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한 GATT 제21조 안보예외, 환경을 내세운 제20조 일반예외 등 본래 좁게 열려 있어야 할 예외의 문들이 저마다 자국 산업정책의 통로로 동원되고 있다. 여기에 항구적 관세 인상이라는 제28조 카드마저 적극적으로 합류한다면, 지난 수십 년간 자유무역을 떠받쳐 온 다자무역체계는 빠르게 헐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WTO에서 가장 뜨거운 의제를 꼽으라면 단연 ‘관세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28조다. EU와 영국이 글로벌 철강 공급과잉에 대응한다는 명분 아래 자국 철강제품의 WTO 양허를 조정하겠다며 제28조 협상에 나섰기 때문이다. GATT 제28조는 한 번 약속한 관세를 일정한 사정 변경이 있을 때 고쳐 쓸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유연성 조항인데, 그간 통상 무대에서 조명받지 못하던 이 장치가 철강을 매개로 무대 한복판에 올라섰다.
유연성 조항인 GATT 28조, 철강 공급과잉으로 주목…다자협력 시도 깨지며 미 · 캐나다 등 각국 빗장 거는 중
흔히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철강은 전 산업의 토대인 까닭에 늘 통상 마찰의 중심에 있었고, 그 부침은 곧 다자무역체제 전체의 건강 상태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이번 조치가 주목받는 까닭은 단순한 개별 분쟁을 넘어 공급과잉이라는 전 지구적 병증과 각국의 보호주의, 그리고 다자질서의 작동 원리가 한꺼번에 거대한 시험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OECD 철강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철강 잉여설비는 약 6억4천만 톤으로, OECD 회원국 전체 생산량(약 4억2,600만 톤)을 2억 톤 이상 웃돈다. 세계 수요가 4년 연속 줄어드는 동안에도 생산능력은 7년째 늘어 24억 톤을 넘어섰다. 그 원인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시각은 다층적이다. 보조금, 저리 융자, 국유기업 우대 같은 비시장적 개입을 핵심 요인으로 짚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이 외에도 전 지구적인 수요의 구조적 둔화, 에너지정책 변화, 철강을 전략산업으로 여겨 의도적인 증설에 나선 신흥국들의 행보, 그리고 부실 설비의 폐업을 가로막는 제도적 장벽 등도 배경으로 지목된다. 무엇이 소위 ‘시장 왜곡적’ 보조인가를 두고도 WTO 보조금 및 상계 조치에 관한 협정(SCM) 개혁, 초국경 보조금 등 통상규범 논의가 분분하다.
원인을 둘러싼 진단은 여러 가지지만, 눈앞의 현실은 명백하다. 진작 문 닫아야 했을 부실 설비들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고 여기서 밀려 나온 막대한 잉여 물량이 헐값으로 국경을 넘어 글로벌시장을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아시아 열연강판 가격은 한때 톤당 500달러 안팎까지 떨어져 5년 만에 최저치를 맴돌았다. 우리 업계 역시 수입재 침투율이 30%대로 치솟았고, 주요 철강사의 영업이익률도 두 자릿수에서 2∼3%대로 주저앉았다. 이처럼 수익성이 무너지면 탈탄소 전환 여력도 줄어들기 마련이어서 전 세계 저탄소 철강 프로젝트의 약 5분의 1이 보류됐다.
과거에는 이 문제를 보호주의가 아니라 다자적 협력으로 풀려는 시도가 있었다. 2016년 G20 항저우 합의로 출범한 OECD 주관의 ‘글로벌 철강 과잉설비 포럼(GFSEC)’은 전 세계 철강 생산능력의 90%가량을 아우르며 잉여 설비를 감축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최대 생산국인 중국이 발을 빼고 인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뒤따르면서 동력은 식었고,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 각국의 일방적 빗장이었다. 미국은 「무역확장법」 제232조로 철강 관세를 최고 50%까지 올렸고, 캐나다는 FTA 체결국에까지 관세할당(TRQ)을 넓혔으며, 인도는 25%의 세이프가드를 부과했다. 멕시코 역시 비FTA국 철강 품목에 최고 35%의 관세를 영구화하는 등 도미노식 장벽을 쌓아 올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장 우려 섞인 시선을 받는 것이 바로 EU와 영국의 최근 행보다.
세이프가드 종료 다가오자 제28조 꺼내 든 EU · 영국…
보호하려던 산업 넘어 폭넓은 영향 미치는 보호무역
EU와 영국 모두 철강 보호조치의 출발점은 세이프가드였다. 세이프가드는 수입 급증으로 피해를 입은 국내 산업에 한시적으로 숨 쉴 틈을 주는 비상 처방이다. WTO 규정상 그 기간은 최대 8년으로 제한되며 보호를 점진적으로 낮추는 일몰 처방이 제도의 약속이다. 세이프가드 기간 동안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키우고 기한이 도래하면 보호를 거둬 시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것이 확립된 글로벌 규범이기 때문에 미국의 관세 폭탄에 대응해 2018년 세이프가드를 도입했던 EU는 올해 7월이 되기 전에 이 조치를 졸업해야 했다.
그러나 EU가 택한 길은 졸업이 아니었다. 보호 기간이 끝나는 시점에도 자국 산업에는 여전히 보호가 필요하다며 GATT 제28조를 들고 나왔다. EU는 무관세 쿼터를 약 47% 줄이고 초과분 관세를 50%로 올리는 방안을 발표하며 WTO에 양허 변경 협상 의사를 통보했고, 곧이어 영국 역시 철강 품목 전반의 포괄적 관세 인상을 위해 제28조 협상에 가세했다. 한시적이어야 할 비상 처방이 만료 시점에 GATT 제28조로 항구적 장벽을 세우면서 비상조치의 항구화 시도라는 지적이 많다.
EU와 영국이 규범 합치를 주장하며 근거로 든 GATT 제28조는 일정 요건 아래 기존 양허 변경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되,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통해 전반적인 양허 수준을 종전처럼 유지하도록 하는 재협상 절차다. 다자무역체제의 주춧돌이 관세 양허(제2조)라면, 제28조는 무역 개방의 결과로 국내 정치적·경제적 압력이 심각할 때 그 충격을 제도의 틀 안에서 분출하도록 돕고, 다자무역 질서로부터의 극단적인 이탈을 막아주는 일종의 ‘안전밸브’인 셈이다. 그렇기에 이를 통한 양허 수정은 극히 예외적인 기술적 조정이나 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민감 품목 보호에 제한적으로 사용돼 왔다.
제28조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보상 협상이 합의에 이르지 않더라도 수정국이 자국의 양허 변경을 강행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 경우 상대국은 동등한 수준의 보복관세로 맞설 수 있는데, 그 보복의 효과는 WTO의 근간인 최혜국대우(MFN) 원칙에 따라 분쟁과 무관한 회원국에도 무차별적으로 미칠 수 있다. 1962년 유럽의 냉동닭 관세 인상에 미국이 소형 트럭 보복관세로 맞선, 이른바 ‘치킨 전쟁’이 그 단적인 예다. 미국의 트럭 관세는 분쟁 상대였던 유럽뿐 아니라 아무 관련이 없던 한국과 일본 등 여타 회원국에 적용돼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다.
이는 아무리 합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한번 올린 보호무역의 빗장을 거두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일러준다. WTO 사무국에 따르면, WTO 출범 이후 지난 30년간 제28조 협상은 겨우 58건에 불과했다고 한다. 회원국들이 이 조항을 남용했을 때 발생할 다자무역 질서의 혼란을 고려해 그간 이 카드를 꺼내 드는 데 신중을 기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규정이 길을 열어뒀다고 해서 반드시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관세 장벽의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목도해 왔다. 2018년 미국이 「무역확장법」 제232조로 철강 관세를 부과했을 당시, 연방준비제도(Fed) 경제학자들의 분석은 당혹감을 안겨줬다. 관세 덕에 철강 생산 부문에서 늘어난 일자리는 겨우 1천여 개에 불과했던 반면, 철강을 원료로 사용하는 전방 제조업에서는 무려 7만5천 개의 일자리가 증발했던 것이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당시 제232조 조치로 지켜낸 일자리 하나당 약 65만 달러의 혹독한 사회적 비용이 치러졌다고 추산했다. 과거 대공황을 심화하고 세계 무역을 60% 이상 무너뜨린 이른바 ‘스무트–홀리 관세법’의 비극이 보여주듯 보호무역의 빗장은 언제나 보호하려던 산업보다 더 넓은 경제 생태계와 소비자에게 혹독한 부메랑이 돼 돌아오곤 했다.
글로벌 각국이 도미노식 장벽 쌓을 우려 커져…
한국, WTO에 집단적 자제 호소문 제출해 지지 받아
더 큰 문제는 글로벌 무역의 중추 역할을 해온 거대 경제권의 이러한 선택이 다자무역체제의 위기를 심화하는 ‘깨진 유리창’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무역규범을 선도해 온 이들이 GATT 제28조를 도구화하기 시작하면, 시장 잠재력이 크고 보호주의 유인이 강한 신흥국과 개도국 역시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없다’며 도미노식 장벽을 쌓아 올릴 우려가 적지 않다. 이미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한 GATT 제21조 안보예외, 환경을 내세운 제20조 일반예외 등 본래 좁게 열려 있어야 할 예외의 문들이 저마다 자국 산업정책의 통로로 동원되고 있다. 여기에 항구적 관세 인상이라는 제28조 카드마저 적극적으로 합류한다면, 지난 수십 년간 자유무역을 떠받쳐 온 다자무역체제는 빠르게 헐거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한국은 지난 5월 초 WTO 일반이사회에 ‘개방적이고 예측 가능한 무역 정신의 보존’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제출하고 집단적 자제를 호소했다. 구조적 공급과잉이라는 난제를 일방적인 관세 장벽으로 해결하려 드는 흐름은 결국 보복의 악순환을 낳고 규범 기반의 체제를 약화시킬 뿐이라는 경고였다. 관세가 아닌 근본 원인 해소와 투명성 제고에 무게를 두자는 한국의 제안에 선진국과 개도국을 막론한 수많은 회원국의 지지가 이어졌다. 거대 경제권의 이번 시험이 다자체제에 드리울 그늘을 국제사회가 얼마나 깊이 우려하고 있는지를 확인한, 다자무대의 의미 있는 이정표였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다자무역체제의 설계자로 알려진 코델 헐(Cordell Hull)은 일찍이 교역의 장벽을 낮추고 국가 간 상거래를 넓혀 간다면 전쟁마저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역을 단순한 경제적 거래 행위가 아니라 평화와 신뢰를 쌓는 길로 본 것이다. 개방으로 신뢰를 닦으려던 그의 통찰처럼 제28조라는 새로운 도전 역시 회원국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모색할 때 비로소 풀릴 것이다. 당장의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다자적 지혜를 모으는 이 실천이야말로 앞으로 다자무역체제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개혁의 모습일 것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연대의 힘을 발휘해 온 다자체제의 저력을 다시 한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