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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지재권 강국 한국의 새로운 도전, WIPO 지역사무소 유치
이진용 주제네바대표부 참사관 2025년 01월호


2024년 10월 14일 서울.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소속 변호사 안제이 갓코프스키는 지난주보다 포근해진 날씨와 북적대는 월요일 아침의 낯선 출근 분위기를 느끼며 테헤란로의 고층 건물 앞에 섰다. 약간의 현기증과 피로감은 기분 탓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7시간의 시차 그리고 새로운 동료를 만난다는 흥분과 긴장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회전문에 들어서자 몸은 순식간에 건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2층까지 뻥 뚫린 천장에 시선을 빼앗기며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로비 한 편에 낯선 언어와 함께 익숙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특허청 서울사무소-KIPO Seoul Branch Office’ 바로 오늘부터 안제이가 근무할 곳이다.

2023년 2월 8일 서울. 싱가포르 특허청장 출신으로 2020년 제5대 WIPO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다렌 탕은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탕 사무총장은 WIPO 지역사무소 신설에 관한 한국의 관심과 관련해 최근 WIPO 논의 동향을 설명하면서 WIPO와 한국 정부가 서로 인력을 교환해 보자고 제안했다.

2023년 7월 5일 스위스 제네바. 일반 총회 하루 전 WIPO 본부 11층 회의실에서 양자 회의를 마친 한국 특허청장과 탕 사무총장은 방금 서명한 양해각서(MOU)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5개월 전 서울 용산에서 구두로 약속한 한국 정부와 WIPO 간 인력 교환 프로그램 시행을 위한 기본 틀이 담긴 MOU가 체결된 것이다.

2024년 5월 1일 제네바. WIPO의 글로벌 챌린지 및 파트너십 부문에서 우리나라 특허청 직원이 근무를 시작했다. 이로써 MOU 이행을 위한 첫 단추가 채워졌고 이어 10월 14일 WIPO 안제이 변호사가 특허청 서울사무소로 출근하면서 MOU의 완전한 이행이 이뤄졌다. WIPO는 유엔 글로벌 모빌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그간 다른 국제기구와 직원을 서로 교환하고 있었지만 회원국과의 직원 교환 프로그램은 이번이 최초 사례다. 

WIPO-회원국 간 최초 직원 교환 사례 된 한국

WIPO는 IMF, WHO, 유네스코 등과 함께 유엔 산하 15개 전문기구 중 하나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지식재산 분야를 담당한다. 지식재산 관련 국제 규범 설정, 인식 향상, 개도국 지식재산권(이하 지재권) 인프라 지원 등의 기능과 함께 ‘국제 출원 서비스’라는 핵심 기능을 제공한다. 국제 출원 서비스는 특허, 상표, 산업디자인 등의 지재권에 대해 전체 회원국을 대상으로 같은 날 출원서(신청서)를 제출한 효과를 주는 것인데, 남들보다 앞선 아이디어 제출이 지재권 확보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전 세계 혁신가와 창작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서비스다.

출원 날짜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지재권의 속성상 국제 출원 과정에서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WIPO의 즉각적이고 완벽한 대응이 필수다. 우리나라와 스위스 간의 시차 및 현지 대응 전담 인력 부재 등으로 국내 지재권 출원인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인력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파견된 WIPO 직원의 가치는 우리가 활용하기에 따라 단순한 인력 파견의 수준을 넘어선다. 

한편 WIPO가 매년 발표하는 권리별 국제 출원 서비스 이용 실적 통계를 보면 2023년 기준 우리나라는 국제 특허 출원(PCT)이 2만2,288건으로 세계 4위, 국제 상표 출원(마드리드 시스템) 2,090건으로 세계 9위, 국제 산업디자인 출원(헤이그 시스템) 1,240건으로 세계 7위를 차지할 만큼 국제 지재권 출원 강국이다. 국내 특허 출원 건수에서도 우리나라는 중국, 미국, 일본에 이은 세계 4위로서 유럽을 포함한 세계 5대 특허청 협력체(IP5)의 멤버이기도 하다.

WIPO는 회원국과 주변 지역에 국제 지재권 출원, 중재 및 조정, 개발 및 역량 구축과 관련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싱가포르 등 총 7개국에 지역사무소를 두고 있다. 이번 인력 교류 프로그램의 출발점이 된 WIPO 지역사무소 신설 논의는 지난 몇 년간 WIPO의 뜨거운 감자였는데 최근 들어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 

싱가포르(2005년), 일본(2006년)에 이어 브라질(2009년)에 제3호 지역사무소가 설치된 이후 2010년부터 지역사무소 재편 논의가 시작됐다. 그 결과 2013년 7월 WIPO 사무국은 중국, 러시아, 미국, 아프리카 등에 총 5개의 지역사무소를 추가 신설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회원국들이 투명성과 포용성을 이유로 지역사무소 신설 위치를 결정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신규 사무소 선정 권한을 두고 사무국과 회원국 간 긴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여러 제안에 대한 논의 끝에 우선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지역에 대해서는 설치를 유보하기로 했고 이듬해 중국과 러시아에 지역사무소가 설치됐다.

한편 2014년 WIPO 사업예산위원회(PBC)에서는 회원국들이 “지역사무소에 대한 제안은 회원국들의 검토를 위해 상세한 근거와 함께 제출돼야 하며, 최종 결정은 회원국들의 합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무국과의 긴장이 고조됐다. 이듬해 10월 제55차 WIPO 일반 총회는 “2016~2017년 회기와 2018~2019년 회기에 지역사무소를 각각 최대 3개씩 신설한다”라는 내용과 “아프리카 지역에 먼저 2개를 설치한다”라는 신설 우선지역 설정을 포함한 ‘지역사무소에 관한 기본 원칙’을 채택했다. 또한 “지역사무소의 위치 및 설립은 회원국이 협의와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하며 WIPO의 전략적 목표와 일치하도록 보장한다”라고 결정했다. 이는 WIPO 지역사무소 신설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회원국으로 공식 전환되는 계기가 된다.



갈 길 먼 WIPO 지역사무소 신설 논의…
우리나라는 지재권 분야 성과 홍보 등 다각적 유치 노력 중


설립된 기본 원칙에 따라 2016년 3월 총 18개국이 2016~2017년 회기에 유치 제안서를 제출했고, 같은 해 10월 총회에서 나이지리아와 알제리 등 아프리카 2개 지역에 지역사무소를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2017년 3월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9개국이 2018~2019년 회기 신설 지역사무소 유치 제안서를 제출한 이후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다. 같은 해 10월 총회에서는 콜롬비아를 포함해 최대 4개의 지역사무소 신설을 고려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지만 신규 지역사무소 개설에 대한 결정은 2018~2019년 회기로 연기됐다.

2018년 총회에서 우리나라가 인도,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외부 전문가를 통한 내용 중심의 평가 방안’을 제안했으나 중남미그룹(GRULAC)의 반대로 불발되면서 지역사무소 신설 문제는 2019년 총회로 순연됐다. 그런데 정작 2019년 총회에서는 지역사무소 신설 논의를 2022년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대신 2020~2021년 회기에 이미 설치된 지역사무소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는 방안이 채택된다. 신규 지역사무소를 유치하려는 회원국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되면서 지역사무소 신설 논의는 점점 동력을 잃고 도리어 기존 지역사무소 평가에 대한 논의로 변질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2019년과 2020년에 각각 알제리와 나이지리아에 지역사무소가 설치됐다.

코로나19 팬데믹 발발로 2020년 총회는 의미 없이 지나가고 2021년 총회에서는 WIPO 사무국이 기존 지역사무소 평가를 위한 기준(TOR; Terms of Reference)을 2022년 7월까지 작성해 회람하기로 하는 방안을 마련한 데 만족해야 했다. 2022년 6월 코로나19 이후 첫 대면 회의로 열린 PBC 회의에서 사무국이 마련한 TOR을 회원국들이 처음 확인했다. 그리고 TOR에 대한 실질적인 회원국 간 논의가 이뤄진 2023년 PBC 회의에서는 러시아가 기존 지역사무소 평가를 위한 TOR을 뉴욕에 설치된 유엔 연락사무소(liaison office)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최근 실적이 부실한 러시아 지역사무소를 겨냥해 최근 2년간 지역사무소의 실적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BC 회의가 TOR 세부사항에 대한 논의보다는 정치적인 대립의 장으로 활용되면서 지역사무소 논의가 다시 한번 급변침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 기조는 2024년 PBC에서도 지속됐고, 현재 WIPO 사무국은 회원국 의견을 반영한 개정 TOR을 2025년 6월까지 회람하기로 한 상황이다.

이렇듯 지역사무소 신설 논의의 선결 과제인 기존 지역사무소 평가가 그 기준조차 마련되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있다는 표면적인 문제 외에도 특정 후보국에 대한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른 무조건적인 반대, 특정 지역그룹 단독 후보국에 대한 소속 국가들의 일방적 지지와 압박, 지역사무소가 불필요하거나 이미 확보된 지역그룹(국가)들의 소극적 참여 등 지역사무소 신설이라는 본경기가 열렸을 때 우리가 극복해야 할 실질적인 난관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PBC 회의나 총회와 같은 WIPO의 공식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두드러진 국제적 성과와 업적, 잠재력,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 지역사무소 신설 기대효과 등을 주장·홍보하고, 국내 지재권 출원인에 대한 지원 등 실질적인 요구가 있음을 강조하는 등 지역사무소 논의의 실질적 진전을 촉구했다. 아울러 WIPO 사무총장 등 고위급 면담을 통해 한국에 지역사무소를 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득하면서도 현실적인 방안으로 지역사무소 신설 지역 선정 권한을 사무국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WIPO 정규 직원을 한국에 상주하게 하는 인력 교류 프로그램은 국내 지재권 출원인에 대한 지원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여러 이유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표류하는 지역사무소 신설 논의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향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추는 모양새다. 우리나라는 지재권 기반의 경제성장이라는 모범 사례, 세계 4위의 특허 출원 규모, 신탁기금을 통한 국제사회 기여 등 더할 나위 없는 지재권 환경을 갖췄다. 비옥한 땅에 기적처럼 내려앉은 씨앗이 싹을 틔우려면 세심하고 정성어린 노력이 절실하다. 어렵사리 시작된 인력 교류 프로그램의 불씨가 거세게 타오를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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