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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WTO 개혁, 동상이몽일까 위기의 WTO를 구하는 돌파구일까
신선연 주제네바대표부 2등서기관 2025년 11월호
주요국들은 만장일치의 컨센서스 제도 대신 선택적 미참여(opt-out)나 WTO 설립 협정에서
명시하고 있는 투표의 활용 등 유연한 방식의 의사결정 방식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일부 개도국 그룹들은 모든 회원국의 의사가 공평하고 포용적으로 고려되기 위해서는 해당원칙에 대해 협상이 불가하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회원국들은 WTO가 변화하는 무역 환경 흐름과 속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대해
새 논의를 지속하며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화된 규범을 통해 WTO의 적실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과
기존 협상 기능을 온전히 회복하고 과거 각료회의에서 결정된 사항과 권한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 공존해 하나 된 입장에서 새로운 규범을 만들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요즘 제네바 WTO의 모든 회의장에서 ‘WTO 개혁’이란 단어를 빼놓고 논의를 이어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만큼 어떤 논의에도 빠지지 않는, 말 그대로 지금 가장 뜨거운 이슈다. 

설립 30주년 맞은 WTO,
20년 이상 된 해묵은 WTO 개혁 논의 재시동


올해 WTO는 설립 30주년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WTO의 존재 이유(raison d’e tre)가 위협받고 있다. 한 축은 외부적 요인, 또 다른 한 축은 내부적 요인 때문이다. 우선 외부적 요인으로는 미국발 관세 문제로 WTO 기본 원칙인 최혜국대우(동일한 상품이라면 어디에서 수입되든 차별대우 금지), 내국민대우(수입 상품과 국내 상품 차별대우 금지)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디지털, 서비스, AI, 기후변화, 환경 관련 무역 조치의 등장 등 새로운 이슈들이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WTO 규범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다른 한 축인 내부적 요인은 협상 장기화와 다자간 협정 타결 불발 문제다. 지난 9월 15일 수산보조금 협정이 2001년 협상 시작 후 24년 만에 발효됐다. 다자간 협정으로는 WTO 설립 이후 무역원활화 협정에 이어 두 번째다. 극적으로 발효되긴 했지만 다른 다자간 협정들은 수년간 번번이 타결에 실패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왔다.

WTO 개혁은 모두가 알다시피 새로운 이슈는 아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무역체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개혁 관련 소그룹 회의, 제안서 논의, 비공식 회의(리트릿) 등이 개최돼 왔다. 2022년 제12차 각료회의(MC-12)에서는 WTO 개혁 논의를 하는 데 공식적으로 합의하면서 WTO의 3대 기능(협상, 이행·모니터링, 분쟁해결) 개선을 포함한 개혁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해 제13차 각료회의(MC-13)에서도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하는 데 실패하면서 WTO 체제의 효용성 자체에 대한 비판이 더욱 커졌다. 

이러한 WTO 내부에서의 개혁 실패와 더불어 트럼프 행정부의 재등장으로 WTO는 또다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지난 4월 10일 WTO 설립 30주년 기념 행사 등을 기점으로 WTO 개혁 논의에 다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내년 3월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개최되는 제14차 각료회의(MC-14)에서는 반드시 개혁과 관련한 성과를 만들어내 국제사회에 WTO의 적실성과 효용성을 증명해 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러한 사무총장의 의지에 따라 올 6월 지난해 일반이사회 의장직을 맡았던 페터 올버그(Petter Ølberg) 노르웨이 대사가 개혁 논의를 주도할 개혁 조정자(reform facilitator)로 임명됐다. 



개혁 논의의 핵심은 거버넌스, 공정성, 현시대의 과제

개혁 조정자는 지금까지 두 차례의 회원국 그룹 협의(6~7월)와 한 차례의 전체회의(9월)를 개최했다. 조정자는 개혁 논의를 크게 3가지 트랙으로 나눠 논의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거버넌스, 공정성 그리고 현시대의 과제다. 

첫째, 거버넌스는 제도적 이슈로 컨센서스를 포함한 의사결정, 협상 방식과 수단, 기존 협상과 협정, 분쟁해결 논의를 의미한다. 다만 개혁 조정자는 분쟁해결 이슈의 경우 자신의 권한을 벗어나므로 논의에서 제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거버넌스 논의의 핵심은 WTO의 독특한 의사결정 체제인 컨센서스 제도(총의제)다. 컨센서스 제도는 회의에 참석한 회원국 중 제안 안건에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회원국이 없을 경우 결정이 이뤄지는 방식이다. 주요국들은 컨센서스가 중요한 의사결정 관행이긴 하지만 이러한 관행이 논의의 진전을 가로막는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고 이미 여러 번 강조해 왔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복수국 간 협정인 투자원활화 협정의 경우 WTO 규범 내로 편입하려 했으나 협정 미참여국인 극소수의 회원국이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서 수년간 진전이 가로막혀 있었다. 이처럼 일부 국가들이 컨센서스 제도를 자국 입장에 유리한 약속을 얻어내기 위한 일종의 협상 무기로 악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주요국들은 보다 유연한 방식의 의사결정 방식, 즉 선택적 미참여(opt-out)나 WTO 설립 협정에서 명시하고 있는 투표의 활용 등이 검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부 개도국 그룹들은 컨센서스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모든 회원국의 의사가 공평하고 포용적으로 고려되려면 해당 원칙은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공정성, 즉 공정한 경쟁의 장과 균형 잡힌 무역 문제다. 이는 개발, 특별 및 차등대우(S&DT; Special and Differential Treatment), 투명성, 시장 접근(관세, 상호주의, 비관세장벽), 보조금 문제 등을 포함한다. 이 중에서 개발과 S&DT는 공정성 트랙에서 가장 많은 회원국이 언급하고 있는 이슈다. 개도국들은 오랫동안 논의해 왔던 개도국·최빈개도국(LDC) 지위 졸업 문제와 함께 아프리카, 카리브해 및 태평양 그룹, LDC 등을 포괄하는 G90 그룹에 유연성을 부여하는 문제 등 개발 의제 협상의 진전과 개도국에 대한 S&DT의 실질적 이행이야말로 WTO 개혁이라고 한목소리로 강조하고 있다. 이에 선진국들은 개발 이슈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S&DT는 각국의 상이한 개발 수준에 따라 객관적 근거와 수요에 맞게 적용돼야 하며 포괄적인 유연성 요구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공정성 트랙에서 논의되고 있기는 하나 투명성(특히 무역 관련 조치에 대해 WTO에 투명하게 통보하는 문제), 시장 접근, 보조금 문제는 그 어떤 이슈보다 국가별 이해와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WTO 개혁 논의 틀 아래에서 구조화된 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셋째, 공급망 회복력, 경제 안보, 기후변화, 디지털, AI 등 현시대의 과제다. 대내외적으로 WTO가 변화하는 무역 환경의 흐름과 속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에 회원국들은 비공식 협의체, 워크숍, 심층토론 등 전통적인 협상 트랙을 벗어나 새로운 무역 이슈에 대한 논의를 지속해 나가며 대응하고 있지만, 하나 된 입장에서 새로운 규범을 만들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새로운 무역 이슈를 반영한 현대화된 규범을 통해 WTO의 적실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과 기존 협상 기능을 온전히 회복하고 과거 각료회의에서 결정된 사항과 권한(mandate)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불과 5개월 남짓 남은 MC-14, 개혁 성과 거둘까?

개혁 조정자는 이렇게 세 가지 트랙을 중심으로 지난 10월까지 논의한 결과, 현시대의 과제 이슈를 제외하고 우선 거버넌스, 공정성 이슈를 중심으로 MC-14 전까지 논의를 진전시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회원국들과 협의한 결과 대부분이 의사결정 체제와 개발, S&DT 이슈를 우선 논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내년 3월 아프리카 카메룬에서 개최될 MC-14가 불과 5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WTO 166개국 회원국 간 개혁 논의가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다. 그 어떤 회원국도 WTO가 개혁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결국 문제는 무엇(what)과 어떻게(how)다. 회원국들은 개혁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에 관해 모두 다르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다가올 MC-14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 위기에 빠진 WTO 체제가 그래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기준 GDP 대비 수출입 비율이 90.9%에 달하는 등 무역의존도가 높은 국가다. 또 경제성장을 통해 WTO 규범에 기반한 다자무역체제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만큼 MC-14 그리고 그 이후에도 WTO 개혁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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