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이슈] EU 농업의 활로인 품질과 이를 보증하는 표시제
전체 농업인의 3분의 1이 65세 이상이고 35세 미만은 6%에 불과하다. 농가당 경지규모가 미국 농가규모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농가소득 수준은 일반 가구소득의 60% 수준이다. 마치 우리나라 농업의 모습처럼 다가오지만 사실 EU 농가의 모습이다. 이러한 EU 농업이 2013년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출실적을 달성했다. 과연 무엇이 EU 농식품의 수출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는가? 한중 FTA 협상, 쌀 관세화 논의로 어려움에 처한 국내 농업계가 EU 농식품정책의 경쟁력을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를 찾고자 한다.
EU 28개 회원국은 지난 2013년 1,200억유로(한화 170조원 상당)의 농식품을 수출함으로써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농식품 수출국(경제권)으로 부상했다. 이로써 EU는 단일 경제권으로 세계 최대 농식품 수입국(1,015억유로)인 동시에 최대 수출국의 지위에 서게 됐다.
수출금액은 2012년에 비해 5.8%의 성장을 기록했다. 개도국이나 이머징 마켓에 대한 곡물수출이 견인차 역할을 했는데 특히 중국시장에 대한 수출금액이 상당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EU의 농식품 무역은 2010년 이래 흑자를 유지하고 있고 매년 흑자폭이 증가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13년에는 186억유로의 흑자를 기록했다. EU 경제권 전체 수출금액에서 농식품 수출금액이 약 9%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계류·화학·의약품에 이어 농식품이 네 번째로 큰 수출 분야에 해당한다. 주요 수출품목은 위스키·포도주·제과류·파스타·밀 등이다.
그렇다면 북남미, 호주 등 대규모 농업을 하는 국가를 제치고 EU 경제권이 최대 규모의 농식품을 수출하게 된 동력은 무엇인가? 노동과 투입재(비료·농약·에너지 등) 비용이 높은 구조로 가격경쟁력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는데 이를 만회하는 것은 EU 농식품의 품질경쟁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각종 표시제일 것이다. EU는 자국 농식품의 품질을 차별화시키는 표시제를 매우 중시하고 있는데, 사례를 한번 들여다보자.
경쟁력의 열쇠는 ‘품질’ … 품질관리는 다양한 ‘표시제’로
EU와 미국 간에 진행되는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협상은 2011년 말부터 양측 간 사전작업이 시작됐고 현재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 중이다. 양측 간 교역규모가 무려 4,550억유로에 달해 TTIP가 타결될 경우 세계경제에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러한 중대 협상을 가로막는 주요 이슈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바로 ‘지리적 표시제도(GI)’다. EU는 자국산 농식품에 대한 지리적 표시와 그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미국 측에 요구하고 있는데 미국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EU는 EU 농식품이 미국에 비해 가격경쟁력 측면에서 열세이기 때문에 그나마 GI를 통해 가격은 비싸지만 품질이 뛰어나고 안전한 식품이라는 이미지로 미국산 농식품 공세를 막고 미국시장으로의 수출도 확대해 나가겠다는 심산이다. 이러한 계산이 작용하기 때문에 EU로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상대국에 항상 GI 보호를 강하게 요청하고 있는 실정이다.
샤토마고, 샤토무통로쉴드, 로마네콩티 등 숱한 찬사가 붙어 있는 프랑스 와인을 지탱하는 것은 바로 원산지통제제도다. 프랑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의 명성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1935년 원산지통제제도인 AOC를 도입해 시행해 오고 있는데 와인의 생산지역, 포도품종, 양조방법, 포도재배방법 등을 엄격히 관리해 기준에 맞는 와인에만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AOC에 대해서 철저히 관리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이를 알리고 보호하는 데 적극적이다.
최근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에서 닷와인(.wine), 닷뱅(.vin)이라는 도메인 네임을 허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의 주요 와인생산국과 EU 집행위가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유럽의 와인명가들이 닷와인, 닷뱅이라는 새로운 도메인 네임에 우려를 표한다. 저급한 와인들이 고급 와인명을 도메인으로 선점해 고급 와인으로 행세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고유한 와인명이 인터넷상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될 경우 자칫 매출액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대상 확대, 로고 사용 의무화 등 지리적 표시제 강화 추세
EU 지역에 지리적 표시제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 포도주 분야가 시초다. 이것이 위스키 등 증류주나 일반 농식품 분야에 점차 확대 도입되고 있는 실정이며 EU 농식품의 품질경쟁력을 지탱하는 상징적이고 중요한 제도로 정착됐다. 지리적 표시제인 GI는 크게 원산지 명칭 보호(PDO; 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와 지리적 표시 보호(PGI; Pro- 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떤 명칭이 PDO로 인정받기 위해선 생산의 모든 단계가 그 지역에서 이뤄져야 하며 농식품의 특성이 본질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그 지역에 기원해야 한다. 어떤 명칭이 PGI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생산과정의 한 단계는 그 지역에서 이뤄져야 한다.
EU의 지리적 표시제 상품의 판매액은 543억유로(2010년 기준)이며, EU 식품·음료 시장의 5.7%를 차지하고 있다. 지리적 표시제 상품의 수출액은 115억유로를 기록했으며 EU 식품·음료 수출의 15%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지리적 표시제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가 있는데 지리적 표시제 상품이 비(非)지리적 표시제 상품에 비해 평균 2.23배 정도 가격이 비싸다. 그만큼 시장에서 고품질로 인식되고 있어 부가가치가 높다.
비교적 최근에 개정된 법(EU 1151/2012)에 따르면 EU는 농식품에 대한 지리적 표시를 계속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초콜릿, 가죽 등에까지 지리적 표시 대상을 확대했으며, EU산 지리적 표시제 상품은 PDO, PGI 로고 사용이 의무화된다. EU의 지리적 표시제는 미국의 상표권 등에 비해 권리가 특정 생산자 1인에 귀속되지 않고 기준에 맞춰 생산하는 모든 생산자에게 귀속된다는 특징이 있는데, 생산자 그룹에 해당 지리적 표시제를 적절히 모니터링할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지리적 표시제 신청에서 등록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실정이어서 절차를 신속히 진행하는 방향으로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산간지역 생산품’ 표시 도입하고 유기농 품질기준 높여
앞으로 EU 지역에서는 일정한 조건 아래 ‘산간지역 생산품(mountain product)’ 표시를 붙일 수 있게 된다. 이는 산간지역에서 생산된 농식품의 고부가가치를 인정하기 위한 제도로 회원국이 희망할 경우 선택적으로 도입할 수 있게 됐다. EU의 소위 ‘2012년 농식품 품질법(Quality Regulation)’에 각종 품질관련 표시제를 도입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는데 EU 집행위는 ‘산간지역 생산품’에 대한 기준을 이번에 최초로 마련했다(2014년 6월 14일).
‘2012년 농식품 품질법’에 따르면 ‘Mountain Product’ 표시를 하기 위해선 가축사료나 원료가 본질적으로 산간지역에서 유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번 EU 기준은 이를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예컨대 산간지역에서 유래한 가축사료가 가축 사양(diet)의 50% 이상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 비율은 반추동물(ruminants)의 경우 60%이며 돼지의 경우 25%라고 규정하고 있다.
1차 생산물에 비해 유제품 등 가공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시설의 입지 등에서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산간지역으로부터 30km 이내의 지역에서 가공된 경우 위의 표시를 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고 있다. 이외에도 EU는 ‘지역농업(local farming)’이나 ‘직거래(direct sales)’, ‘도서농업(Island farming)’ 등의 새로운 표시제를 도입하는 것을 검토 중에 있다. 이 모든 것은 EU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부가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최근 10년간 EU 내 유기농시장 규모가 4배로 확대되는 등 유기농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EU는 유기농정책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액션플랜을 발표했다(2014년 3월 24일). 2012년부터 소비자와 이해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의견수렴을 실시한 결과 유기농에 대한 신뢰도를 제고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아래 현행 예외조항을 폐지하고 유기농정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예정이다. 이는 EU 농업이 북남미·호주·뉴질랜드 등의 대규모 농업에 비해 경쟁력이 낮아 유기농, GI 등의 식품품질정책 강화와 소비자 신뢰제고로 비교우위와 경쟁력을 유지해가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또한 EU는 지난 4월 30일 유기농 동등성(Organic Equi-valency)정책의 전환을 예고하는 집행위 규정(Commission Implementing Regulation No. 442/2014)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EU와 제3국 간 유기농 동등성 협정을 새롭게 체결하기 위해서는 제3국이 EU에 2014년 7월 1일 이전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EU 집행위의 액션플랜에 따른 조치로 이해된다. EU가 현행 유기농 동등성 시스템(equivalence)을 이행준수(compliance) 시스템으로 점진적으로 전환하게 됨에 따라 향후 제3국이 EU 시장에 유기농 제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EU의 유기농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즉 EU 유기농 식품시장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앞서 보았듯 미국이나 신대륙의 대규모 농업에 비해 가족농 중심인 EU 농가의 가격경쟁력은 낮게 마련이다. 미국 농가의 평균 농지규모가 180ha인데 EU 농가의 평균 경지규모가 14.3ha라는 점을 단순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격경쟁력이 낮다고 해서 EU 농식품산업이 설 자리가 쉽게 없어지지는 않는다. 품질에서의 비교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궁리하는 것이 EU 농식품정책의 현주소다.
28개 회원국 간 편차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EU 농업의 경쟁력은 대체로 품질, 식품안전으로 귀결된다. 앞에서 본 지리적 표시제, 유기농 기준 강화 등은 EU 농식품 품질정책의 대표적 예이며 앞으로도 더욱 다양한 표시제의 도입, 식품안전 기준 강화 추세가 지속될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EU 식품시장을 두드려야 하는 제3국의 입장에서는 EU 시장 문턱이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EU 28개국의 농식품 품질, 식품안전 기준이 단일화되는 경향도 있으므로 우리 농식품 수출업계가 EU 제도에 익숙해진다면 유럽시장에 대한 효율적인 대처 역시 가능해질 수 있다. 우리나라의 농가교역조건 역시 농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농식품 가격경쟁력 측면에서 경쟁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데 EU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