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주파수 분배 및 전파통신 분야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회의인 세계전파통신회의(World Radiocommunication Conferences, 이하 WRC)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주최로 4년마다 개최돼 ‘세계전파올림픽’이라 불리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올림픽이 스포츠정신에 따른 공정한 경쟁의 장이라고 한다면, WRC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파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별, 국가별, 진영별로 치열한 경쟁을 펼치기 때문에 오히려 피 튀기는 전쟁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세계전파올림픽’보다는 ‘세계전파대전’으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해 말 열린 WRC-23은 ‘6세대 이동통신(6G) 후보 주파수 발굴’이라는 큰 화두를 둘러싸고 각국 간 열띤 논쟁과 전략 싸움이 이뤄져, 마치 본격적인 6G 기술 전쟁에 앞서 유리한 진영을 구축하기 위한 전투준비 태세와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디지털 심화 시대에 전파를 활용한 첨단기술은 국가 간 산업과 무역뿐 아니라 외교, 동맹 및 군사, 안보 영역까지 그 적용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그런 만큼 미국과 중국, 유럽 등의 글로벌 디지털 패권 경쟁과 대립이 고조되는 환경 속에서 우리나라가 펼치고 있는 활약상과 도전을 소개하고자 한다.
6G 후보 주파수 발굴, IMT 주파수 추가 지정 등
23개 의제에 대한 논의 진행돼
1864년에 설립된 ITU는 가장 오래된 유엔 산하 전문기구 중 하나로, 지난 160여 년의 역사 동안 주파수를 비롯한 ICT 기술 표준을 정하는 고유 역할을 통해 정보통신 기술과 네트워크의 발전 등 전 세계 ICT 확산을 주도해 왔다. ITU에서 정하는 주파수 관련 사항들은 경제적·산업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각국은 ITU 활동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4주간 열린 WRC-23에는 162개국 3,800여 명이 참가했으며,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필두로 24개의 유관기관이 참여하는 49명의 대표단을 구성해 지난 11월 20일부터 12월 15일까지 참가했다. 이번 WRC-23에서는 6G 후보 주파수 발굴 및 글로벌 이동통신(IMT) 주파수 추가 지정, 해상·항공 분야에서의 인명안전, 우주기상 관련 주파수 신규 분배 등 23개 의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1주 차에는 국가별 기고 내용을 바탕으로 같은 입장의 나라들을 모으기 위한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2주 차부터는 나라 간 활발한 교섭을 통해 국가별로 각 의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 발언을 이어나갔으며, 우리나라 역시 수시로 바뀌는 현장 동향을 분석하며 날마다 새로운 대응 전략을 수립했다. 대망의 3~4주 차는 수백 명의 국가별 대표단들이 매일 회의장에서 사활을 걸고 다퉜다. 회의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의제별로 하나둘씩 합의가 이뤄지면서 전쟁 같았던 치열한 여정이 마무리됐다.
우선 간략히 이번 회의의 성과를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4개의 6G 후보대역을 제안했고 이 중 3개의 대역(4·7·14㎓)을 6G 후보대역(총 3개)으로 최종 채택하는 성과를 냈다. 또한 미국 등과 공조해 6㎓ 대역의 WiFi 이용을 ITU 전파규칙에 명시했고, 항공기나 선박에서 인터넷 등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비정지궤도 위성을 통한 새로운 서비스인 이동형 지구국(ESIM; Earth Station In Motion) 운영 조건을 마련해 당초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최종 채택된 6G 후보 대역은 3개(4·7·14㎓),
모두 우리가 주도적으로 제안한 것
6G 통신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글로벌 통신패권 경쟁은 이미 2018년부터 시작됐다. 2018년 12월 중국 화웨이의 멍완저우 부회장이 체포되는 일명 ‘화웨이 사태’는 미국과 중국 간의 통신패권 경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4G 통신을 주도했던 미국과 5G를 주도하고 있는 중국을 중심으로 통신패권 경쟁과 대립이 고조되고 있던 만큼, 이번 WRC-23에서의 6G 경쟁은 두 국가 간 사활을 건 뜨거운 진검승부가 될 것으로 일찌감치 예상됐다.
미국은 마이크로소프트, 노키아 등 글로벌 IT 기업 연합체인 ‘넥스트 G 얼라이언스’를 2020년에 창설했고, 중국은 2019년도에 화웨이를 필두로 민관 합작의 6G 추진단을 출범하는 등 6G 선점을 준비 중이었다. 또한 세계 최초로 5G를 상용화한 우리나라, 3G 시대를 이끈 일본, 세계 최초 LTE서비스를 상용화한 EU도 정부·산학연 및 글로벌 공조를 통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며 6G 기술 선점을 위해 치열한 경쟁에 참가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5G 표준을 선점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6G 표준도 선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ITU에 ‘6G 비전 개발 그룹’ 신설을 제안, 삼성전자 최형진 수석연구원이 의장직을 수임하면서 ‘6G 비전’을 주도적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는 등 가시적 성과를 이뤄냈다. 6G 비전을 바탕으로 ITU에서는 6G 성능기준과 평가방법 관련 정의(2024~2026년), 후보기술 제안(2027~2028년) 및 평가·선정(2028~2029년) 과정을 거쳐 6G의 상용화가 예상되는 2030년에 맞춰 6G 표준에 대한 개발 및 승인을 완료할 계획이다.
6G 기술과 표준이 주파수를 통해 구현되는 만큼 WRC-23에서 6G 후보 주파수 발굴은 가장 뜨거운 주제 중 하나였다. 6G의 효과적인 활용과 상용화를 위해서는 기술과 산업 생태계에 맞는 주파수 발굴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마다 주파수 이용환경이 다른 만큼 이번 회의에서는 국가별로 가장 유리한 대역을 발굴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퉜다. 각 지역 기구 및 회원국은 총 11개의 기고서를 통해 23개의 6G 후보대역을 제안했다. 최형진 수석이 의장을 맡은 실무작업반 논의를 시작으로 총 13번의 공식 회의와 수차례의 비공식 회의가 진행되면서 유례없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이후 상위그룹의 회의를 거쳐 23개 대역 중 단 3개의 대역(4·7·14㎓)만이 6G 후보 대역으로 최종 채택됐는데, 이 3개 대역 모두 우리나라가 아태지역 공동입장에서 주도적으로 제안한 것이다.
5G 등에서 즉시 이용 가능한 IMT 추가 주파수 지정과 관련해서는 크게 3개 대역에서 지역 내 국가 간 첨예한 대립이 진행됐다. 우선 3.3~3.4㎓ 대역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2지역 전체에서 IMT 추가 지정에 성공했으나, 유럽·아프리카 등이 포함된 제1지역은 무선측위, 레이다 등 무선표정서비스(RLS; radio location service) 보호를 위해 프랑스·독일·러시아가 추가 지정에 반대하며 결국 아프리카 도서 및 중남 아프리카 국가로 그 이용이 한정됐다. 3.6~3.8㎓ 대역은 제2지역의 경우 IMT 추가 지정과 더불어 IMT 주파수 확산 추세를 이뤄냈으나, 제1지역은 러시아의 위성 등 기존 업무 보호 입장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이 주석 추가에 실패했다.
특히 6㎓ 대역을 둘러싸고 화웨이와 중국의 야심찬 시장 확산 전략과 더불어 세계이동통신사업자연합회(GSMA)가 가세한 IMT 진영과 우리나라, 미국, 인도 등 WiFi·위성 진영 간의 팽팽한 전술전이 펼쳐졌다. 6㎓ 대역은 지역별로 IMT와 비면허 주파수 공급 간 입장이 양분돼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업무(고정위성업무) 보호를 위한 IMT 기지국 출력 제한 이슈, 유럽·아프리카·아랍·러시아가 포함된 제1지역 외에 북남미·아태지역이 각각 포함된 제2~3지역 국가들에도 IMT를 지정하는 방안이 격렬히 논의됐다. 그중에서도 아태지역 국가가 포함된 제3지역은 중국 등 일부 국가들이 IMT 주석 추가를 강력히 제안했으나, 위성 이용을 선호하는 사모아·인도 등의 국가가 기존 업무 보호 입장을 내세우며 의견 대립이 극심해 중국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미국, 사우디 등과 양자회담을 통한 글로벌 정책 공조로 제1, 2지역의 6㎓ IMT 주석에 WiFi 이용을 명시하도록 대응했다. 전파규칙에 무선랜 이용이 명시된 것은 이번이 최초다.
이동형 지구국 운용 조건 마련으로
항공기·선박 내 인터넷서비스 가능한 환경 조성
통신기술이 빠른 데이터 속도와 우수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 발전해 왔듯이 위성통신 역시 기존 정지궤도 위성통신에서 더 높은 통신속도와 낮은 지연율을 제공하는 저궤도 위성통신 시스템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저궤도 위성 시스템은 위성통신, 우주관광, 우주 정거장 등 그 활용 분야가 확대되고 있으며, 특히 위성통신 분야는 미국의 스페이스X를 필두로 영국 원웹, 미국 아마존 등 민간 위성사업자를 중심으로 한 시장 선점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비정지궤도 위성의 전송능력 향상 허용 여부는 WRC-23에서 가장 주목받은 의제 중 하나였다. 저궤도 군집위성 사업자들은 현재보다 다양하고 안정적인 서비스 제공을 위해 비정지궤도 위성의 전송능력 향상을 희망하고 있지만 반대로 정지궤도 위성 사업자는 전파 혼신 가능성을 이유로 현재 규정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대치했다. 논의 결과 ITU는 현재 규정을 유지하기로 하고 향후 혼신 가능성에 대한 기술적 연구를 진행해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2027년 차기 회의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또한 ESIM의 운용 조건이 마련됐다. ESIM이란 지상통신망이 제공하기 어려운 항공기·선박 내에서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한 위성통신 시스템으로, WRC-23에서는 비정지궤도 위성 시스템과 통신하는 ESIM 운용에 대한 기존 업무(5G) 보호 기준 및 운용 규정이 개발됐다. 이에 따라 국내 이동통신망을 보호하면서도 위성을 통한 항공기나 선박 내 인터넷서비스 도입이 가능한 환경이 조성됐다.
6G 표준은 ITU 주파수 로드맵에 맞춰 강대국 기술진화 전략에 따라 장기적으로 추진된다. 우리나라는 올해 ITU로 6G 민간 전문가를 파견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앞으로 4년간 이뤄질 6G 주파수 공유 연구 등의 분야에서 ITU에 우리의 이해와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중국, 일본 등 주변 주요국과 전파국장회의를 정례화해 향후 WRC-27에서 논의될 6G 대역 대응 및 위성 관련 인접 국가와의 전파 혼신·간섭 논의 등 주요 국가와의 의제 협력과 아태지역에서의 전략적 동맹 등 주요 어젠다에 대한 성공적인 대응을 위해 전략적인 공조 및 글로벌 정책 협력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