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WTO 전자상거래 논의가 실질적 규범 창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포용성과 형평성을 고려한 합의 도출 노력,
기술·재정 지원을 통한 개도국 역량 강화, 민간 및 시민사회와의 소통 강화 등으로 제도적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
디지털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전자상거래 이슈는 WTO에서 가장 역동적인 의제 중 하나로 부상해 왔다. WTO, IMF,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OECD,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공동 분석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제공된 서비스 수출은 약 3조8,200만 달러에 달하며, 전체 서비스 수출의 54%, 전체 상품 및 서비스 수출의 12%를 차지한다. 이는 2005년 대비 약 4배 증가한 수치로 디지털서비스 수출은 연평균 8.1%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전통적인 상품(5.6%) 및 기타서비스(4.2%) 수출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UNCTAD는 2022년 전 세계 주요 43개국의 기업 전자상거래 매출이 팬데믹 이전인 2019년 대비 약 25% 증가한 27조 달러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이는 전자상거래가 전 세계 기업 매출 및 교역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디지털 무역은 글로벌 교역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무역 규범 또한 그 변화를 반영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WTO 전자상거래 논의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관세 모라토리엄 및 전자상거래 작업계획(Work Programme on Electronic Commerce)과 전자상거래 공동성명이니셔티브(JSI) 협상의 주요 동향, 쟁점을 중심으로 WTO 내 관련 논의의 전개 양상을 조명하고자 한다.
전자적 전송물 관세 유예하는 모라토리엄 연장 여부,
디지털 무역에서 WTO 역할 가늠하는 시험대
WTO는 1998년 제2차 각료회의에서 전자상거래에 대한 포괄적 논의를 시작하며 두 가지 핵심 조치를 도입했다. 첫째,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관세 부과를 유예하는 ‘모라토리엄’을 채택했다. 둘째,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을 수립해 전자상거래가 무역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검토하고자 했다.
당시 모라토리엄은 차기 각료회의까지 한시적으로 적용하는 결정이었고, 이후 매 각료회의에서 유예 종료 시기는 주기적으로 연장돼 왔다. 지난해 제13차 각료회의(MC-13)에서도 연장됐는데, 당시 국내 언론에서도 이를 MC-13의 주요 성과로 보도한 바 있다. MC-13에서 기대했던 농업 및 수산 보조금 분야의 다자협상 성과 도출에 실패한 상황에서, 모라토리엄 연장이라는 결과라도 도출된 데 안도의 반응이 있었다.
이처럼 모라토리엄 연장은 급변하는 글로벌경제 환경 속에서 WTO가 디지털 무역, 기후변화를 비롯한 현대적 과제에 대해 실질적인 규범 마련과 같은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자상거래 분야에서 낸 유일한 성과로 평가됐다. 그러나 인도,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일부 개도국들은 모라토리엄이 자국의 세수 확보와 산업정책 수단을 제한한다고 주장하며 모라토리엄 연장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 왔고, MC-13에서도 마지막 순간에 가까스로 연장 합의에 도달했다. 개도국들의 우려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자적 전송물’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 모라토리엄의 적용 범위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둘째, 디지털화로 물리적 상품 수입이 감소하면서 기존의 관세 수입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관세 수입 의존도가 높은 개도국의 재정에 부담을 주고 있다. 셋째, 관세는 산업육성 및 정책재량 확보를 위한 중요한 정책 수단인데 모라토리엄이 이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및 선진국들, 일부 개도국들은 모라토리엄이 디지털 무역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며 글로벌 전자상거래시장의 성장을 촉진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 등은 한시적 관세 유예 및 연장 대신 영구적 관세 유예를 지지하고 있다. OECD 및 IMF는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관세 부과가 소비자가격 상승과 시장 접근성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라토리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MC-13에서의 모라토리엄 연장 결정은 2026년 3월 31일 또는 제14차 각료회의(MC-14) 중 먼저 도래하는 시점에 종료한다고 명시돼 있다. 따라서 MC-14까지 연장에 다시 합의하지 못한다면 모라토리엄은 종료된다. 개도국들의 회의적인 입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MC-14에서의 연장 여부는 WTO가 디지털 무역 및 전자상거래 영역에서 최소한의 역할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개도국 참여 확대 등이 목표인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은
제14차 각료회의 이후 논의 구체화 기대
한편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은 개도국의 전자상거래 참여 확대, 디지털 인프라 개선, 기술 이전 촉진 등을 목표로 하나 지난 20여 년간 실질적인 진전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MC-13에서는 작업계획의 재활성화 필요성에 공감하며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한 논의가 강조됐다. 이에 따라 올해는 디지털 격차, 인프라 구축, 법적 프레임워크, AI 등 신기술, 모라토리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며 이 논의 결과 및 권고사항을 MC-14에서 각료들에게 보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보고 내용에 대해 회원국이 서로 합의하고 각료들이 이를 채택할 경우 MC-14 이후 전자상거래 논의 방향이 구체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앞서 살펴본 모라토리엄 및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이 WTO 모든 회원국이 참여하는 다자 차원의 논의라면 전자상거래 공동성명 이니셔티브(JSI)는 희망하는 회원국들만 참여하는 복수국 간 협상이다. 전자상거래 JSI는 2017년 제11차 각료회의(MC-11)에서 71개 회원국이 전자상거래 관련 무역 규범 논의를 시작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출범했다. 이후 2019년부터 76개국이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으며 현재까지 참여국 수는 91개국으로 증가했다. 이 협상은 호주, 일본, 싱가포르가 공동의장국으로서 주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참여국들은 전자상거래의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는 규범 마련을 위해 협상한 바 있다.
지난해 7월 26일 5년간의 협상 끝에 이른바 ‘안정화된 텍스트(stabilised text)’가 공개됐으며 이는 총 38개 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전자적 전송물에 대한 관세 부과 금지 조항은 참여국들이 디지털 콘텐츠의 자유로운 흐름을 보장하기 위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합의한 내용이며 향후 5년마다 검토를 거쳐 지속 여부를 판단한다. 둘째, 전자거래의 법적 기반 확립을 위한 조항은 전자서명, 전자계약, 전자송장 등 전자문서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고, 종이 없는 무역(paperless trading)을 촉진한다.
셋째, 개인정보 보호 및 사이버보안 관련 조항은 자국의 법령과 국제 기준을 조화롭게 운용하며 사이버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협력과 위험 기반 접근 방식을 포함한다. 넷째, 개도국 및 최빈개도국(LDCs)에 대한 배려 조항은 최대 7년간의 이행 유예를 허용하며 기술 이전, 인프라 지원, 역량 강화 등을 포함한다.
JSI 협상과 ‘안정화된 텍스트’ 발표는 실질적 진전이나
공식 협정으로는 채택 못 돼 합의 기반 결정 방식 한계 드러나
전자상거래 JSI 협상과 ‘안정화된 텍스트’의 발표는 WTO 차원에서 디지털 무역 전반에 관한 규범을 다룬 첫 시도로, 실질적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존의 모라토리엄 연장 중심의 논의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협정 형태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이 협정은 WTO 역사상 최초의 디지털 무역 관련 글로벌 규범이라는 데서 큰 의의를 가진다. 디지털경제가 글로벌 GDP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안정화된 텍스트’는 전자상거래를 포함한 디지털 교역에 적용될 수 있는 기본 규칙을 마련함으로써 기업의 예측 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을 높이고 국경 간 디지털 거래의 장벽을 완화한다.
OECD의 예비 분석에 따르면 이 협정의 이행은 참여국의 디지털 무역 통합 수준을 평균 52% 이상 높일 수 있으며 일부 국가는 최대 150%까지 개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특히 디지털 관련 조항을 다수의 기존 협정에 포함하지 못한 개도국에 실질적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안정화된 텍스트’는 아직 WTO 공식 다자협정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협상에 참여했던 회원국 중 일부는 이 텍스트에 동의하지 않았거나 동의 확정을 위해서는 추가 내부 절차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전자상거래 JSI 협상에 참여하지 않은 인도는 전자상거래 JSI 협상 내용과 관계없이 절차 및 시스템상 우려를 제기하면서 반대하고 있다. 즉 일부 국가 간의 논의인 JSI 협상 결과가 모든 WTO 회원국에게 구속력 있는 WTO 다자 규범으로 편입되는 데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미 인도는 MC-13에서 또 다른 JSI 결과물인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IFD) 협정’의 WTO 규범 편입에 반대한 바 있다. 이는 WTO 내 합의 기반 결정 방식과 다자주의 원칙의 한계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전자상거래 관련 규범이 디지털 격차를 확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인프라, 기술, 제도적 준비가 미흡한 일부 개도국의 경우 규범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으며 대형 기술기업에 유리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이에 따라 포용성(inclusiveness) 확보가 향후 협상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WTO 회원국들은 전자적 전송물의 모라토리엄 및 전자상거래 작업계획은 WTO 내 전통적 논의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JSI는 자발적 참여 기반으로 협상을 진행해 오며 디지털경제 시대의 규범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향후 WTO 전자상거래 논의가 실질적 규범 창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포용성과 형평성을 고려한 합의 도출 노력, 기술·재정 지원을 통한 개도국 역량 강화, 민간 및 시민사회와의 소통 강화 등을 통해 제도적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전자상거래 논의는 WTO가 디지털 무역 규범 마련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완수하며 글로벌 통상 질서에서 중심 역할을 지속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