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UAE 아부다비에서 열릴 각료회의(MC-13)를 앞두고 WTO의 사무국과 각국 대표단은 분야별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고민이 한창이다. 최근 많은 국제기구가 자성과 개혁 노력을 거듭하고 있지만 WTO는 조금 더 진지한 듯하다.
미국이 상소기구 패널 임명을 3년 넘게 보이콧함으로써 분쟁해결기능이 중단됐고, 다양한 사안에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 지난한 대립이 지속돼 온 가운데 다자무역규범 형성 또한 진전이 더뎠다. 무역현안을 심의하고 감독하는 각 이사회와 소위원회의도 특별한 논의 없이 상설화된 의제에 대해 잘 알려진 각국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규범 형성, 분쟁 해결, 모니터링·심의라는 WTO의 주요 기능 세 가지가 다소 긴 시간 동안 큰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WTO와 회원국의 위기의식이 오래 존재해 왔다.
국제사회·경제 방향 예측하고 미래 준비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는 WTO
야근과 주말근무라는 전통적인 업무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맡은 일과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고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처럼, WTO가 해온 기능이 예전만큼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WTO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논의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행간을 읽어보면, 많은 회원국이 국제사회와 경제의 방향을 예측하고 미래를 먼저 준비하는 장소로 WTO를 활용하고 있다.
매 순간 논의에서 여전히 많은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해 철저히 준비하고 있으며,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는 회원국들은 치밀한 연구와 기발한 논리를 바탕으로 상대를 놀라게 한다. 분쟁해결기능 마비의 주범으로 지목된 미국은 물론 인력과 자원이 풍부한 여타 선진국 그리고 개도국도 자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사안에 대해 선택과 집중, 심지어 아웃소싱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을 지속하고 있다. 회의장 밖에서도 계속 다른 회원국 대표단과 접촉하면서, 누구와 손을 잡으면 더 효과적으로 본인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지를 장기적으로 모색해 나간다. 디지털, 서비스 그리고 환경 분야에서 특히 이런 모습이 눈에 띈다.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에 따른 영향을 최소화하고 인류 공동의 지속 가능한 번영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나고 자란 지구에 대한 당연한 책임이자 2004년 도하라운드 및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통해 국제사회가 다짐한 약속이다. 그러나 이런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각국의 조치가 기업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피하며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특정 조치의 기준이 세계적 표준이 되는 순간 그 표준 설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 이미 커져버린 시장에 뒤늦게 진출하고자 한다면 큰 경제적 비용을 지출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10월부터 본격 시행된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법안 검토 단계에서부터 많은 역외 국가의 우려를 낳았다. 지난 6월 EU의 무역정책을 회원국이 평가하는 무역정책검토회의(TPR; Trade Policy Review)가 있었는데, 90여 개에 달하는 발언국 중 CBAM의 무역 제한 가능성과 그에 대한 우려를 언급하지 않은 회원국은 거의 없었다.
무역 분야 환경 문제, 복수국 간 전자상거래 무역규범 수립, 전자적 전송물 관세 부과, 의료인력 이동성 등 논의 활발
무역의 환경 관련 측면을 검토해야 할 시급성이 날로 커지면서, WTO 내 설치된 ‘무역과 지속가능 환경협의체(TESSD)’ 회의에서 다양한 주제를 놓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상품, 서비스 등 세부 분야별로도 관련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대비해 회의장 밖에서는 일부 국가가 WTO 환경 논의의 방향성을 사전에 설정하고 주도하기 위한 구상을 유사 입장국들과 나누고 있다. 우리나라도 제네바 현지에서 환경서비스 분야를 중심으로 한 논의에 간간히 참석을 요청받고 있다.
너무나 급격하게 우리의 일상이 돼버린 전자상거래 분야도 ‘공동선언이니셔티브(JSI; Joint Statement Initiative)’라는 형태로 해당 분야 최초의 복수국 간 무역규범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그간 저마다 양자 또는 지역적 자유무역협정에 일부 챕터 또는 별도의 디지털 챕터로 포함하고 있던 내용을 다자적 규범으로 만드는 등 해당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여 온 호주, 싱가포르, 일본이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빅테크 기업을 다수 보유하고 그간 내부적으로 수준 높은 규범과 제도를 발전시켜 온 EU와 미국, 캐나다, 스위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저마다 자국에 유리한 질서를 국제규범으로 편입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한민국이 IT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뤘으며,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자상거래를 통해 영세사업자 및 중소기업의 성장을 포함한 경제적 이익을 크게 향유하고 있다는 점은 WTO 내에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관련 회의에서 디지털 무역의 이점을 논할 때 전문가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례다.
디지털로 전송된 서비스는 2005년 이래 교역규모가 3배로 급성장한 분야로, 상품 및 여타 서비스 분야의 평균 성장률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이런 영향으로 WTO는 2040년경이면 글로벌 교역에서 서비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 1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과거 관세를 내고 수입해 온 영화필름을 영화관에 찾아가 소비했던 시절의 영화와 달리 이제는 물리적인 필름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소비하는 전자적 전송물을 우리는 기존의 WTO 규범 내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 1998년 전례 없는 거래방식의 등장에 각료들은 우선 당분간 전자적 전송물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선언했고, 이 모라토리엄은 각료회의 때마다 연장돼 사실상 확립된 관행이 됐다.
그러나 인도, 남아공 등 일부 개도국들이 연장을 반대하면서 지난해 각료회의(MC-12) 결정은 모라토리엄이 ‘달리 결정되지 않는 한’ 다음 각료회의(MC-13) 때 또는 각료회의가 개최되지 않을 경우 3월 31일에 종료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난 25년간 전자상거래 활성화의 근간이 됐던 무관세 합의가 종료된다면, 경제·무역 주체들은 적지 않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한국은 모라토리엄 연장 찬성 국가로서 유사 입장국들과 긴밀한 공조 아래 대응해 나가고 있으며 동시에 그 과정에서 어떤 건설적 기여를 할 수 있을지도 고민하고 있다.
팬데믹을 경험한 우리가 보는 의료서비스는 어떠한가. 지난해 MC-12에서 각료들은 WTO에서 회원국이 향후 팬데믹에 대응할 방법을 고민할 것을 주문했다. 지난 10월 서비스무역이사회에서는 이런 위임사항을 회원국과 논의하기 위해 워크숍을 개최해 회원국의 경험과 그로부터 얻은 교훈을 공유했다. 조정과 협력, 범정부적 접근(whole of the government approach), 원격의료와 의료자격, 백신 인증서 상호인증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 그리고 디지털인프라 구축이 중요하다는 점 등이 회원국 정부 차원 발언에서 다뤄진 핵심 의제였다.
그런데 의료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을 보다 가까이에서 봐온 국제기구(WHO)와 의료인 단체(국제간호사협회)의 시각은 조금 달랐다. 이미 전 세계에 불균형적으로 분포돼 있던 의료인력들은 팬데믹을 계기로 보다 나은 처우와 업무환경을 찾아 이동하고자 하는 경향이 커졌으며, 이 같은 수급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이 긴요하다는 것이다. 인적이동성(human mobility) 증대에 따라 이제 서비스 무역에 노동 관련 현상을 함께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특색 있는 목소리를 내면서 건설적으로 논의에 기여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주도해 나가는 나라로
이처럼 불확실하고 복잡한 지금의 WTO가 MZ의 눈에는 오히려 기회로 가득한 무대로 보이기도 한다. 과거에 국익 또는 위상이라고 하면, 시장개방의 정도나 수출 규모 등 객관적 수치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이 컸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사실 대한민국의 객관적 지표는 WTO 내에서 이미 꽤 높은 수준이다. 이제는 특색 있는 목소리를 내면서 건설적으로 논의에 기여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주도해 나가는 나라, 그것이 MZ에게는 국격의 중요한 기준이 됐다.
디지털, 환경, 서비스 부문 모두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혹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해 온, 그리고 그 성장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온 익숙한 분야다. 본인들의 미래 후생과 직결되는 분야의 방향성을 논의하고 있는 이 시점은, 대한민국의 MZ들이 든든한 국력과 자원을 바탕으로 도전하고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는 좋은 타이밍이다.
WTO가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국위선양의 무대라는 점 또한 가성비를 중시하는 MZ의 관점에서 매력적인 업무다. 발언할 때마다 대표단들의 키보드 소리가 유독 더 빠르고 거세어지는 나라들이 있는데, 기록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다들 꼼꼼히 받아 적으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된 내용들은 각국 본부에 전달되고, 그 내용을 고려해 자국의 입장을 결정하며, 먼저 다가와 함께 손잡아 볼 것을 요청한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우리의 정책과 입장을 홍보하지 않아도 힘 있는 내용과 목소리로 하는 한마디 발언이 다른 나라를 쉽게 대한민국의 협력파트너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국제회의인 것이다.
물론 힘 있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 있는 내용이다. 앞서 언급한 환경, 디지털, 서비스 분야 모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분야의 전문성이 필요하며, 논의의 정교화 속도 또한 매우 빠르다. 전문성을 가진 집단 간의 긴밀한 소통과 협조를 통해 더욱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MZ가 또 누구인가.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과도 편하게 소통하며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세대다. 부처와 부서 간 칸막이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며 내용상으로도 충실하고, 미래 논의에 선도적으로 참여하는 자신감 넘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