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복합적 위기와 충격, 불확실성으로 정의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지정학적 경쟁 심화와 무력 충돌 증가, 민주주의 후퇴와 권위주의 확산,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와 생태계 변화, AI로 대표되는 기술혁신 경쟁과 이에 따른 불평등에 대한 우려 등이 국제사회의 큰 과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회복이 속도를 낼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많은 국가가 부채위기와 인플레이션, 공급망 붕괴로 더욱 어려운 현실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빈곤 감소는 정체되고, 전 세계 공동 번영을 위해 2015년 유엔에서 합의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그 시한인 2030년까지 달성이 요원하다.
불안정성과 위기는 단순히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안보, 국제질서 전반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화된 경제구조 속에서 한 국가의 위기는 곧바로 인접국과 무역 상대국 그리고 국제금융시장으로 전파되며, 무력 충돌과 취약성 증가는 난민과 강제 이주를 비롯한 인도적 위기를 심화한다. 전 세계는 취약성의 그물망으로 연결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국제사회가 개발협력과 연대를 통해 분쟁과 국가 취약성을 줄이고 보다 안정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며 전 세계의 빈곤퇴치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나아갈 수 있을까? OECD가 올 2월 발간한 「2025년 취약성 보고서(States of Fragility 2025)」는 전 세계 177개국을 대상으로 취약성의 원인과 현황을 분석하며 국제사회의 대응 전략을 모색한다.
그물망처럼 연결된 국제사회 취약성 심화 중···
2023년 ‘분쟁’이 56건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아
OECD는 취약성을 ‘위험에 대한 노출과 이런 위험을 관리하고 완화할 수 있는 국가·시스템·커뮤니티의 불충분한 회복력의 결합’으로 정의한다. 취약성은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 나타나며 상호 연관되므로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OECD는 경제, 환경, 정치, 안보, 사회, 인간 등 6개 측면에 걸친 56개의 위험 지표를 바탕으로 틀을 구성해 각국의 취약성을 평가하고 있다.
「2025년 취약성 보고서」는 글로벌 취약성이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취약성이 높은 국가일수록 취약성이 더욱 빠르게 늘고 있다고 지적한다. 보고서는 61개국을 취약성이 높거나 극심한 국가로, 이 중 18개국을 다시 극도로 취약한 국가로 분류했는데 이는 2022년 보고서의 15개국보다 증가한 수치다. 취약성 증가의 원인과 양태는 다양하며 각국의 맥락에 따라 상이하지만 공통적 경향은 정치적·안보적·경제적 취약성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권위주의화가 나타나면서 정치적 불안정성이 확대되고 있다. 보고서는 취약성이 높은 61개국 중 34개국 정권이 더 독재적으로 변했으며, 폐쇄적 권위주의는 2019년 10개국에서 2023년 20개국으로 늘었다고 분석한다. 또한 2021~2023년 기간 동안 10건의 쿠데타가 발생했고 이 중 6건이 아프리카 사헬 지역(사하라사막 남쪽 주변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는 취약성이 높고 국가기관의 회복력이 낮은 환경에서 정치 엘리트들이 쿠데타를 자신의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안보 측면에서 지정학적 경쟁 심화, 정치적 불안정성 증가 등의 상호작용으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 2021~2023년 무력 분쟁에 의한 연간 사망자는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고 이는 주로 중동, 에티오피아, 수단,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계속되는 전쟁과 무력 분쟁 때문이다. 2023년 당시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분쟁은 56건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숫자다. 아울러 취약성이 높은 61개국 중 24개국이 현재 무력 분쟁을 겪고 있으며 이 중 8개국은 전쟁 중이다. 분쟁의 거시경제적 비용은 매우 클 뿐 아니라 장기간 지속 발생한다. 한 분석에 따르면 분쟁 발생 10년 후 1인당 GDP는 약 28% 줄어든다. 분쟁은 단순히 GDP를 감소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 인프라 파괴, 교육과 보건 등 기초 사회서비스 붕괴, 시민권의 제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취약성을 연쇄적으로 악화시킨다.
경제적 측면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이후 선진국은 점진적 경제회복의 길로 들어섰지만, 취약성이 높은 국가들은 경제회복 속도가 더디거나 오히려 경제가 악화하는 투 트랙(two-track) 경제회복을 보인다. 선진국의 높은 금리는 취약국의 자본 유출, 통화가치 하락과 함께 부채비용 급증을 가져왔고, 지정학적 긴장 고조에 따른 공급망 위기와 식량·에너지 인플레이션 등은 국가 간 경제적 불균형을 더욱 심화했다. 아울러 취약성이 높은 국가의 외국인직접투자(FDI) 비율은 5% 미만으로 매우 저조하다. 이 가운데 극도로 취약한 국가의 성장률 중간값은 2015년 이래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그 결과 2024년 전 세계 극빈층의 72%가 취약성이 높은 61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2040년에는 그 비중이 92%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도적 지원만으론 글로벌 취약성 완화 역부족으로
개발 지원과 평화 구축 등을 연계한 통합적 접근법 중요
국제사회는 오랜 기간 긴급구호 등 인도적 지원,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한 개발협력, 국제기구 및 민간 재원 동원 등의 방법으로 취약국을 지원하며 글로벌 취약성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의 ODA 규모는 꾸준히 증가해 2023년 역대 최대치인 2,233억 달러를 기록했으나, DAC 회원국 국민총소득(GNI) 대비 ODA 평균 비율은 유엔 권고인 0.7%의 절반인 0.37%에 머물고 있다. 취약성이 높은 61개 국가에 대한 지원으로 한정하면 지원 비중은 2012~2021년 평균 65% 수준에서 2022~2023년 52% 수준으로 감소했으며, 위기에 대한 직접적 대응인 인도적 지원 비중은 증가했지만 분쟁과 취약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저조한 상황이다. 일례로 평화 구축 활동이나 평화를 가져오는 제도에 대한 중장기적 지원 규모는 최근 들어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다양한 취약성의 동인과 결과는 개별적으로 작용하기보다 상호 연계돼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개발협력도 이런 다차원적인 취약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장기적 접근법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제개발협력은 단기적 지원을 넘어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과 회복력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 또 분쟁 발생 후 대응하기보다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추고 국가별 맥락을 분석해 분쟁과 취약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맞춤형 정책 수립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효과적인 분쟁 및 취약성 대응을 위해 분쟁과 위기 상황에 직접 대응하는 인도적 지원과 경제성장 및 사회발전을 도모하는 개발 지원 그리고 평화 구축을 통합적으로 다뤄야 한다. 국제사회와 OECD는 이러한 인도적 지원(Humanitarian), 개발(Development), 평화(Peace)를 연계한 통합적 접근법(HDP Nexus)을 꾸준히 강조해 왔다.
한국의 무상개발협력 전담기관인 코이카(KOICA)는 HDP 연계 접근을 본격 적용해 분쟁국·취약국 지원과 협력을 한층 강화하고 있는데, 이번 보고서에서는 이런 코이카 사례를 공여국 대응 혁신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코이카의 주요 혁신은 다음과 같다.
우선, 2024년 분쟁국·취약국 사업예산을 전년의 약 4배로 확대하면서 단기적·인도적 지원을 넘어 취약성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는 장기적 지원의 토대를 마련했다. 둘째, 지역별로 분산 운영되던 프로그램을 통합하고, HDP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인도지원실을 처 단위로 승격하면서 산하에 분쟁국·취약국 지원 전담팀을 신설해 운영 효율성을 높였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단기·단일국가 프로젝트에서 장기·다국가 프로그램 기반으로 사업모델을 개선했다. 특히 6대 핵심 취약성 영역(지역사회 통합 강화, 갈등 예방 및 관리역량 강화, 피해지역 재통합 지원, 시민·여성 평화, 기후변화 및 재해 취약성 해소, 식량위기 대응역량 강화)을 선정하고 각 영역에 전문성이 있는 국제기구와 협력해 프로그램을 기획·시행하며 다국가 간 협력, 유연한 예산 운용이 가능하게 했다. 이런 코이카의 혁신적 접근 사례가 분쟁국·취약국의 취약성 완화와 회복력 증진에 기여할 뿐 아니라 모범사례로서 그 성과가 다른 공여국에도 확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ODA 확대와 효과적 활용은 글로벌 취약성 완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OECD와 유엔은 SDGs 달성을 위해 필요한 재원과 가용 재원의 격차를 연간 약 4조 달러로 추정하는데, 이 재원 격차 해소는 ODA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조세를 포함한 개발도상국 국내 재원 동원과 민간 재원 동원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취약국 경제 지원과 민간 재원이 취약국의 발전에 투자되도록 유도하는 혼합금융 등 파트너십 구축도 향후 국제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다.
냉엄한 국제정치·경제 현실 인정하면서도
글로벌 취약성 개선 위한 국제적 논의와 연대의 노력 지속해야
한편 국제정치와 경제에서 현실주의적 접근이 강화되는 상황을 인정하면서 국제적 연대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정학적 경쟁 심화, 무역과 개발협력의 통합, 상호 호혜적 접근법(거래주의)의 확대 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면서도 현실 국제정치가 글로벌 취약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의와 연대의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국제사회에는 두 번의 주요한 기회가 있다. 첫 번째 기회는 6~7월 스페인 세비야에서 10년 만에 개최되는 제4차 개발재원총회다. 여기서 다루는 국제개발협력, 국내 재원 동원, 민간 재원 동원, 무역, 채무, 과학기술 혁신, 국제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논의가 글로벌 취약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두 번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의장직을 수행하는 G20 회의다. 취약국 다수가 아프리카에 집중돼 있는 상황에서 아프리카 국가가 G20 의장국을 수행한다는 상징성을 감안하면 아프리카 지역의 발전 및 SDGs 달성, 포용적 발전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논의의 장이 국제사회가 더욱 연대해 글로벌 취약성을 완화하기 위한 지혜를 모으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