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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출범 30주년 맞이한 WTO, 새로운 글로벌 과제에 어떻게 대응할까
이주영 주제네바대표부 상무관 2025년 03월호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 이후 WTO는 관세·비관세 장벽 완화, 자의적 차별 금지, 불공정 관행 규율, 통상분쟁 해결 등 다자무역체제를 형성하며 지난 30년간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 확대에 기여해 왔다. 지난해 9월 발표된 「2024년 WTO 세계무역보고서」는 1995~2023년 글로벌 1인당 GDP가 65% 성장하고 같은 기간 중·저소득 국가 소득은 3배 증가했음을 보여주며, 다자무역체제가 경제성장과 빈곤 감축, 선진국과 개도국 간 격차 축소에 기여해 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럼에도 최근 WTO가 내놓고 있는 협상 실적을 보면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모든 회원국이 농업협상, 수산 보조금 2단계 협상에서 성과를 도출하자는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지만 막상 협상장에 들어서면 자국 입장에서 한 발짝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여기에 개도국들은 WTO 규범의 개도국 특혜 확대를 요구하며 선진국과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분쟁해결체제는 2019년부터 상소기구 기능이 마비돼 온전히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 진행된 개혁 논의도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투자 원활화, 전자상거래 등 복수국 간 협상(Joint Statement Initiative)은 협정문의 WTO 편입에 대해 회원국 간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막혀 있다. 문제는 제네바에서 회원국들이 과거의 협상 임무(mandate)와 숙원 과제(legacy Issue)들을 거론하며 각자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사이 WTO 바깥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WTO의 가장 큰 관심 의제 중 하나는 기후변화 대응···
CBAM 등에 다자 차원의 실용적 접근 필요성 대두

2025년 출범 30주년을 맞이한 WTO는 향후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인가. 글로벌 통상환경은 급속한 디지털화와 인공지능 시대 도래, 기후변화 대응, 지정학적 긴장, 전략적이고 탄력적인 공급망 구축 등 새로운 과제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WTO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마라케시 협정에 기술된 그 설립 목적인 인류의 생활수준 향상, 완전고용, 상품과 서비스 생산 확대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기후변화 대응은 현재 WTO가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의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무역과 환경’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이슈다. 이미 WTO 출범 초기부터 미국 가솔린 사건(대미 최대 가솔린 수출국 베네수엘라, 브라질은 미국이 자국의 청정공기규칙에 따라 해당국의 가솔린을 미 정유업체의 것보다 더 정제되도록 규정해 수출을 저해했다고 주장하며 WTO에 제소함)과 같은 일련의 분쟁을 통해 환경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일정 조치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20조 일반예외로 인정될 수 있을지 논의를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2001년 도하라운드는 무역과 환경 논의와 관련해 다자환경조약(MEA)과 WTO 규범의 관계, MEA 사무국과 WTO 간 정보 공유 절차, 환경 상품·서비스에 대한 관세·비관세 장벽 축소를 협상 임무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2025년 우리가 직면한 세계는 특정 환경 조치가 WTO 규범을 위반하는지 여부 또는 환경협정과 WTO 규범 간 관계를 논의하는 것만으로는 대응이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인류 공동과제에 WTO가 기여하고, 무역과 환경이 한쪽의 양보로 한쪽이 이익을 얻는 관계가 아닌 상호 지지적 관계가 되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최근 WTO 내 기후변화 대응 관련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데, 정례회의체인 무역과 환경 위원회(CTE)뿐 아니라 78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무역과 환경 지속가능성 대화(TESSD), 82개국이 참여하는 플라스틱 오염과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플라스틱 무역에 대한 대화(DPP), 48개국이 참여하는 화석연료 보조금 개혁(FFSR) 등 복수국 간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최근 회원국들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는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로 대표되는 무역 관련 기후변화 대응 조치(TrCM; Trade-related Climate Measures)다. 2023년 10월 시행된 EU CBAM에 따르면 EU로 수출하려는 기업은 상품 내재 배출량을 측정해 보고해야 하며, 2026년부터는 이러한 배출량에 따른 CBAM 인증서를 구매해야 한다. 그간 다수 회원국은 WTO 내 다양한 논의 채널을 통해 해당 조치가 시장 접근 기회를 박탈하고 자의적·차별적인 조치로 WTO 규범을 위반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럼에도 비슷한 조치가 더욱 확산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영국이 2027년부터 유사한 국경 조치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호주, 캐나다, 미국 등에서도 관련 논의가 진행 중이다. 

기후변화 대응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러한 조치는 탈탄소 공정과 친환경에너지 사용을 촉진하고 저탄소 상품 무역을 활성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반면 배출 측정, 보고와 관련한 복잡한 산식과 행정절차는 기업에 부담을 주고, 차별적이고 자의적인 조치는 WTO 의무 위반의 소지가 있다. 무엇보다 아직 배출량 측정·검증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개도국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다수 국가가 서로 다른 기준과 방법론을 사용하게 되면 더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물론 개별 조치가 WTO 규범을 위반했는지는 분쟁해결기구를 통한 소송으로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국가 간 분쟁은 패널 설치부터 판정까지 기나긴 시간이 소요되고 판정이 나더라도 국제법 체제 특성상 그 이행을 강제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따라 분쟁 절차와는 별개로 다자적 차원에서 더 실용적인 접근을 모색해 실질적으로 기업 비즈니스를 돕고 무역 왜곡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12월과 올해 2월 WTO CTE 차원에서 TrCM에 대한 주제별 토론회를 개최해 기후변화, 표준 등 관련 국제기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무역 관련 작업들을 공유하고, 개도국 산업계가 직면한 도전이 무엇인지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논의에 이어 개별 국가의 TrCM 수립과 집행에서 회원국들이 준수해야 할 다자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도출해 보자는 제안도 힘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도 다자통상체제에 기여하면서 우리 업계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논의에 참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한 또 하나의 이슈로는 보조금 논의를 들 수 있다. 우선 전통적으로 화석연료 보조금 등 소위 환경에 유해한 보조금 규율을 강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는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산 보조금 협상도 이와 맥을 같이하며 G20, G7,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에서도 이미 15년 전부터 논의되고 있는 흐름이다. 이와 별개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흥미로운 주제는 WTO가 소위 ‘녹색 보조금’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지의 문제다. 

현행 WTO 보조금 규범은 금지보조금과 조치 가능 보조금을 규율하면서 보조금이 상대방 회원국 산업에 피해를 주는지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이제 이러한 기존 보조금 규범 틀을 수정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 소재 비영리 기관인 빌라르 연구소(Villars Institute)는 2023년 ‘빌라르 프레임워크(Villars Framework)’라는 이름으로 보조금의 시장 왜곡만 볼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성 영향과 무역 왜곡 영향을 함께 고려하는 규범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OECD는 무엇이 녹색 보조금인지에 대해 ‘녹색’ 분야(재생에너지 등)와 ‘갈색’ 분야(철강 등)를 우선 구분하고, 각각 환경적으로 유해한 보조금(생산 확대)과 이로운 보조금(탈탄소 철강 지원) 영역이 존재한다는 매트릭스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의가 당장 회원국 내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구체적 협상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WTO 규범의 업그레이드를 논의할 때를 대비해 곱씹어 볼 만한 제안이라 생각된다. 필자는 관련해 TESSD의 4개 작업반 중 하나인 보조금 작업반의 조정자 역할을 맡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한 다양한 정부 인센티브가 무역과 환경에 미치는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함께 들여다보고 각 회원국 정책과 비즈니스 경험을 공유하는 세션을 진행하며 향후 본격적인 다자 협상이 진행될 시기를 대비하고 있다. 

WTO에서 결렬된 환경 상품에 대한 관세 철폐 논의는
양자·복수국 협정 등으로 진행 중

마지막으로 짚어볼 것은 환경 상품·서비스 자유화 논의다. WTO에서는 2014~2016년 동안 환경 상품에 관세 철폐 또는 감축을 논의하는 환경상품협정(EGA) 협상이 진행되다 결렬된 바 있는데, 최근에는 양자(GEA; 호주·싱가포르 간 녹색경제 협정) 또는 복수국(ACCTS; 기후변화, 무역, 지속가능성에 관한 협정으로 아이슬란드·뉴질랜드·스위스·코스타리카 간 체결) 협정 등에서 이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최근 WTO는 TESSD 작업반 중 하나인 환경 상품·서비스 작업반에서 재생에너지 등 기후감축뿐 아니라 물 관리 등 개도국 관심사인 기후 적응 분야를 포함해 관련 상품·서비스 식별 작업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를 협상으로 이끌어가려는 동력 자체는 크지 않은데, 이전과 달리 전기차, 태양광 등 녹색산업 분야에서 중국이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트럼프 행정부 취임 한 달이 지난 지금 대중국 10% 관세 부과, 캐나다·멕시코에 관세 부과 위협, 철강·알루미늄 25% 관세 부과 등 미국발 통상 긴장이 확산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해 다수의 보복·대응 조치가 취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자통상체제가 풍랑을 맞아 휘청거릴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30년간 세계경제를 지탱해 온 다자통상체제라는 큰 축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WTO가 그간 다져놓은 견고한 체계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디지털 전환, 기후변화 대응 등 새로운 도전 과제에 기여하고 역할을 찾아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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