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필자는 에너지 공급업체로부터 연간 에너지 비용 정산서를 받았다. 지난해부터 집에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 낮 동안 생산된 전기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됐지만 온수와 난방은 가스보일러에 의존하는 건물이라 연간 요금의 80%가 천연가스 사용료였다.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면 ‘지금 생산된 전기를 저장해서 밤에 사용하면 좋을 텐데’, ‘보일러가 전기보일러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 청구서를 보니 아쉬움이 더 커졌다. 이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크게 오른 가스 요금이 부담스러운 차에 중동 지역의 불안한 뉴스가 들려올 때면 이 상황이 에너지 요금 고지서에 또 어떻게 반영될지 걱정하게 된다.
‘전기화’는 30년 에너지정책의 결과물…
실행계획 발표, 국제 이니셔티브 출범 등 적극 추진 중
최근 EU의 전기화 추진 행보는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7월 17일 EU 집행위는 ‘전기화 실행계획(Electrification Action Plan)’을 발표하고 2040년까지 유럽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의 46%를 전기로 공급한다는 목표와 이를 위한 세부 전략을 제시했다. 지난 6월 26일에는 에너지 저장 설비 확대를 위해 공공 부문(회원국 정부, 금융기관, 국제기구), 재생에너지 개발 및 에너지 저장 기업, 에너지 다소비 산업이 함께하는 유럽 최초의 삼자협약을 체결했다. 지난해 말 EU 집행위가 유럽의 에너지 인프라를 현대화하고 확대하기 위해 제시한 ‘유럽 전력망 패키지(European Grids Package) 법안’에 대해서는 입법기관의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또한 지난 6월 23일에는 런던 기후행동주간 중에 ‘전기화, 지금(Electrify Now)’이라는 글로벌 이니셔티브 출범에 앞장서는 등 전기화를 위한 국제 협력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전기화는 올해 11월 개최 예정인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1) 공동의장국인 호주와 튀르키예가 글로벌 기후행동 의제 출범의 일환으로 발표한 목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전기화 속도를 높여 전 세계 최종 에너지 수요 중 전기가 차지하는 비율을 현재의 20% 수준에서 2035년까지 35%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청정에너지 확대, 전력망 현대화와 에너지 저장 역량 강화가 앞으로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보이며, EU는 최근 발표한 전기화 계획과 법안, 국제 이니셔티브 등으로 국제적인 청정 전기화 연대를 구축하고 기후 리더십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화는 유럽에서 갑자기 떠오른 정책이 아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에너지정책 진화의 결과물이다. 2000년대 초에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교토의정서 이행과 지속 가능 발전을 위한 핵심 과제였다. 2001년 「재생에너지 전력 촉진 지침(Directive 2001/77/EC)」, 2007년 ‘재생에너지 로드맵(Renewable Energy Road Map)’, 2009년 「EU 재생에너지 지침(Directive 2009/28/EC, RED I)」 모두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해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화석연료 의존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으며 전력의 탈탄소화가 정책의 중심에 있었다.
화석연료 대신 전기 사용을 늘려야 한다는 전기화 방향은 EU 집행위가 2011년에 발표한 ‘에너지 로드맵 2050(Energy Roadmap 2050)’에서 제시됐다.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1990년 수준 대비 80~95% 감축하기 위해 에너지 부문의 다양한 탈탄소화 시나리오를 분석했는데, 모든 시나리오에서 최종 에너지 수요 중 전력 비중이 36~39%로 증가해야 하고 특히 수송과 냉난방에서 전력 사용 증가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후 2015년 ‘에너지 연합 전략(A Framework Strategy for a Resilient Energy Union with a Forward-Looking Climate Change Policy)’과 2016년 ‘청정에너지 패키지(Clean Energy for All Europeans)’는 재생에너지 확대, 전력시장 개혁, 에너지 저장, 소비자 참여 등 전기화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고, 2018년 ‘모두를 위한 청정한 지구 장기 전략(A Clean Planet for all)’과 2019년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은 기후중립을 위해 청정 전력이 수송·건물·산업 부문에서 화석연료를 대체해야 한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산업 경쟁력 강화 위해 적정가격 에너지 접근성 확대하고
회원국 세제 혜택 제공 등 전환 비용 부담 완화할 예정
2006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가스 분쟁 이후 EU는 에너지 공급 안보를 강조했지만 값싼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의존을 줄이지는 못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안보 위협을 크게 느낀 EU는 유럽 에너지 시스템의 구조적 전환을 위해 ‘REPowerEU’라는 계획을 발표하고 에너지를 덜 쓰고(Save), 공급원을 분산하고(Diversify), 청정에너지 전환을 더 촉진하기(Accelerate) 위한 목표와 조치를 제시했다. 2025년 ‘청정산업계획(Clean Industrial Deal)’은 산업 경쟁력 강화를 전면에 내세워 높은 가스가격과 전력가격, 화석연료 수입 의존으로 유럽의 산업이 경쟁력을 잃고 있다면서 적정가격 에너지 접근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함께 발표한 ‘적정가격 에너지 실행계획(Affordable Energy Action Plan)’을 통해 산업계 전기화 가속화를 핵심 전략으로 제시했다. 또한 지난 4월 ‘EU 에너지 긴급조치(Accelerate EU)’에서도 화석연료를 대체할 자체 생산 청정에너지 전환 가속화와 전력망 구축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EU는 그간의 지속적인 에너지 전환 노력으로 전력의 약 70%를 원자력을 포함해 역내에서 생산한 청정 전원으로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최종 에너지 소비에서 전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23%에 머물러 있다. 화석연료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니 호르무즈 해협 폐쇄 이후 에너지 확보에 500억 유로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고, 유럽 자체 생산 에너지를 늘리고 이를 활용하는 것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다. 이에 EU 집행위는 전기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해소해 2040년 전기화율 46%를 달성하기 위해 ‘전기화 실행계획’을 발표했으며, 회원국에 기존 EU 법령을 충실히 이행해 청정에너지 설비를 신속히 확대하고 전기화 유인을 제공할 수 있는 에너지 요금 및 과세 체계를 마련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연말까지 화석연료 보조금의 단계적 폐지 조치도 제안할 계획이다.
전력망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양방향 충전(V2G; Vehicle-to-Grid) 등의 기술을 시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규제 샌드박스와 리빙랩(living lab) 활용 방안을 제시하고, 에너지 저장에 관한 삼자협약을 통해 2030년까지 200GW의 에너지 저장 용량 확보를 추진한다. 히트펌프 보급 확대와 전기차 확산도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초기 비용이 전환의 장벽이 되지 않게 회원국이 세제 혜택이나 사회적 리스 제도 등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EU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 브라질, 호주, 튀르키예, 에티오피아, 캐나다, 필리핀, 영국, 국제에너지기구(IEA),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 그리고 기업 및 금융기관과 함께 지난 6월 출범시킨 글로벌 이니셔티브 ‘전기화, 지금’을 통해 전기화를 글로벌 의제로 확산하려 한다. ‘전기화, 지금’은 기술·정책 공유와 투자 협력을 바탕으로 세계 전기화와 청정기술시장 확대를 추진한다는 구상도 제시했다.
재생에너지 발전 확대 → 에너지 소비 전기화 정책으로…
주체의 합리적 선택이 전기화에 기여하는 경제구조 조성
EU에서 온실가스 감축과 환경보호를 위해 시작한 에너지 전환은 이제 전기화를 중심으로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아우르는 정책으로 진화했다. EU 집행위는 전기화 실행계획을 발표하며 전기화 속도를 올려 가치사슬 전반의 경쟁력을 높이고, 화석연료 수입을 줄여 에너지 안보를 강화해 에너지 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온실가스 배출과 대기오염을 줄여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보호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였다. 이를 두고 ‘기후변화 대응이 후순위로 밀려난 것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기후변화 대응을 뒷받침하는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확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 확대에서 최종 에너지 소비의 전기화로 정책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전기화에 이해관계를 갖는 주체와 참여 동기가 다양해졌다. 기후환경 정책 관계자만이 아닌 에너지 다소비 산업, 청정에너지 생산자, 전력망 운영자, 금융투자기관, 자동차와 냉난방 설비를 이용하는 일반 소비자까지 모두 전기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실제 전환에 참여하는 주체다. 이들이 전기화에 동참하는 이유는 서로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서, 누군가는 에너지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는 러시아산 가스를 비롯한 수입 화석연료의 공급 불확실성에서 벗어나거나 청정에너지 기술의 세계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서 전기화를 추진할 것이다. 각자 추구하는 목표는 다를 수 있지만 전기화라는 전략 아래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의미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전기화 실행계획이 전기화의 가속화를 위한 다양한 과제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러한 과제들이 결코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재생에너지 확대, 전력망 투자, 에너지 저장, 최종 에너지 소비의 전기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됐다. 이를 추진하는 정치적 동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각 주체의 합리적인 선택이 전기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 2026년 EU의 에너지 전환정책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기화, 지금’ 이니셔티브는 이러한 정책 연대를 국제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유럽은 물론 전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에너지 공급 위기가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제공해 청정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전기화를 구심점으로 형성하고자 하는 유럽의 연대와 글로벌 협력이 실제 정책과 투자, 시장의 변화로 이어져 청정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고 탄소중립으로 나아가는 강력한 추진력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