 식량 안보는 빠지지 않고 있다. 농업인들이 이행해야 하는 각종 친환경 의무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이 기후변화적 측면에서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식량 안보를 위해 적용을 미뤄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신유전체기술도 환경론자들의 반대에 직면해 있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기후변화 영향에 따른 극한 기상 현상의 타격이 컸다. 우리 농업의 미래, 우리 식량 안보의 관점에서 농약을 비롯한 투입재에 대한 EU의 각종 규제 강화와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신유전체기술과 관련한 규제 완화 움직임이 주는 시사점을 우리도 진지하게 검토하고 적용방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활성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