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상반기의 마지막 날, 홍콩 소재 르네상스 하버뷰 호텔에서 주홍콩총영사관 주최로 ‘한국경제 콘퍼런스: 글로벌 IB가 보는 하반기 한국 거시경제 및 자본시장’ 행사가 개최됐다. HSBC, 크레디 아그리콜, 골드만삭스, JP모건, 씨티, 노무라 등 유수의 글로벌 투자은행(IB)의 한국 담당 이코노미스트, 애널리스트, 포트폴리오 매니저들이 참석해 한국의 하반기 거시경제 흐름과 자본시장 전망, 주요 대외 리스크 요인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특히 눈길을 끈 대목은 AI 전환이라는 거대한 파도 위의 대만, 중국 등 아시아 역내 국가들과의 경쟁·보완 구도 속에서 한국경제를 진단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채텀하우스 룰을 적용해 발언자는 공개하지 않고 주요 글로벌 IB가 보는 한국경제 현황 평가와 향후 전망을 소개하고자 한다.
올해 한국경제, 반도체 호황 속 ‘K자형 성장’ 전망…
AI 수요 확대 등으로 2016년 이후 삼성전자 우위 뒤집혀
이번 콘퍼런스에 참여한 글로벌 IB 6개사의 2026년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 범위는 2.4∼3.7% 사이였고, 시장에서 별도 집계한 지난 6월 말 기준 주요 IB 8개 기관의 평균치는 3.0%였다. 이는 2025년 한국의 실질 GDP 성장률(1.0%) 대비 대폭 상승한 기댓값으로, 전문가들은 반도체·ICT 수출 호조에 힘입은 결과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지난 5월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169.4% 증가했고(총수출 증가율 53.2%), 6월 반도체 수출은 199.5% 증가하며(총수출 증가율 70.9%) 매달 역대 최고 수출액과 증가율을 경신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핵심 반도체 기업들의 경우 반도체 공급 방식을 기존의 1년 단위 단기 계약에서 3∼5년 단위 장기 계약으로 전환하면서 전통적인 반도체 가격 사이클이 크게 완화돼 적어도 2027년까지는 안정적인 고마진 수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다만 글로벌 IB 참석자들은 이 호황이 반도체·ICT 섹터에 편중된 ‘K자형 성장’이라는 점을 우려했다. 반도체 설비 투자액의 약 70%가 해외 장비 수입으로 빠져나가다 보니 국내 파급효과가 제한적이고, 주가 상승에 따른 ‘부의 효과(wealth effect)’ 역시 실제 소비로 전환되는 비율이 2% 남짓에 그친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자영업자와 최저임금 근로자 등 전체 경제인구의 상당 부분은 이 호황의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다만 이러한 이중 성장 구조는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AI 시대로의 급속한 전환 과정에서 미국을 포함한 여러 주요국에서도 유사한 양극화가 관찰되며, 이와 관련해 각국 정부는 재정이라는 정책 수단을 통해 성장의 온기를 주변 섹터로 확산시키는 적극적 대응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번 콘퍼런스의 중요한 주제 발표 중 하나는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산업 비교’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중심의 수직 통합형 순수 제조업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고, 대만은 TSMC를 주축으로 다수 업체가 분업하는 수평 통합형 파운드리 기반의 서비스업에 가까운 제조업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2015년까지는 스마트폰·PC·D램 수요를 선점한 삼성전자가 반도체 경쟁력에서 글로벌시장의 우위를 지켰으나 2016년 이후 엔비디아 GPU, AI 사이클 등 AI 수요 확대의 수혜가 TSMC 중심의 공급망으로 집중되며 구조적 우위가 역전됐다는 분석도 있었다. 이런 흐름은 국제분석기관의 전망과도 연결되는데, IMF는 지난 4월 발표한 「세계경제 전망」에서 지난해 한국을 추월한 대만의 1인당 GDP가 더 빠르게 상승해 2031년에는 한국·대만 간 1인당 GDP 격차가 1만 달러 이상 벌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지난해 TSMC의 글로벌 파운드리시장 점유율이 70%를 넘어 삼성전자(약 7%)와의 격차가 60%포인트 넘게 벌어졌다. 이는 대만 정부가 일찍이 반도체를 국가 안보 문제로 인식해 2023년부터 일정 조건을 갖춘 첨단기술 기업을 대상으로 연구개발(R&D) 투자의 25%, 설비투자의 5%에 세액공제를 적용하는 등 경쟁국보다 한발 앞서 반도체산업 지원에 나선 결과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하지만 메모리 분야에서는 여전히 한국이 압도적 지위를 보유하고 있고 당분간 그 경쟁우위가 유지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고대역폭메모리(HBM)시장에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세계 공급량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AI 시스템 내에서 메모리가 갖는 가치의 비중도 2027년 70%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즉 파운드리(대만)와 메모리(한국)는 경쟁의 측면도 있으나 거시적으로는 AI 공급망을 함께 지탱하는 상호보완적 구조의 측면도 상당하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제기됐다.
또한 한국과 대만 모두 GDP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편으로 부가가치 기준 10%대 중후반 수준으로 평가되지만, 한국은 호황기-불황기 간 업계 실적의 진폭이 큰 편이고 대만은 상대적으로 완만하고 안정적인 성장 구조를 보인다는 차이점도 있었다. 한편 주요 8개 IB가 내놓은 올해 각국의 GDP 평균치는 대만 10.1%, 한국 3.0%로 AI산업의 경제 성장 기여도 면에서는 비교적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중국 반도체 굴기와 지정학적 리스크는 과제…
아시아 역내 AI 역량 평가에서 한국은 생산·활용 3위
일부 전문가는 미중 갈등과 같은 지정학적 요인이 한국 반도체산업에 ‘기회와 위기’의 이중적 영향을 준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이 배제되는 흐름 속에 한국·대만·일본·싱가포르·말레이시아의 역할이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고, 특히 D램 등 메모리 분야에서 한국의 지위는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산 제품의 미국시장 진입 제한은 한국산 반도체·자동차 등 품목에서 반사이익을 가질 기회를 의미하며, 글로벌 지정학적 갈등의 확대는 역설적으로 한국산 방위산업 품목의 동유럽, 중동 등지로의 수출 확대 등으로 이어져 부수적 기회를 주고 있다는 평가도 제시됐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 또한 예의주시해야 할 변수로 지적됐다. 최근 CXMT(D램), YMTC(낸드플래시) 등 중국 메모리 업체들이 생산 능력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중국 반도체산업은 ASML의 최첨단 EUV 장비 도입이 차단된 상황에서도 일부 일본산 장비업체와의 협업 모색, 자체 리소그래피 장비 개발 등 자립 노력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현재는 원가 구조상 한국의 경쟁력이 중국의 약 3배 수준으로 평가되지만, 중국 업체들의 높은 마진율(보조금 포함 영업이익률 약 70%)이 대규모 재투자 자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향후 업계의 판도를 바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관한 논의에서는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경제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에 한국은 두 진영 사이에서 실리적 경제외교를 추구해 우호적 통상·투자 관계를 동시에 유지해야 한다는 정책 제안이 있었다. 이와 함께 어느 한 진영의 기술 생태계에 종속될 경우 장기적으로 대외 협상력이 크게 소실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한편 아시아 역내 AI 생산 및 비즈니스 활용 역량 평가에서 중국과 한국의 선도적 위상이 부각됐다. 한국·중국·대만·일본·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을 대상으로 한 이 평가에서 중국은 생산·활용 모두 2위로 글로벌 AI 생태계 ‘2강’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음을 재확인했고, 한국은 생산·활용 모두 3위로 생산과 비즈니스 활용을 균형있게 잘하는 국가로 평가되며 중국과 함께 아시아 최상위 그룹으로 평가됐다. 대만은 AI 인프라 생산(1위)에는 특화돼 있으나 비즈니스 활용 측면(5위)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본시장 선진화 긍정적이나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여전,
생산적 금융으로의 ‘머니무브’는 구조적 변화 동반돼야
한국의 자본시장 선진화 정책과 그간의 한국 정부의 노력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배당소득 분리과세의 3년 한시 운영, 법령 해석의 사안별 비일관성 등은 외국인 투자자의 장기 투자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됐고, 스튜어드십 코드와 관련해 국민연금(NPS)의 적극적인 역할도 요청됐다. MSCI 선진지수 편입은 ‘목표’가 아니라 외환시장 자유화, 공시 투명성, 결제 인프라 개선이라는 제도 개혁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올 7월 원화 외환시장 개방을 시작으로 2027년 6월 MSCI 선진지수 관찰 대상국 등재, 2028∼2029년 MSCI 선진지수 최종 편입이라는 현실적 타임라인 시나리오를 제시한 전문가도 있었다.
한편 한국 증시에서 상장사의 이익 증가 속도만큼 주가에 프리미엄이 부여되지 않고 있으므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 밖에도 최근 10년을 기준으로 대만 가권지수(TAIEX)가 한국 코스피 대비 우수한 성과를 보였으나, 2025년 4분기 이후 한국 증시가 이를 추격하는 흐름을 보이는 등 양 증시 간 성과 격차는 빠르게 축소되고 있다는 의견도 소개됐다.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포함한 상업용 부동산시장에서 한국은 세계 최저 수준의 오피스 공실률을 보이며 연간 약 40조 원에 가까운 시장이 형성됐지만, 데이터센터 투자는 대기업 주도로 추진되고 있고 해외처럼 기관투자자 주도 구조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로 평가됐다. 해외 기관투자자의 AI 데이터센터 투자는 보통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코로케이션(colocation; 데이터센터 공간과 전력·냉각 시설을 임대해 자사 서버를 운영하는 방식) 진입, 기관투자자와의 파트너십, 직접 토지 매입·개발이라는 3단계를 거치는데, 한국은 아직 1∼2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전력·냉각 인프라의 선제적 확보가 핵심 병목으로 지목됐다.
부동산 중심의 가계 자산 구조가 주식, 채권 등 생산적 금융활동으로 전환되는 ‘머니무브’와 관련해 한국은 아직 이 현상이 본격화됐다고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 주된 배경 중 하나로 한국 반도체 분야 핵심 기업의 주식을 담보로 한 대출 금리가 아파트 담보대출 금리보다 훨씬 높아 주식 자산의 담보 가치가 구조적으로 열위에 있다는 점이 제시됐다. 미국도 1998년에야 가계 주식 자산 비중이 부동산을 넘어섰다는 사례가 소개됐으며, 머니무브는 정책 한두 개로 단기에 달성하기 어렵고 기업·금융 시스템과 같은 보다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수년 단위의 복합적인 과정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번 한국경제 콘퍼런스에서 나온 메시지를 종합하면, 한국경제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수혜를 가장 크게 누리는 국가이면서도 대만이라는 파운드리 최강자, 중국이라는 메모리 추격자 사이에서 전략적 공간을 지속적으로 넓혀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대만이 반도체를 안보 자산화해 국가 차원의 생태계를 구축한 것처럼 한국도 초격차 유지를 위한 산업정책의 정교화, 추가 세수를 활용한 K자형 성장 격차 완화, 그리고 미중 사이에서의 실리적 경제외교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풀어가야 하는 국면에 서 있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는 반도체 초격차 유지, 피지컬 AI 및 AI 데이터센터 등 신산업 육성이라는 중장기 과제를 민관 협력으로 풀어가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시아 반도체 삼국지의 향배가 걸린 지금이야말로 이 국가적 프로젝트의 실행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