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는 1995년 출범 이후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그간 WTO는 다자무역규범 체제를 확립하며 세계 무역증진과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을 계기로 미국과 중국은 서로 호흡을 맞추면서 다자통상질서를 견인한다.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는 중국과 최대 수입국인 미국 양축을 토대로 국제무역이 선순환하는 시스템이 형성됐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정도로 빠르게 경제규모를 확대해 왔고, 미국은 제조업 경쟁력 약화, 일자리 감소 등을 겪었다. 이로 인해 미중 패권경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자국 우선주의가 심화하고 여기에 기후변화, 경제의 디지털화 등 통상환경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된 과거의 질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스위스 제네바 WTO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의 모습을 기술하고자 한다.
미국과 중국의 동상이몽
첫째, 미국과 중국의 WTO에 대한 역할 변화다. 미국은 과거 WTO를 통해 다자무역질서를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이제는 한발 빼려는 모양새다. WTO 각종 회의나 협상에서 미국은 여론을 주도하기보다 개별 회원국으로서 자국의 이익형량에 따른 입장을 개진하는 수준으로 참석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아울러 미국은 상소기구의 월권을 이유로 WTO 상소기구 신규 위원의 선임을 계속 저지하며 분쟁해결기구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상소기구 위원이 공석이 되면서, 사건이 회부될 때마다 임시 기관이 설치되는 패널심(1심) 판정은 가능하더라도 2심인 최종심은 상소기구 위원 정족수 미달로 재판부가 구성될 수 없어 분쟁해결 기능이 원활히 작동하지 않고 있다. 또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21조 ‘국가안전보장을 위한 예외’를 근거로 대중국 반도체 공급망 규제, 자국의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제조업 경쟁력 부활, 일자리 확충 등을 목적으로 하는 「반도체 지원법」,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 등에 따른 논란을 피하려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다자무역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기보다 자국의 역할 축소와 분쟁해결기구 등 WTO 개혁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중국은 미국의 대외 압박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WTO를 적극 활용하려는 자세다. 다자무역질서를 수호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세계무역체제 공론의 장에서 미국을 비판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WTO에 제소한 상태다. 상소기구가 마비된 상태이지만 상호 협의, 패널토론 순서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문제제기를 이어가면서 회원국들과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도 그간 국영기업을 통한 자국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원, 지식재산권 침해 등 부당한 관행으로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호소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아울러 WTO 내에서 축소된 미국의 역할을 EU, 영국, 캐나다, 호주 등이 대체하려고 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선진국들의 목소리는 약화되는 반면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등 개도국들의 목소리와 협상력이 과거에 비해 커지고 있다. 개도국들은 무역을 통해 자국의 산업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개발 이슈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어 선진국과 시각 차이가 있다.
WTO의 레거시는 여전히 작동 중
둘째, 최근의 보호무역주의 기조에서도 WTO는 166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다자무역협상 기구로서 그 역할이 아직 유효하다는 것이다. WTO의 기능은 입법, 행정, 사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기존 규범의 실행을 모니터링하는 행정기능 외에도 회원국 간 협상을 통해 새로운 국제무역규범을 마련하는 입법기능이 여전히 살아 있다. 모든 국가는 아니더라도 관심 있는 회원국들이 참여하는 복수국 간 협상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2021년 우리나라를 포함한 EU, 미국, 중국, 캐나다 등 주요 60여 개국이 참여하는 서비스 국내 규제(SDR; Services Domestic Regulation) 협상이 마무리됐다. WTO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S; General Agreement on Trade in Services)’을 통해 이미 개방된 서비스 분야에서 면허·자격 취득, 기술표준에 관한 국내 절차가 무역장벽이 되지 않도록 절차를 간소화해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규범을 마련한 것이다. 지난 2월에 개최된 13차 각료회의(MC-13)를 계기로 EU, 미국, 중국 등 관련 절차가 완료된 국가부터 순차적으로 발효가 되고 있고 한국도 상반기 중에는 모든 절차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우리나라가 공동의장을 맡고 있고 120여 개국이 참여하는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IFD; Investment Facilitation for Development) 협정’의 협상이 지난해 하반기에 완료됐다. IFD 협정은 협상 참여국의 국내 투자 제도와 정책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투자 절차를 간소화·디지털화함으로써 개도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촉진하는 것이 핵심으로, 올해 중에 발효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밖에 90여 개국이 참여 중인 전자상거래 협상도 올 상반기 1단계 완료를 목표로 마무리 협상을 진행 중이다.
WTO 협상은 모든 회원국이 참여해 이해관계 조정 과정에서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는 과거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이제는 수요가 많은 새로운 통상규범 주제에 대해 관심이 높은 회원국들만이 실용적으로 협상에 참여해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는 복수국 간 협상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협상 형태가 WTO 다자규범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있는 인도와 남아공을 어떻게 설득할지가 남은 과제다. 복수국 간 협상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면 WTO는 세계 최대 국제무역의 토론과 협상의 장으로서 일정 부분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다자간 디지털 통상 규범 정립 시급
셋째, 디지털 통상 규범에 대한 수요다. 특히 IT기반 확대에 따른 디지털 서비스 무역(digitally delivered services)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디지털 서비스 무역이란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가는 거래로 정의되며 인터넷 애플리케이션, 이메일, 음성 및 비디오 전화, 디지털 중개 플랫폼 등을 통한 온라인 게임, 음악 및 영상 스트리밍, 원격교육 등이 해당될 수 있다. WTO 통계에 의하면 2022년 디지털 서비스 무역 규모는 2005년에 비해 4배 정도 확대됐으며 연평균 성장률은 8.1%로 상품무역 5.6%, 여타 서비스 무역 4.2%보다 높은 수준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 디지털 무역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만큼 전자상거래는 국가 발전 단계와 관계없이 모든 회원국이 관심을 갖는 주제다. 따라서 WTO에서도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을 활성화하고 심층토론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특히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관세 부과 여부가 큰 쟁점이다. 1998년 WTO 회원국은 각료결정을 통해 전자적 전송물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관행(이하 모라토리엄)을 지속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매 각료회의 시 차기 회의까지의 모라토리엄 연장을 합의해 왔으나 2017년 열린 11차 각료회의(MC-11) 이후 인도·남아공·인도네시아 등은 세수 손실, 디지털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재량 축소 등을 이유로 모라토리엄 연장에 반대하고 있다. 1998년 합의 이래 디지털환경이 급변한 상황을 고려할 때 모라토리엄의 새로운 정의·범위·영향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며,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은 개발 측면이 강조돼야 한다고 강도 높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를 포함한 미국, EU, 중국 등 대부분의 국가는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를 위해 관세를 유예하는 모라토리엄을 지지하고 있으며 지난 2월에 개최된 MC-13에서도 관세 유예가 극적으로 타결돼 차기 각료회의(또는 2026년 3월 31일 중 빠른 일자)까지 연장됐다. 하지만 모라토리엄 지속 여부는 불확실성이 매우 큰 상황이다. 특히 이번 각료결정문은 과거와 달리 ‘연장 후 종료(expire)’ 문구가 삽입돼 14차 각료회의에서 논의해 연장될 수도 있으나 모라토리엄 종료 가능성이 과거보다 더 높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추진되고 있는 WTO 복수국 간 전자상거래 협상을 가속화해 모라토리엄 영구화 토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변화하는 통상환경은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1980년대 일본이 반도체산업을 필두로 미국경제를 위협함에 따라 미국은 반도체 협정 체결과 플라자합의를 통해 일본 반도체산업의 성장을 좌절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급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 중국은 과거와 달리 선박, 석유화학, 전기차,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등 전통 제조업에서 첨단산업까지 국제 경쟁력을 나날이 키워가고 있어 우리의 주요 수출 품목과 갈수록 경합하고 있다. 중국시장을 포함한 세계시장에서 수출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또한 중국경제는 고도 성장기를 마감하고 5% 내외로 성장 속도가 조절되고 있다. 중국 내수 부진에 따른 잉여 생산량이 해외 수출을 통해 활로를 찾는 과정에서 미국, EU 등과 중국의 무역 마찰이 심화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기회를 포착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대다. 우선 뿌리가 튼튼한 산업 생태계와 결집된 해외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순혈주의를 지양하고 원자재, 소재, 부품, 장비 등 해외 우수기업의 투자와 인력을 적극 유치하며 융합체계를 마련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지금도 정부가 민간기업과 함께 팀워크를 발휘해 공급망 리스크 관리, 수출시장 개척 및 기업의 수출애로 해소 등을 지원하고 있지만 민간이 단독으로 시장을 개척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남미, 중동 등에는 정부가 거점지역에 대규모 ‘수출전진기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코트라, 민간기업, 대사관 등을 함께 입주시켜 상호 긴밀하게 정보를 공유하며 시장을 개척하면 시너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경제성장은 수출에 좌우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계속되는 도전과 역경이 항상 대한민국의 경제를 튼튼하고 강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무역질서 형성의 파고를 넘어 원대한 성장의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