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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괄타결원칙의 덫에 걸린 WTO 무역원활화 협정
이승우 주제네바대표부 공사참사관 2014년 08월호

[WTO 이슈]

 

요즘 호베르토 아제베도 WTO 사무총장이 무역원활화 협정의 이행에 대한 회원국 간 극심한 분열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난해 WTO 수장으로 취임한 첫 해 본인의 최대 치적으로 자부했던 발리 패키지가 성공이냐 실패냐의 중대 기로에 선 것이다. 무역원활화 협정(Trade Facilitation Agreement)을 WTO 법률체계 안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의정서 채택 마감시한이 7월 31일이다.

 

지난해 12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무역원활화 협정이 타결됐을 때만 해도 이 협정은 모든 회원국들로부터 세계 무역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진전 중 하나라고 환영받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행준비과정에서 일부 회원국들이 전체 DDA 협상타결을 전제로 이 협정은 잠정발효의 원칙하에서 이행돼야 한다는 ‘일괄타결원칙(Single Undertaking)’(필자 주; 2001년 도하 선언 제47항에서 DDA 협상은 동시에 시작해서 모든 협상을 동시에 종료한다는 원칙을 밝힌 것으로 어느 일방에 유리한 협상만을 취사선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도입됨.)을 주장하면서 무역원활화 협정 발효를 위한 노력이 막판에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아프리카 연합의 ‘일괄타결원칙’에 최빈국들 지지 보내


에스테반 코네호스(Esteban Conejos) 무역원활화 협정 이행준비위원회(PCTF; Preparation Committee on Trade Facilitation) 의장은 지난 7월 10일 임시회의를 열어 회원국들의 유연하고 열린 자세가 7월 24~25일로 예정된 WTO 일반이사회에서 개정의정서가 채택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의정서 문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고 합의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무역원활화 협정의 잠정이행(provisional application)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 4월 브뤼셀에서 개최된 아프리카 연합(Africa Union) 통상장관회의에서 TF 협정 이행은 2001년 도하 선언 제47항에 따라 “잠정적으로 이행돼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급기야 지난 5월 제네바에서 아프리카 연합의 조정국인 레소토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제안서를 WTO에 제출하면서 도하 선언 제47항 ‘잠정이행’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 불을 당겼다. 당시 아프리카 연합은 TF 협정은 남은 DDA 협상과의 균형을 위해 일단 전체 DDA 협상을 종료한 후에 재검토돼야 한다는 점을 적시했다. 이것이 ‘일괄타결’이라는 WTO 원칙에 부합하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주장은 우리를 비롯한 많은 회원국들로부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며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논의 자체가 발리 제9차 각료회의 결정을 무력화시키고 올해 말 예정된 포스트 발리 워크프로그램 마련이라는 발리 패키지 일정 전체를 송두리째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발리 패키지의 전제는 제8차 WTO 각료회의에서 현실적으로 DDA 모든 협상이 동시에 종료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DDA의 완전타결 이전이라도 조기합의가 가능한 분야의 협상을 진행한다는 약속, 즉 조기수확(Early Harvest)의 정신에 근간을 두고 진행한 협상이다. 따라서 협상이 다 끝난 현시점에서 일괄타결원칙을 다시 들고 나온다는 것은 협정의 파국은 물론 그 후속작업인 포스트 발리 워크프로그램도 계획대로 진행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남미와 아시아 지역 여러 최저개발국(LDC; Least-Developed Country)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으며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들에겐 일괄타결원칙을 볼모로 무역원활화 협정상에 보장된 이행능력 배양을 위한 각종 지원을 확실히 챙길 수 있다면 결코 손해나는 장사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지도 모른다.


WTO 수장인 호베르토 아제베도를 비롯해 많은 선진국들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슈가 공론화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칫 이런 논의를 조기에 차단하지 못한다면 무역원활화 협정은 물론 남은 DDA 협상을 끌고나갈 추동력이 사라지고 향후 WTO 차원의 어떠한 다자간 협상도 시도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질 것은 자명했다. 그렇다면 왜 LDC 그룹은 무역원활화 협정의 WTO 협정 편입에 반기를 들고 잠정이행이란 카드까지 내밀며 협정의 발효를 늦추려고 하는 것일까?

 

첫째, 협정 이행능력 확보에 필요한 지원에 대한 선진국의 확실한 보장 없이는 링 안에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선진국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틈만 나면 “아프리카 국가들이 협정이행에 필요한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역량배양을 위한 기술적·재정적 지원이 TF 협정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예측 가능한 방법으로 제공돼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기존의 ‘무역을 위한 원조(Aid For Trade)’나 ‘강화된 통합체제(EIF; Enhanced Integration Framework)’ 등의 자금을 협정상의 역량배량 지원프로그램으로 적당히 포장하려 해서는 안 되며 TF 협정이행 지원을 위한 별도의 기금이나 프로그램을 만들어 선진국의 확고한 지원 의지와 구체적 계획을 명확히 제시해 달라는 요청일 것이다.


둘째, 발리 패키지 이행을 위한 후속조치 논의 과정에서 선진국의 이해가 큰 무역원활화 협정 논의에만 초점을 두고 다른 합의사항은 전혀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발 심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발리 패키지 내 다른 농업 이슈나 무관세·무쿼터(DFQF; Duty Free, Quota Free) 시장접근, LDC 특혜 원산지 부여 및 LDC 서비스 웨이버 등 LDC 관련 이슈에 대한 실질적 진전 없이 무역원활화 협정만의 수확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무역원활화 협정이 개도국의 이익보다는 개도국 시장개방을 촉진하는 ‘통관 고속도로’ 역할을 할 것이라며 애초부터 TF 협정에 반대해온 국가들에는 ‘이익의 균형’ 상실이란 반대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셋째, 지난 12월 식량안보 목적의 공공비축을 볼모로 전체 발리 패키지 타결을 끝까지 거부하다 극적으로 합의에 응했던 인도가 또다시 TF 협정의정서 채택에 반대하고 나섰다. 지난번 발리 패키지 타결 이후 논의의 진전을 기대했던 식량안보 분야에서 자국의 우려가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TF 협정의 이행에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LDC 국가들이 ‘TF 이행 지원의 확실성 보장’이라는 집단적 요구를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인도의 경우 자국의 주요 관심사인 농업 분야의 이해 관철을 위한 전략적 보이콧 측면에서 문제 해결을 힘들게 하고 있다. 결국 현재 개도국과 LDC 그룹들의 TF 협정 잠정이행 요구는 향후 전개될 DDA 협상에서 다양한 LDC 이슈나 개별 국가의 이해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을까라는 우려에서 빚어진 결과라는 점에서 그 해법도 고도의 복잡성과 정치적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주요국, 당근과 채찍 병행 … 개도국ㆍ선진국에 윈윈 게임 돼야


그간 주요 선진국들은 LDC 국가들에 협정 이행능력 지원에 대한 확신과 예측 가능성을 심어주고 그들에게 제공할 명확한 청사진을 마련하는 한편, 미국의 경우 미 의회가 2015년 종료되는 ‘아프리카성장기회법(AGOA; African Growth and Opportunity Act)’의 연장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압박의 수위를 높이는 등 당근과 채찍 전략을 병행해 왔다. 세계은행, UNCTAD, IMF 등 국제기구와의 공조를 통해 무역원활화 협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무역원활화 협정이 개도국과 선진국 모두에 이득이 되는 윈윈 게임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제베도 WTO 사무총장도 미국, 일본, 한국 등 주요 정상들과의 면담, OECD 각료회의, APEC 통상장관회담 등을 통해 발리 패키지가 다자통상체제의 존립에 미치는 함의를 강조하며 주요국의 리더십을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전방위적 노력의 결과인지 지난 6월 적도기니에서 개최된 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발리 합의는 DDA 협상타결의 중요한 디딤돌이며 TF 협정은 발리 결정에 따라 이행돼야 한다.”며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TF 협정의 쟁점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갔던 인도도 7월 호주 G20 통상장관 회의를 앞두고 언론에 TF 협정 채택을 식량안보 이슈와 연계하지 않겠다는 완화된 입장을 흘리고 있다. TF 협정의정서 채택 마감시한을 앞두고 긍정적 신호들이 감지되고 있는 것은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지난했던 협상과정을 되돌아볼 때, 상황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 다자간 협상은 늘 그렇듯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이며 어느 일방이 100%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을 수도 없다. 모두가 조금씩 불만족스러워야 협상은 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여름이 지나고 나면 발리 패키지의 성패는 물론 향후 WTO 권능과 역할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다. 회원국들이 솔로몬의 지혜로 ‘일괄타결원칙’의 덫에 걸린 무역원활화 협정을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포스트 발리 워크프로그램 논의에 나설지 아니면 방기곡경(旁岐曲逕)의 악수로 무역원활화 협정은 물론 WTO 전체를 정도가 아닌 샛길과 굽은 길로 밀어 넣고 또 다른 10년을 기약할 것인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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