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가 허공을 떠돈다. 회의에 참석한 각 정부 대표단이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의장석에서 회의 시작의 틈을 노리고 있는 내 심장도 벌렁거리고 혈압이 오른다. 속으로 자신을 다잡아본다. ‘심장아! 함부로 나대지 마라. 침착하자.’ 나는 이 위원회를 책임지고 있는 의장이다. 그 와중에 일부 대표단은 나에게 와서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넨다. 회의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슬며시 의사봉을 두 번 두드려본다. 모든 대표가 착석하기까지 2~3분이 소요됐다. 초침은 빠르게 흘러가지만 ‘기다리자’고 속으로 다짐한다. 사람들이 그 고요함에 지루함을 느끼고 무언가를 기다리기 시작할 즈음에 조금은 갑작스럽고 조금은 큰 목소리로 “굿모닝 에브리원”이라고 인사하며 회의를 시작한다. WTO 세이프가드위원회 의장으로서 첫 공식 회의를 주재하는 필자의 모습이다.
WTO 세이프가드위원회 의장으로 재임했던 지난 1년 동안 EU 철강 세이프가드 등 회원국들의 세이프가드 통지(2022년 73개국, 2023년 75개국)를 검토하고 다수의 비공식 회의를 통해 위원회의 5개 개혁과제에 대한 협의를 마무리했다. 회원국 대표들 간 논쟁이 있을 때, 대표들이 알아듣기 힘든 발음과 악센트로 발언할 때, 또는 찬반을 판단하기 쉽지 않은 모호한 발언이 있을 때, 사무국 직원이 회의 중 급히 건네준 쪽지가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일 때, 매 순간 긴장하고 땀을 흘렸다. 그런 과정을 통해 1년간의 의장직을 무난하게 마무리했다. 특히 개혁과제가 논의될 때는 3개 위원회(세이프가드위원회, 보조금 및 상계조치위원회, 반덤핑위원회)가 같은 장소에서 동일 대표단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순차적으로 개최돼 각 위원회 의장(한국, 튀르키예, 뉴질랜드)들이 상대적으로 비교 평가를 받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의장 선출 절차는 아주 지루하고 미묘하게 진행된다. 의장 임기는 1년이며 12월 말에 의장 후보 지원을 위한 공지를 한다.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선진국 등 각종 그룹 내, 그룹 간 후보를 조율한 후 전체 공지를 통해 그룹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룹 대표와 후보자들 간, 대표부 대사들과 수없이 많은 논의가 이뤄지니 참으로 지루한 과정이다. 의장으로 선출되는 것은 전적으로 해당 국가의 위상과 대표부 대사 및 차석대사의 역량,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에 달려 있다.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ILO 의장 선출,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진출 등
국제사회에서 빠르게 올라가는 한국의 위상
필자가 2001년 기후변화 업무를 담당할 당시, 주변인들의 반대에도 유엔 기후변화협약 집행위원회, 기술이전그룹에 각각 우리 대표를 후보로 제출했고 최종적으로 기술이전그룹의 이사로 선출됐다. 이후 우리 후보가 유엔 기후변화협약 집행위원회 이사로도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당시 국제기구 진출에 대한 분위기도 조성돼 한국에너지공단 직원들이 독일 본에 있는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국, 스위스 제네바에 소재한 WTO 등에 진출해 현재까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국제기구에 진출한 한국인은 1천 명이 넘었다. 우리나라는 2024∼2026년 국제표준화기구(ISO) 이사국으로 진출했고 동시에 ISO 회장국으로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지난 6월에는 윤성덕 주제네바대표부 대사가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됐으며 우리나라는 2024∼2027년 ILO 정이사국이 됐다. 지난 10월 9일에는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2025∼2027년)으로도 진출했다. WTO에서도 박정성 차석대사가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 협정의 공동의장으로서 해당 협정 도출에 큰 기여를 하고 있고 이주영 서기관이 공기업작업반 의장을 수행하고 있다.
필자는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판단하는 기준점으로 네 가지 통계를 참고한다. 첫째,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국토 면적은 약 0.07%다. 둘째, 인구는 약 0.7%를 차지한다. 셋째, GDP는 약 1.7%에 해당한다. 넷째, 무역 규모는 약 2.7%에 이른다. 이는 매년 변동이 있을 수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상대적 위상을 파악하는 유용한 지표가 된다. 한국인의 국제기구 진출 비중을 보면 정규직 기준 세계지식재산기구(WIPO)는 1.4%, ILO는 1.9%, WTO는 0.6%다. 인구 대비 진출 비중은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지만 경제 또는 무역 규모 대비로는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뜨거운 가슴으로 다가서는 양자협정,
냉정하고 이성적인 다자협정
필자는 기후변화협상, OECD, WTO 대표부 등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통상인으로서 통상은 매우 매력적인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통상의 매력은 단순하고 쉽고 가벼운 용어도 무겁고 심오한 의미를 가질 때, 국가 간의 입장 차이로 외줄타기와 같은 긴장감이 연속될 때 더욱 높아진다. 이러한 밀도 높은 과정에서 통상인의 열정과 자기 응시는 통상을 성공으로 이끄는 주된 힘이 된다. 주제네바대표부에서의 3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앞으로 우리나라 통상 과업 발전을 위해 나아갈 방향을 제안해 본다.
우선, 다양성과 상황 변화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통상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수많은 국가의 대표들이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 이뤄진다. 생각지도 못했던 혹은 매우 사소하다고 생각됐던 분야에서 협상이 틀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가별로 상이한 역사와 문화, 정치체제 때문에 각국 대표들의 생각도 다양하다. 200여 개 가까운 국제기구가 소재한 스위스도 찬찬히 살펴보면 매우 특이하다. 스위스는 분산적인 정치구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공존한다. 합의제(consensus) 의사결정 체제에서는 모든 국가의 대표들이 중요한 의사 결정자다. 가령 WTO 내에서도 한 작은 국가의 지속적인 반대로 2년 이상 의장 없이 운영된 위원회도 있었다. 자신을 비우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며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학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자통상 업무는 그 표면은 잔잔한 수면 같지만 이면에서는 변화무쌍한 소용돌이가 끊이지 않는다. 각국의 입장은 그들의 경제 구조와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한다. 보조금과 같은 기존 의제도 새로운 환경 변화에 따라 재논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전자상거래, 환경, 투자 등 새로운 의제에 대한 논의 수요 또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WTO 내에서 각 의제별로 새로운 논의의 장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보조금과 환경보호 등에 대한 논의는 산업정책이라는 기존의 틀 속에서 새로운 논의를 요구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양자와 다자협력의 차이점에 대한 이해다. 양자협력이 양자 간의 협력을 극대화하고 갈등을 최소화하는 것이라면, 다자협력은 다자 간의 협력의 토대가 되는 규칙을 만들고 이를 이행하며 판단하는 것이다. 양자협력 현장에서는 신명 나는 신세계를 발견한 듯 뜨거운 가슴으로 대상국의 현장 곳곳에서 협력 사업을 발굴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협력 대상국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라는 인식을 가져야 협력을 활성화하고 갈등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반면 다자협력은 글로벌 협력 증진 또는 글로벌 난제 해결이라는 대의명분을 토대로 하지만 그 현장은 보다 이성적이어야 한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국가들 간의 상황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유엔 기후변화당사국 총회는 항상 뜨거운 열기를 띠고 있다. 옵저버로 참여하는 여러 NGO의 요구와 감시 속에서 정부 대표들은 협상에 임한다. 심심치 않게 NGO의 강렬한 데모를 접하기도 한다. 현장의 열기는 뜨겁지만 협상 테이블은 냉정하고 이성적이다. 교토의정서(1997년)상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정할 때도, 이를 이행하기 위한 마라케시합의문(2023년)을 마무리할 때도 치열한 논리들의 전쟁이었다. WTO 각종 회의에서 정부 대표단들의 미묘한 발언 변화는 관련 당사국들의 미묘한 관계 변화를 반영하기도 한다. 1998년 WTO 정보기술협정(ITA) 2차 협상은 각국의 치열한 이해관계 속에 실패했고 2015년이 돼서야 2차 협상이 마무리됐다. 그 과정에서 인도를 비롯한 여러 국가가 탈퇴하고, 중국 등이 새로 가입한 바 있다.
통계, 국제 법규, 공통 언어에 대한 전문성도 중요
세 번째로, 산업구조와 지정학적 구조 변화에 대한 관심이다. 반도체·AI 등 첨단산업 비중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국가의 안보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다. 보조금 등 각종 지원제도 및 규제 등을 통해 세계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각국의 노력은 치열하기 그지없다. 싱가포르 초대 총리인 리콴유는 법학을 전공해 국가의 기반을 만들었지만 미래세대에는 컴퓨터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그의 아들인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에게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도록 권유했고 리셴룽은 실제로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필자 또한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는데, 당시에는 자바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컴퓨터 구조를 이해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첨단산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고 WTO ITA 위원회 활동의 토대가 되고 있다. 현재 WTO 다수의 위원회에서 전자상거래, 반도체, 인터넷 등 정보기술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고, 지난 2월에는 유엔에서 AI 규제 관련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기도 했다.
네 번째로, 통상에서 통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2014년부터 OECD를 중심으로 분석하기 시작한 부가가치무역통계는 총계 기준이 아닌 부가가치 기준으로 무역통계를 작성함으로써 국가 간 무역 불균형에 대한 과도한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했으며, 산업 간 무역뿐만 아니라 선진국 간 또는 유사한 경제구조를 가진 국가 간 산업 내 무역의 확대를 분석하는 데도 중요한 수단이 됐다. 필자는 2001년부터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감축 잠재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에너지기술 데이터베이스(DB) 구축을 시작했다. 온실가스 감축 잠재량 분석을 위한 톱다운(top-down) 모델들은 주로 기존 거시경제 변수들을 사용하는데, 바텀업(bottom-up) 모델 분석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 DB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통계는 글로벌 경제질서뿐만 아니라 각 국가 간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도 매우 유익하다. 예를 들어 특허와 무역에서 중국의 위상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WIPO와 WTO에서 중국을 둘러싼 각 국가의 입장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통상업무를 위해서는 국제 법규와 공통 언어에 대한 지식 축적도 빼놓을 수 없다. 필자는 매일 일과 전후에 영어로 된 글을 원어민 발음으로 듣고, 읽은 것을 녹음해 발음과 악센트를 비교 점검한다. 잘못 알고 있던 것들, 새로운 것들, 잊어버린 것들을 노트에 정리해서 외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WTO, OECD 등 다수의 국제기구에서 영어 외에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도 공용어로 사용되기 때문에 영어 실력 향상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로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것도 필수적이다. 한순간의 노력은 고통스럽고 무상하지만 평생의 습관은 자연스럽고 풍성한 법이다.
통상은 각국이 모여 무역과 투자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국의 국익(주권)과 글로벌 이익(가치) 간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공동의 노력이다. 많은 유능한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 국제기구에 도전하고 있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국제기구에 인턴 등으로 참여하는 한국인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으며 외교부 국제기구인사센터 등 정부에서도 국제기구초급전문가(JPO), 유엔자원봉사단(UNV), 각종 취업상담회 등을 통해 우리 젊은이들의 국제기구 진출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글로벌 통상 선진국가로서 한국의 위상은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