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으로는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향후 WTO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S&DT)를 포기한 한국은 이런 특수한 상황에 관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우리 나름의 입장을 정립하고, 적극적으로 논의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S&DT는 개도국 회원국들이 협정을 충실히 이행해 국제 무역체제에 진정으로 편입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예외적 방편이라는 점도 모두가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늘 생각하는 문제다. 한 나라의 국제적 위상은 오랜 시간 누적된 정책결정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떤 정책결정의 배경이자 자산,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식민 시대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성장가도를 달려오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수시로 점검했다. 동시에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채찍질해 왔다.
우리나라는 1996년 OECD에 가입한 이래 중견국, 중진국, 나아가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됐다. 2010년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도 가입하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유일무이한 성공 스토리 주인공이다. 2021년에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개도국 지위를 선진국(그룹 B)으로 변경했고, 지난 3월에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자체 판단에 따라 한국의 지위를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이 선진국이냐 개도국이냐 하는 질문에 선진국이 아니라고 답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WTO 개혁 논의의 중요한 축인 개도국 지위 문제…
‘자기선언’ 아닌 객관적 기준 마련 필요성 지속 제기돼
주제네바대표부에 부임해 가장 놀랐던 부분이 WTO에서 한국이 여전히 개도국이라는 것이다. WTO 회원국은 기본적으로 선진국과 개도국 중 어느 한 지위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회원국의 자기선언(self designation)에 기반한다. 한국은 1995년 WTO 가입 당시 농업과 같은 민감 분야를 보호하기 위해 개도국으로 자기선언을 했고, 이를 공식적으로 철회하지 않았다.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는 농업과 기후변화 분야 외에는 개도국 특혜(S&DT; Special and Differential Treatment)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고, 2019년엔 한 발 더 나아가 “향후 WTO 협상에서 S&DT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개도국이라는 법적 지위를 포기하는 것과 엄연히 구분되는 ‘정책 선언’이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부 언론에서 이를 두고 ‘(사실상) 개도국 지위 포기’로 보도해 일각에서 오해와 사회적 반발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WTO 시스템 내에서 여전히 개도국으로 분류된다. 더 이상 참석하지는 않지만 개도국 그룹에 여전히 초청되고 있으며 개도국의 의무만을 부담한다. 선진국들이 부담하는 의무는 지지 않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 협정(TRIPs)이 규정한 기술이전 촉진 및 연례 보고 의무를 예로 들 수 있다.
우리에게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이 주제를 굳이 지금 꺼낸 이유는 현재 회원국들이 뜨겁게 논의 중인 WTO 개혁 문제에 있어 S&DT 제도와 이를 활용할 수 있는 회원국의 자격 요건, 즉 개도국 지위에 관한 논의가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제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특히 미국은 2019년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부터 대규모 경제 회원국이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면서 개도국 지위는 자기선언이 아니라 객관적 기준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면서 OECD 회원 또는 가입 희망국 여부, G20 회원 여부, 세계은행 고소득국(high income country) 여부, 세계상품교역 비중의 0.5% 이상 점유 여부라는 4가지 객관적 기준을 제시했는데, 당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개도국 지위 포기 압박을 받던 국가들 중 유일하게 모든 기준에 해당하는 국가이기도 했다.
미국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들어 2019년에 한국과 브라질, 싱가포르, 코스타리카가 향후 WTO 협상에서 S&DT를 포기한 것을 진전으로 평가하면서도, 개도국 지위에 관한 객관적 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을 계속해서 제기하고 있다. 카메룬에서 열린 제14차 WTO 각료회의(MC-14) 직전인 지난 3월 23일 미국이 회람한 ‘WTO 개혁에 관한 추가적 견해(Further perspectives on WTO reform)’라는 제목의 문서나 MC-14에서의 각료발언을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다.
S&DT 개혁을 둘러싼 첨예한 입장 차로
본격 논의 시작되더라도 속도는 미지수
S&DT는 기본적으로 선진국과는 다른 개발 수준과 경제 규모를 가진 개도국들이 WTO의 패키지 협정에 일괄 가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동일한 규범을 적용받았을 때 겪을 어려움을 고려해 마련된 장치다. 즉 특정 의무 이행에 대한 유예나 면제 등 유연성을 부여해 일시적으로 숨통을 틔워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취지와 S&DT가 어디까지나 예외적 조치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회원국의 자격 요건에 대한 문제 제기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WTO 설립 이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시간이 흘렀고, 세계 정치·경제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으며 당시에는 누가 봐도 개도국이었던 국가 중 다수 회원국이 각고의 노력 끝에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소위 개도국이라는 집단 내 이질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WTO 2026∼2027년 예산을 기준으로, 세계 교역 규모 비중에 따른 WTO 의무분담금 1위 국가가 개도국으로 분류된 중국이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미국과 EU 등 선진국들은 개도국 그룹을 동질적 집단으로 전제하는 획일적 접근방식을 지양하고, 제도 설립의 목적과 취지에 맞는 수요 기반 맞춤형(fit for purpose, needs based, targeted) 접근방식을 주장한다. 또한 WTO 차원의 포괄적인 조사가 이뤄진 적은 없지만, 기존의 S&DT 제도가 효과적이고 활발히 활용되지 않고 있으며, 그 핵심 이유가 실사용자의 상황과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는 제도의 천편일률성이라는 인식도 퍼지고 있다.
반면 WTO 회원국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개도국 진영은 S&DT를 WTO의 불가분적 요소이자 개도국의 내재적 권리라 주장한다. 자기선언 원칙 또한 주권적 권리로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 주장하고 있다. 또한 S&DT 관련 논의는 최빈개도국(LDC) 졸업국에 대한 유예 연장과 S&DT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더욱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만드는 데(to make it more precise, effective and operational)’ 초점을 맞추고 있어 개혁 논의가 본격 진행되더라도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WTO 개혁 논의의 다른 한 축인 회원국 전체 동의, 즉 컨센서스가 전제된 의사결정 방식이 건재한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려운 구조인 데다 MC-14 채택에 실패한 개혁 작업계획이 언제 채택될지부터가 큰 물음표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열린 제14차 WTO 각료회의,
LDC 그룹 등 주도로 성과 노렸으나 기대에 못 미쳐
지난 3월 카메룬 야운데에서 막을 내린 MC-14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로 개최된 각료회의라는 데 의미를 부여하며 인도, 브라질, 아프리카 그룹, LDC 그룹 등이 ‘개발 각료회의’로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결과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 작업계획 채택은 물론 궁극적으로 개도국에 도움이 될 성과들조차 극소수 개도국 회원국의 반대로 타결 목전에서 좌초됐다는 부분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WTO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개혁 논의는 비록 그 과정이 험난하겠지만 반드시 진행될 것이다. 의사결정 방식, 공정 경쟁 등도 첨예한 논의의 장이 되겠지만, 개발 그리고 S&DT 문제는 진영 간 강한 대립이 예상되는 주제다.
이러한 가운데 공식적으로는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향후 WTO 협상에서 S&DT를 포기한 한국은 이런 특수한 상황에 관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우리 나름의 입장을 정립하고, 적극적으로 논의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오늘날, 30년 전에 만들어진 시스템이 적실성을 갖기란 쉽지 않다. 회원국들의 경제적 상황도 과거와는 천지차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S&DT는 개도국 회원국들이 협정을 충실히 이행해 국제 무역체제에 진정으로 편입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예외적 방편이라는 점도 모두가 상기해야 한다. 어렵겠지만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
※ 본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외교부나 주제네바대표부의 공식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