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지난해 출시된 아이폰15 시리즈에 애플 역사상 최초로 USB-C 타입의 충전단자를 적용했다. 그동안 독자적 충전 규격인 라이트닝 케이블 충전방식을 고수해 왔으나 EU의 USB-C 타입 사용 의무화에 따라 애플도 충전단자를 교체하게 된 것이다. 이제 아이폰 사용자는 C 타입 단자가 적용된 노트북, 태블릿, 모니터 및 영상 장비를 보다 손쉽게 활용할 수 있고, 케이블 제조사도 C 타입 수요 증가에 따라 보다 저렴하게 좋은 품질의 케이블을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충전방식이 통일되면서 C 타입 외 추가로 필요했던 충전기나 충전케이블로 인한 전자 폐기물 역시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표준을 준수하면 기기 간의 호환성이나 상호 운용성이 증대함에 따라 시장이 확대되고 사용자는 물론 공급자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게 된다.
기술 표준의 단점 막기 위한 프랜드 계약 의무와
표준특허를 둘러싼 분쟁, 제조업으로도 확산
하지만 표준화에도 단점이 존재한다. 표준에서 제외되는 기술은 결국 시장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표준화가 경쟁을 제한할 수 있다. 특히 특허권이 부여된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되면 특허권자 이외에는 해당 제품을 생산하기 어렵고, 다른 사업자들은 특허권자가 요구하는 특허 실시료나 라이선스 조건이 과도할지라도 이를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표준으로 인해 새로운 사업자의 시장 참여와 경쟁이 제한돼 해당 분야의 기술 혁신이 저하되고 소비자의 비용은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 표준의 단점을 최소화하고 그 순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표준기술의 특허권자에게는 프랜드(FRAND; 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 계약과 같은 의무가 요구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LTE, 5G와 같은 통신 표준이나 MPEG(엠펙)과 같은 비디오 압축 표준은 국제이동통신표준화협력기구(3GPP), 국제전기통신연합(ITU)과 같은 국제 표준화 기구를 통해 정해진다. 표준화 기구는 특허가 해당 기술 분야의 경쟁을 제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표준화 과정에 참여하는 사업자에 특허 정보 공개를 요구한다. 이를 통해 참여 사업자들이 관련 기술의 특허 여부를 확인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표준으로 채택할 수 있다. 또한 특허권자에게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인 조건으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할 것을 확약하는 프랜드 선언서 제출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특허권자는 표준을 구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술인 표준필수특허(SEP; Standard Essential Patent)에 대해 과도한 로열티를 요구하거나 경쟁사에만 높은 금액의 로열티를 부과하는 등의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동안 표준필수특허와 프랜드 조건을 둘러싼 분쟁은 주로 전자·통신 분야에 집중돼 왔다. 과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성과 애플의 특허 소송에서도 삼성전자의 무선통신 분야 표준특허와 프랜드 조건 위반 여부를 문제 삼은 바 있다. 하지만 최근 사물 인터넷(IoT), 5G와 같은 기술이 발달하면서 차량이 인터넷에 연결돼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커넥티드 카가 등장함에 따라 자동차 제조사와 통신기업 간 특허 분쟁도 급증하고 있다.
유럽의 대형 통신 기업인 노키아와 독일의 자동차 제조사인 다임러 간의 표준필수특허 분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건 경과를 간략히 살펴보면 노키아는 자사의 무선통신 표준특허 침해를 이유로 다임러를 독일 법원에 제소했고, 이에 다임러는 프랜드 조건을 선언한 노키아의 특허침해 금지 소송이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을 금지하는 EU 기능조약 제102조 위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다임러의 부품 공급업체들도 “노키아가 부품 공급업체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거절했으며, 이는 표준특허권 남용이자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행위”라고 주장하며 EU 집행위에 조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독일 법원은 노키아가 프랜드 원칙에 따라 라이선스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다임러가 계약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며 노키아의 특허침해에 따른 금지청구를 인용했다.
이러한 소송 결과로 통신 특허료 지급을 거부하던 완성차업체들은 특허료를 지급하는 방향으로 지식재산권 정책을 변경하게 됐다. 이에 최근 벤츠, 제너럴 모터스(GM), 폭스바겐 그룹 등은 노키아, 에릭슨 등이 참여해 결성한 IoT 분야 표준특허풀 기업인 아반시(Avanci) 그룹과 차량당 29~32달러의 특허료를 지불하는 라이선스 계약을 맺게 됐다.
라이선스 투명성 확보 등 내용 담은 ‘표준필수특허 규정’,
통신업체 반발과 전문가 우려 속에서도 유럽의회 통과
이처럼 무선통신, IoT 기술 발전으로 표준필수특허의 중요성이 더욱 확대되고 이를 둘러싼 분쟁이 증가하자 EU 집행위는 표준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면서도 혁신에 대해 충분히 보상할 수 있는 표준특허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4월 표준특허 라이선스의 투명성 확보, 필수성 평가, 프랜드 분쟁 절차 확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표준필수특허 규정’을 제안한 것이다.
제안된 규정은 특허권자에게 표준의 구체적 내용과 이를 실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특허 등의 정보를 등록하도록 요구한다. 표준필수특허 정보를 등록하지 않을 경우에는 표준 이행과 관련해 특허권자의 표준필수특허 침해에 대한 청구가 제한된다. 또한 표준필수특허가 실제 표준을 구현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지를 전문가가 검증하도록 하는 한편, 특허 라이선스 협상을 지원하기 위해 전문가의 참여하에 협상이 9개월 이내에 종료되도록 하는 협상 메커니즘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에 대해 에릭슨, 노키아 같은 통신업체들은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들은 특허권자의 관점을 무시한 일방적이고 불균형한 법안으로 유럽 특허의 가치를 떨어뜨려 혁신에 대한 미래 투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이동통신과 같은 핵심 분야에서 유럽이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재산 분야의 전문가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표준필수특허 등록부의 관리, 표준필수특허에 대한 필수성 점검, 프랜드 결정 등을 유럽지식재산청(European Union Intellectual Property Office)이 담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현재 유럽지식재산청은 주로 상표, 디자인 업무를 수행하고 있어 표준필수특허와 프랜드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유럽의 특허 업무를 담당하는 유럽특허청(European Patent Office)의 안토니오 캄피노스 청장은 유럽의회에 보내는 서한에서 유럽특허청은 이미 유럽 특허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으며 특허와 표준 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음에도 법안에 대해 어떠한 협의도 요청받은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반면 자동차 업계를 비롯해 특허를 실시하는 사업자들은 새로운 규정을 통해 균형 잡힌 라이선스 협상이 촉진되고 불필요한 소송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기술 개발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며 법안을 환영하고 있다.
뜨거운 논란 속에서 법안은 지난 2월 유럽의회에서 승인됐으며, EU의 고유한 입법 절차에 따라 EU 회원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EU 이사회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법안이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최종 채택될 경우 그동안 판례 해석에 크게 의존해 운영되던 표준필수특허 제도를 규정으로 명문화한 사례로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디지털 기술 발달로 우리 전통 산업군도 표준특허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 높아…글로벌 제도 변화에 관심 갖고 대비해야
EU 회원국의 특허 제도를 하나로 통합하는 초국가적 특허 시스템인 단일 특허(단일 효력을 갖는 유럽 특허의 약칭. 기존 유럽 특허와 동일하게 유럽특허청에서 출원·심사·등록 절차가 진행되지만, 개별국 등록절차 없이 단 한 번의 등록으로도 참여 회원국 전체에서 단일한 특허권이 발생해 권리 한정·이전·취소·소멸 등에서 일원적 권리 행사가 가능한 제도)와 통합 특허법원(단일 특허와 유럽 특허의 무효 및 침해 사건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며 판결의 효력은 비준 회원국에 일괄 적용되는 유럽의 초국가적 특허 소송 체계)이 지난해 6월 출범했다. 통합 특허법원 개원 이후 사건 처리 현황을 살펴보면 이동통신 및 컴퓨터 분야 소송이 전체의 26%로 가장 많으며, 이 중 45%는 표준필수특허와 관련된 사건이다. 기기 간 연결을 기반으로 하는 초연결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연결의 기반이 되는 표준 기술과 이를 둘러싼 특허 분쟁이 증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우리나라는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ITU 등 주요 표준화 기구 기준으로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표준특허가 많다. 하지만 80% 이상이 주요 대기업의 특허로 개인이나 중소기업은 ‘표준필수특허’나 ‘프랜드’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한 것이 현실이다.
커넥티드 카의 등장으로 자동차 제조사들이 통신 분야 표준필수특허 사용료를 지급해야 했던 것처럼 스마트팩토리, 스마트팜, 스마트시티와 같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전통 산업군에 속하는 기업들도 수년 안에 표준필수특허 사용을 위한 협상을 진행해야 할 수 있다. 특히 제조업 중심의 수출 기반 경제구조를 갖는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글로벌 특허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 EU 표준필수특허 규정과 같은 글로벌 표준과 특허 제도의 큰 변화에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초연결 시대를 대비해야 할 시점이라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