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벤처캐피탈 산업은 그리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국 자본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창업가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제 상품과 서비스로 바꿔 미국의 역동적인 기업가정신과 창업욕구를 뒷받침해 주었고, 이는 여러 나라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벤처캐피탈 산업의 활황은 거시경제 측면에서도 여러 긍정적인 효과를 양산했다. 해마다 미국에는 약 200만개의 기업이 만들어지는데, 이 중 600~800개 기업이 벤처캐피탈의 펀딩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벤처투자가들의 모임인 NVCA(National Venture Capital Association)에 따르면, 민간 부문 일자리 중 약 11%가 벤처캐피탈의 펀딩을 받은 기업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들 기업의 수익을 합쳐보면 미국경제 GDP의 21%에 해당한다고 한다.
‘8인의 배반자’와 아서 록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샤클리(W. Shockley) 박사는 19 56년 ‘샤클리반도체연구소’를 설립하고 기존 트랜지스터보다 훨씬 빠르게 작동하는 새로운 형태의 반도체 제작에 나섰다. 이때만 해도 미 서부로 이주하려는 연구자가 드물었기에 샤클리 박사는 명문 공과대를 갓 졸업한 명석한 박사들을 고용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자 샤클리 박사는 강압적인 연구분위기를 강제했고, 이에 견디지 못한 8명의 박사들이 샤클리반도체연구소를 뛰쳐나오게 된다. 샤클리 박사는 이들의 이적을 배신으로 보았지만, 이들은 이후 미국 벤처캐피탈의 역사를 만들게 되는 ‘8인의 배반자(Traitorous 8)’로 기록된다.
이들은 혁신적인 반도체에 대한 자신들의 꿈을 상품화해줄 기업과 자금이 필요했고, 이때 접촉한 사람 중 한 명이 당시 중소 하이테크기업의 펀딩에 관심을 갖고 있던 투자가 아서 록(Arthur Rock)이었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당시 카메라회사를 운영하던 셔먼 페어차일드를 설득해 1957년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Fairchild Semiconductor)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벤처캐피탈 펀딩을 받은 회사로 기록된다.
이후 아서 록은 본인 명의의 벤처캐피탈 회사(Arthur Rock & Company)를 설립하고 여러 건의 유명한 벤처투자를 성공시키면서 미국의 벤처캐피탈 역사를 써나가게 된다. 대표적인 투자성공사례가 인텔(Intel)과 애플(Apple)인데, 인텔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8인의 배반자’ 중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가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에서 나와 앤디 그로브와 함께 1968년 설립한 회사다. 이후 아서 록은 ‘아서 록 마피아’라 불릴 정도로 벤처투자가들의 대부가 됐고, 이러한 벤처투자가들의 열정과 혁신적인 창업기업의 성공사례는 후일 다큐멘터리 영화(, 2011)로 제작되기에 이른다.
글로벌 경기회복으로 벤처투자 반등세…중국ㆍ인도 급부상
벤처캐피탈 회사는 가장 혁신적이고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기업을 발굴해 모험자본을 투자하는 전문적인 기관투자가다. 매년 2~3%에 이르는 수수료를 지급받지만, 이보다는 당해 기업 경영에 밀착 참여하면서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하게 된다. 대개 6년 이상의 장기투자를 하게 되며, 최종단계에서는 기업공개(IPOs)나 인수합병을 통해 15~25%의 자본이득을 누린다. 벤처캐피탈 회사에는 연기금, 보험회사 등 다수의 기관투자가가 합류하고 있다.
이런 벤처캐피탈 투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인 2009년부터 다시 반등세를 타고 있다. 특히 글로벌 경기회복이 투자자 심리개선으로 이어지면서 글로벌 벤처투자 규모와 건수 모두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그림 2> 참조). 올 1분기 글로벌 투자는 규모와 횟수 면에서 2008년 1분기 이래 최대였다. 지역적으론 글로벌 벤처투자의 69%가 미국에서 이뤄졌고, 이 중 36%가량이 실리콘밸리 인근에서 발생해 새삼 실리콘밸리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견고한 시장 펀더멘탈과 글로벌 경기회복에 힘입어 글로벌 벤처투자는 상당히 긍정적인 분위기이며, 글로벌 기업공개가 모멘텀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벤처투자 종료(exit)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최근 5년간 국가별 벤처투자 현황을 보면, 미국(2013년 342억달러), 유럽(78억달러), 이스라엘(35억달러), 인도(19억달러), 캐나다(17억달러), 중국(11억달러) 순이며, 최근 들어 인도와 중국의 투자증가 속도가 두드러진다. 미국의 경우 경기회복 모멘텀이 강화되면서 투자 규모와 건수가 함께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유럽은 일부 국가의 국가채무 위험 등으로 투자 규모는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면서도 투자 건수는 증가하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벤처투자 활성화 정책에 힘입어 반등하는 모습이지만, 여타국에 비하면 변동폭이 다소 큰 것으로 나타난다. 산업별로는 IT(2013년 127억달러), 헬스케어 관련 산업(115억달러)에 대한 투자가 두드러지며, 그 뒤를 이어 소비재 관련 서비스업(110억달러), 비즈니스 및 금융 관련 서비스업(105억달러)이 잇따르고 있다.
글로벌 벤처투자의 단계별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벤처투자는 크게 4단계로 나눠 창업기(start-up), 제품개발기, 수익창출기, 성숙기로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리스크가 높은 창업기 기업에 대한 투자보다는 수익창출기 기업에 대한 투자가 많이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위험선호형 투자보다는 안정지향적 투자를 선호하면서 창업기 투자(2013년의 경우 4억달러)와 제품개발기 투자(84억달러)는 갈수록 감소하는 대신 수익창출기 투자(381억달러)는 점증하고 있다, 수익창출기 투자는 2010년 전체 벤처투자의 56% 수준에서 매년 증가해 2013년엔 당해 연도 벤처투자의 76% 수준까지 육박했다.
왜 실리콘밸리인가?
전 세계적으로 벤처투자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은 실리콘밸리로 대변되는 미국 서부의 베이 지역이다. 매년 130억달러가량의 투자가 이뤄진다. 이어 보스톤을 중심으로 한 뉴잉글랜드(2013년 38억달러), 뉴욕메트로(34억달러), 남부 캘리포니아(30억달러) 지역이 근소한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위를 다투고 있다. 다섯 번째로 벤처투자가 많은 곳은 영국(22억달러)으로 2년 연속 5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유심히 봐야 할 곳은 중국으로, 중국 내 벤처투자가 활황을 보이면서 2010년과 2011년 연이어 베이징이 ‘Top 5’ 지역에 포함되기도 했다. 올 1분기엔 상하이와 베이징이 4위와 5위에 오를 정도로 벤처투자가 활황을 보이고 있어 앞으로의 증가 추세를 눈여겨봐야 하겠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인텔, 애플, 구글 등으로 대변되는 벤처 성공 히스토리가 쌓이면서 미 서부 샌프란시스코 남단에 위치한 실리콘밸리가 벤처투자 제1의 요지로 명성을 얻게 됐다. 글로벌 벤처자금의 상당액이 이곳에 집중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럼 무엇이 실리콘밸리를 벤처투자의 최고지역으로 만든 것일까?
EY 글로벌 벤처투자그룹(EY Global Venture Capital Group)의 미국대표인 제프리 그래보우(J. Grabow)는 그 이유를 크게 3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베이 지역만의 독특한 교육시스템, 유능한 연구진, 자본 및 투자자의 오묘한 조합이다. 인근의 스탠포드대, 칼텍 등 세계 최고의 싱크탱크와 해를 거듭할수록 성공역사를 만들어가는 즐비한 IT기업. 이를 보고 모여든 풍부한 투자자본이 상승적으로 선순환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둘째, 50여년에 이르는 풍부한 벤처투자 노하우와 수많은 성공·실패 스토리가 어느 지역보다 벤처투자의 성공률을 높여주고 있다. 셋째, 실패를 용인하는 투자·기업 문화다. 이 대목이 바로 우리 벤처업계가 갖지 못한 투자환경으로, 실패를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성공의 열매가 익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장기간의 투자문화가 벤처투자의 마지막 핵심요소라고 했다. 그래보우 대표는 최근 실리콘밸리에 몰려 있던 막대한 벤처자금이 이제는 새 기회를 찾아 서서히 신생투자지역으로 옮아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지난 15년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스라엘 벤처의 미국 진출 시사하는 바 커
미국, 유럽 일변도의 글로벌 벤처투자 환경이 이제는 이스라엘, 중국, 인도를 포괄하는 다기화된 판도로 서서히 재편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첫째, 여전히 글로벌 벤처투자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실리콘밸리 지역의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적인 특장점을 조속히 우리 벤처생태계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둘째, 중국의 벤처투자 규모가 눈에 띌 정도로 약진세를 보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 양 지구를 중심으로 커지고 있는 벤처투자환경의 변화와 중국정부의 벤처 장려책에 대한 분석, 아울러 우리 벤처업계의 대응책을 함께 고민해 가야 할 것이다. 셋째, 이머징국가 내 전통적인 벤처 강국인 이스라엘의 벤처산업 발달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최근 들어 이스라엘에서 설립한 벤처기업들이 미국에 사무소를 개설한 후 뉴욕에서 기업공개를 하면서 미국으로 본점을 옮겨 자금조달을 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가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토착 벤처기업들도 국내 벤처업계와 국내 소비자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자금을 모집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성공사례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 하겠다.