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가격과 탄소시장을 함께 설계하는 접근은 단순한 정책 조합이 아니다. 둘의 관계는 정합성과 경계 설정을 세심히 고려해 설계돼야 한다. 이는 기후정책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전환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최근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면서 다시금 에너지 공급 불안과 가격 변동성이 글로벌경제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이러한 위기는 현재 에너지체계의 취약성과 화석연료 의존이 지닌 구조적 리스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기후정책은 더 이상 환경 보호만의 의제가 아닌 에너지 안보와 경제 안정성을 동시에 좌우하는 정책 영역이다. 그리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기는 기후정책을 약화하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필요성을 강화하는 현실적인 근거다. 이러한 맥락에서 탄소가격은 경제 전반의 에너지 사용과 투자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준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79개국 유효탄소가격, 감축 유도하기에 충분치 않아…
비제도권의 자발적 탄소시장에선 ‘무결성’이 가격 결정
한국은 지난해 11월 브라질 벨렝에서 열린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0)에서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53~61% 감축하겠다는 새로운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공표했다. 또한 ‘글로벌 자발적 탄소시장(GVCM) 로드맵’을 발표하며 국제 감축과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소가격은 각국의 감축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또 감축 약속이 실제로 이어지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탄소가격이 충분히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장기 목표도 선언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OECD의 보고서 「유효탄소가격 2025 (Effective Carbon Rates 2025)」에 따르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 중 상당 부분이 여전히 낮은 수준의 가격에 놓여 있다. 유효탄소가격은 탄소세, 배출권거래제, 연료소비세를 통합해 톤당 이산화탄소 배출에 부과되는 평균 가격을 산출한 것이다. 2023년 기준 전 세계 배출량의 82%를 차지하는 79개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배출권거래제나 탄소세가 적용되는 배출 비중은 27%에 불과했다. 또한 다수 국가에서 전력·산업 부문은 배출권거래제 중심이나 무상할당과 예외 규정을 둬 실질 가격 부담이 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해당 결과는 탄소가격 제도가 확산되고는 있지만 감축을 유도하기에 충분히 ‘유효한(effective)’ 가격이 형성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격 수준은 낮고, 적용 범위는 불균등하며, 장기 감축 신호로서의 신뢰성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는 탄소가격 정책의 실패라기보다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함이 바람직하다. 탄소가격은 강력한 정책 수단이지만 정치적·사회적 제약 속에서 단계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다. 특히 산업 경쟁력과 물가에 대한 우려가 큰 상황에서 단기간에 감축을 유도할 수준의 가격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결과 상당한 감축 잠재력이 가격 기반의 탄소 감축 제도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발적 탄소시장 논의가 등장한다. 먼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효탄소가격 보고서가 다루는 ‘제도 내 가격’과 ‘자발적 탄소시장 가격’의 차이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유효탄소가격이 포착하는 탄소가격은 본질적으로 정부 정책이나 규제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부과되는 가격 신호다. 즉 가격 기반 정책으로 배출에 비용을 부과해 경제 주체의 행동 변화를 유도한다. 여기서의 탄소가격은 자율적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공공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적 가격 신호다. 즉 가격이 낮게 형성된다면 그것은 시장 실패라기보다 정책 설계와 정치적 선택의 결과에 가깝다.
반면 자발적 탄소시장의 가격은 출발점이 다르다. 이 시장은 기업과 기관의 자발적 선택에 기반하며, 감축은 주로 국외에서 발생한 탄소 감축 프로젝트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가격을 형성하는 것은 법적 강제력이 아니라 신뢰, 평판, 기후 주장(claim)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이다. 즉 자발적 탄소시장의 가격은 강제력이 아닌 무결성(integrity)에 대한 기대에서 나온다.
OECD가 말하는 탄소시장의 무결성은 탄소 크레딧(credit)이 실제 감축을 왜곡없이 반영하고 기후정책의 신뢰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는 전 과정의 조건을 의미한다. 탄소시장의 무결성은 크게 공급·수요·시장의 무결성으로 구분된다. 공급 측 무결성은 크레딧 1톤이 실제 추가적인 탄소 1톤 감축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것으로, 추가성(탄소시장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감축 사업인지)이나 기준선의 보수성(감축량을 과다하게 산정하지 않았는지), 누출 방지(한 지역의 감축이 다른 지역의 배출 증가를 유발하지 않았는지) 등이 포함된다. 수요 측 무결성은 크레딧이 어떻게 사용되고 어떤 주장으로 연결되는지, 기업이 직접 감축을 위해 우선적으로 노력하고 크레딧을 보완적으로 사용하는지, 사용 목적과 기후 주장이 명확하고 투명한지가 핵심이다. 시장 무결성은 등록체계와 추적성, 데이터 투명성, 이해상충 관리, 이중 계상 방지 등 시장 인프라 전반의 신뢰성에 관한 것으로, OECD는 이 3개 중 어느 하나라도 약하면 탄소시장 전체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제도 내 가격과 자발적 탄소시장 가격은 상호관계,
자발적 시장은 규제시장에의 통합 아닌 별도 접근 필요
다시 탄소가격의 비교 논의로 돌아가면, 두 시장의 태생적 차이는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규정한다. 제도 내 탄소가격은 강력하지만 정책적인 제약을 받는다. 유효탄소가격 보고서가 보여주듯이 많은 국가에서 배출권거래제와 탄소세는 예외와 완화 규정으로 실제 가격 신호가 크게 약화돼 있다. 반대로 자발적 탄소시장은 제약은 적지만 무결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가격 자체가 신뢰를 잃는다. 자발적 탄소시장에 대한 우려와 회의론은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점은 이 둘의 차이가 대체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제도 내 가격은 국가의 감축 책임을 담보하는 기준선 역할을 하고, 자발적 탄소시장은 그 기준선 밖에 존재하는 추가적인 감축 기회를 포착하는 것으로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관계가 돼야 한다. 단, 이 상호보완 관계가 성립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역외 감축과 자발적 크레딧이 국내 가격 신호를 약화하는 우회로가 돼서는 안 된다. OECD가 강조하듯 탄소시장은 국내 감축을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보완하는 수단이어야 하며, 이는 회계 정합성과 명확한 사용 조건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또한 자발적 크레딧의 품질 기준은 제도 내 시장과 점진적으로 수렴해야 한다. 파리협정 제6조와 국제항공 탄소 상쇄·감축제도(CORSIA) 등과 같은 프레임워크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부가 참고할 수 있는 ‘공통의 품질 언어’를 최대한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각국이 제각기 다른 기준을 도입하면 시장은 파편화되고, 거래 비용은 증가하며, 결국 개도국으로의 기후 재원 흐름도 위축된다.
정책적으로 중요한 과제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제도 내 가격은 점진적으로 강화하고 제도 밖 가격은 엄격한 기준 아래에서 연결해야 한다. 다만 이 둘의 연결이 단순하고 직접적인 제도적 결합으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특히 자발적 탄소시장 크레딧을 배출권거래제와 같은 규제시장 내에서 직접적으로 인정하거나 이행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허용하는 접근에는 신중해야 한다. 국가 단위 감축 목표의 신뢰성을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 탄소시장 크레딧은 제도 내 감축처럼 법적 의무와 동일한 수준의 통제와 검증을 거치지 않고 품질과 방법론 편차도 크기 때문에 규제시장에서 그대로 사용될 경우 결과적으로 국내 감축을 대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한 회계 정합성과 이중 계상 문제도 핵심적인 리스크다. 이러한 이유로 OECD를 비롯한 국제 논의에서는 자발적 시장을 규제시장에 직접 통합하기보다는 별도의 경로로 관리하는 접근이 강조되고 있다.
탄소가격 지속 강화, 탄소시장의 엄격한 무결성 확보로
국제적 신뢰와 정책 실효성 동시 확보해야
탄소가격과 탄소시장을 함께 설계하는 접근은 단순한 정책 조합이 아니다. 둘의 관계는 정합성과 경계 설정을 세심히 고려해 설계돼야 한다. 이는 기후정책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전환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OECD와 유엔개발계획(UNDP)의 공동 연구 보고서 「기후를 위한 투자, 성장과 발전의 길(Investing in Climate for Growth and Development: The Case for Enhanced NDCs)」에 따르면, 감축 목표를 강화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 패키지를 도입할 경우 단기적인 조정 비용을 넘어 중장기적으로는 성장과 복지의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탄소가격 논의와 탄소시장 논의를 함께 보면 정책 방향은 더욱 분명해진다. 첫째, 탄소가격은 계속 강화돼야 한다. 각 부문의 실질 가격을 높이지 않고서는 구조적인 전환을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 탄소시장은 엄격한 무결성 기준 아래 전략적으로 활용돼야 한다. 이는 가격을 우회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가격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정부의 역할은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고품질 크레딧에 대한 지원, 기업의 기후 주장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 파리협정 제6조와의 정합성 확보 모두 가격정책의 신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탄소가격은 투자 방향을 제시하고, 탄소시장은 그 투자의 범위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탄소가격과 탄소시장을 일관된 정책의 틀 안에서 운용할 수 있는 국가만이 차기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이행 국면에서 국제적 신뢰와 정책 실효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