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인구의 40% 이상이 외국인이며 이들 상당수가 국제기구 생태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제기구의 위축과 직원 감소는 곧 지역경제의 위기와 직결될 수 있다.
레만호 남서쪽 끝,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제네바는 취리히에 이어 스위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지만 인구는 불과 20만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 규모만 보면 유럽의 여느 중소 도시와 차별점이 없을 것 같지만 국제사회에서 제네바가 가진 존재감만큼은 세계 어느 대도시에도 뒤지지 않는다. 제네바의 명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레만호를 품은 수려한 풍광,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으로 향하는 관문 그리고 롤렉스와 파텍 필립 본사가 위치한 스위스 명품 시계 산업의 중심지 등 제네바에 붙는 수식어는 실로 다채롭다.
1920년 국제연맹 창설 후 국제기구 밀집한 제네바,
스위스 중립국 지위 활용해 국제분쟁 중재지 역할 수행
그러나 제네바가 오늘날과 같은 국제도시로서의 명성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20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창설이었다. 그 후 각종 국제기구가 이곳에 자리 잡으며 다자외교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다. 제네바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주요 외교 협상의 무대이자 그간 탄생한 수많은 ‘제네바 협약·협정’의 본산으로 역할을 해왔다.
현재 제네바에는 유엔 제네바 본부를 중심으로 WTO, 세계보건기구(WHO), 국제노동기구(ILO),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등 43개의 국제기구가 밀집해 있다. 여기에 약 450개의 NGO, 각종 재단과 싱크탱크, 대학 등이 가세해 무역, 인권, 인도적 지원, 보건, 노동, 지식재산권, 첨단기술 등 방대한 의제가 한 도시 안에서 교차하는 소위 ‘제네바 생태계(Geneva Ecosystem)’를 형성하고 있다. 각국 외교단과 전문가들이 ‘제네바’라는 한 배에 올라 인류 공통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계를 바탕으로 제네바는 스위스의 중립국 지위를 활용해 주요 국제분쟁의 중재지 역할도 수행해 왔다. 2025년만 해도 미중 무역 협상,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3개국(E3)과 이란 간 핵 협상, 미국·우크라이나 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 등 국제정세의 향방을 가르는 굵직한 협상들이 이곳에서 개최되며 그 가치를 증명했다.
그러나 대체 불가능해 보였던 제네바의 지위는 최근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화로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다수 국제기구의 최대 공여국인 미국이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재정 지원을 축소하고, 일부 유럽 국가들이 국방비 증액의 여파로 인도적 지원 예산 등을 감축하면서 제네바 소재 국제기구들은 조직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실제로 주요 선진국의 예산 기여 비중이 높은 유엔난민기구(UNHCR)와 국제이주기구(IOM) 등은 조직의 현대화와 효율성 증대를 위한 ‘UN80 이니셔티브’ 개혁 조치로 이미 상당 규모의 인력을 줄였거나 줄일 예정으로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가동하고 있다. 일부 기구는 물가가 높은 제네바에서의 유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일부 인력을 여타 도시로 분산·이전 배치하는 방안까지 적극 검토 중이다.
스위스 정부, 국제기구의 이탈 막기 위해
2029년까지 5년간 2억6,900만 스위스프랑 투입
주요국의 분담금 미납으로 인한 단기적 유동성 위기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또한 자유주의 질서의 퇴조와 다자주의의 위기 속에서 오랜 시간 다자외교의 심장 역할을 해온 제네바의 입지 또한 약화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는 제네바를 핵심 외교·경제 자산으로 활용해 온 스위스 정부에도 시급한 위기 신호가 됐다. 스위스 연방 외교부는 제네바를 “스위스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플랫폼이자 도구”로 규정하고 있다. 평화, 인권, 자유무역 등 스위스의 핵심 가치를 다자 협상과 표준화 수립으로 연결하는 무형의 자산이 바로 제네바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요 국제문제 협상장으로서 제네바의 입지는 영세 중립국으로서 스위스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산이 돼왔다.
아울러 제네바 인구의 40% 이상이 외국인이며 이들 상당수가 국제기구 생태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제기구의 위축과 직원 감소는 곧 지역경제의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
이에 스위스 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제네바의 다자주의 생태계를 ‘인터내셔널 제네바(International Geneva)’로 부르고, 현재 상황을 다자주의 중심지인 제네바에 대한 구조적 위협으로 진단하며 다자주의 중심지로서의 제네바를 지켜내기 위한 대규모 긴급 패키지 예산을 지난해 6월 승인했다.
스위스 정부는 2025년부터 2029년까지 총 2억6,900만 스위스프랑(약 5천억 원)을 투입할 예정인데, 이 중 8,200만 스위스프랑(약 1,500억 원)은 2025~2026년 동안 당장 재정난을 겪는 국제기구들의 유동성 위기를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아울러 1억8,700만 스위스프랑(약 3,500억 원)은 2026~2029년 청사 개보수와 클라우드·IT 인프라 투자, 회의 및 보안 서비스 등 호스트국으로서의 기본 지원 비용으로 지출될 계획이다. 특히 이번 예산이 제네바 국제기구 건물재단(FIPOI)에 대한 무이자 대출과 상환 유예 등 부동산 비용 완화 조치에도 투입돼 국제기구들의 재정 압박과 다른 도시로의 이전 압력을 일부 해소해 줄 것으로 보인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다자주의와 국제협상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제네바가 자유주의 질서의 퇴조와 함께 국제도시로서의 명성을 잃게 될지 아니면 스위스 정부의 대대적인 노력에 힘입어 다가올 100년 후에도 그 명성을 지켜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